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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함부르크의 여름을 뜨겁게 달군 축제의 현장
유럽의 긴 여름은 풍성한 문화예술축제로 가득하다. 매년 여름 독일 함부르크 캄프나겔 극장을 찾아오는 국제여름축제(Internationales Sommerfestival 2018)도 그중 하나. 무용은 물론 연극과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유럽의 여름에 더욱 다채로운 색깔을 입히는 이번 국제여름축제는 8월 8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됐다.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뿐만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 국가 출신의 안무가·무용가 등 많은 예술가가 초청된 이번 축제는 각 국가와 예술 단체들의 다양한 예술적 특성과 그들의 예술적 신념을 보여주었다. 이와 더불어 작은 이벤트와 콘서트도 개최되며 장장 19일간 함부르크를 방문한 여러 예술가의 열정을 경험하게 했다. 그중 특별한 인상을 남긴 네 개의 무용 작품을 선정해 소개한다
말파소 무용단 ‘트리플 빌’
2012년 설립된 말파소 무용단(Malpaso Dance Company)은 쿠바 무용단 중 가장 유망한 단체다. 카리브 제도의 국가인 쿠바의 새로운 안무를 위해 안무의 공동 창작 과정을 강조하면서 여러 국제 안무가들과 협력하며 국제적으로도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번 축제에서는 ‘트리플 빌(Triple Bill)’을 주제로 무용단의 예술감독인 오스넬 델가도(Osnel Delgado)의 ‘24시간과 개(24 Hours and A Dog)’, 캐나다 출신 안무가 아주어 바튼(Aszure Barton)의 ‘불굴의 왈츠(Indomitable Waltz)’, 그리고 세계초연으로 선보인 아르헨티나 안무가 세실리아 벵골리(Cecilia Bengolea)의 ‘리퀴도토피(LIQUIDOTOPIE)’까지, 유명 안무가들의 세 작품을 선보였다. 세 작품에서 보인 움직임의 어휘는 발레와 모던댄스로 테크닉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안무가 각각의 움직임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과 무대 세팅에 따라 각기 다른 현대적 레퍼토리로 선보여졌다. 특히 ‘불굴의 왈츠’에서는 무용수들이 직선과 곡선의 움직임을 배경음악에 따라 다르게 반응했고, 점프·바운싱과 같은 동작들을 발레 동작과 결합, 여러 번 반복하며 움직임의 활발한 리듬을 강조했다. 하바나(Havana)의 일상에서 영감을 얻은 오스넬의 안무에서는 무엇보다 라이브 밴드를 무대 위에 배치하여 피아노·드럼·콘트라베이스 등 여러 악기의 연주가 객석으로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재즈풍의 음악에 맞춘 즉흥적이고 유동적인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펼쳐졌고, 이와 동시에 끊임없이 이어진 그들의 기술은 3인무·4인무·9인무 등으로 변화되는 무대 위의 다채로운 대형에 의해 더욱 신명 나게 표현되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풍경, ‘군중’
무대 위에 잔뜩 흩뿌려진 모래더미와 너저분하게 버려진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이 풍경을 자연스레 눈에 담으며 입장한 관객들은 자리를 찾아 앉는다. 무대의 조명이 켜지고 강한 비트가 담긴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흘러나오자 무대막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온다. 후드가 달린 점퍼와 짧은 바지를 입고, 어두운색의 스니커즈를 신은 그녀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지 않게 당당히 무대 위를 걷는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꾸며진 무대 배경과 그 풍경이 선명해졌다. 빠르고 강렬한 사운드와 슬로 모션으로 표현되는 그녀의 동작이 묘하게 대조되며, 연기가 자욱한 무대 위는 마치 해변을 꿈꾸는 것 같은 장면을 연상시킨다.
프랑스 안무가이자 무대 예술가인 지젤 비엔(Gisèle Vienne)은 작품 ‘군중(Crowd)’을 통해 정서적인 심연과 황홀함을 연구하고 이러한 상태를 통해 관중과 대화하고자 시도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의 황홀한 상태를 발랄한 분위기의 음악으로 설정했고, 젊은이들의 파티와 같은 정서적인 혼란스러움은 아주 느린 템포로 표현했다. 무대 위에 보이는 열다섯 명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일상생활의 동작들이고 일상 대화에서 보이는 흔한 표정이다. 담배를 피우고, 이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환호를 내지르기까지의 과정, 입을 쩍 벌리고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까지 모두 아주 느리지만 섬세하게 그려진다. 이러한 구체적인 장면은 빠른 음악과 그 비트를 자연스럽게 신체의 리듬으로 받아들인 관객에게 경이로운 장면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파티와 같은 상황의 모든 동작은 정해진 느림 리듬 속에 철저히 통제되어 있고, 그들의 집단적 격앙과 분노, 사랑과 폭력, 친밀감과 혐오감 등의 복잡한 감정들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아주 생생하게 전달된다. 공연 중간에 갑자기 뿜어지는 페트병 속 콜라의 분출은 이러한 느림 템포 동안의 제어된 긴장감을 시원하게 전환하기도 했다.
사이보그와 괴물의 쇼, ‘아폴론’
오스트리아 출신의 안무가 플로렌티나 홀징어(Florentina Holzinger)는 새로운 춤을 개발하기 위해 고전 레퍼토리를 연구하며 이를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녀가 이번 페스티벌에서 보여준 작품 아폴론(Apollon)은 말 그대로 괴물적인 힘과 강렬함 그 이상이었다. 러시아 안무가 조지 발란신의 1928년 네오클래식 발레 작품 ‘아폴로(Apollo)’를 재해석한 것으로 관객과 공연자 모두에게 관음증·신체 숭배·성 차별주의 및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탐험의 공간이 됐다. 여성 무용수 6명의 과감한 나체, 그들의 당당한 움직임, 자연스럽게 관객의 인상을 찌푸리게 함과 동시에 이목을 끄는 여섯 몸의 일상적이지만 공공장소에선 노출되지 않는, 혹은 사회적으로 노출돼서는 안될 행동들, 무대 중앙에 설치된 로데오 황소가 주는 강렬함 등 극장 안은 공연 내내 웃음과 경악, 불편함 등의 강렬한 감정들로 뒤섞였다. 플로렌티나는 스트라빈스키 음악이 담긴 발란신의 고전 발레를 사이드 쇼 버전으로 재해석하여 무대 위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아름다움을 급진적·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슬랩스틱·라이브 아트·스포츠와 못·망치·런닝 머신·역기·쇠사슬 등의 소품들이 오묘하게 조합된, 옛 것에서 탄생한 새로운 신화 ‘아폴론’은 관객들의 오감을 간지럽히며 충격적이면서도 사실적이고 재미있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했다.
서브컬쳐의 대중화, ‘투 다 본’
멋진 점프 안무와 젊은 에너지의 폭발로 표현된 작품 ‘투 다 본(To Da Bone)’은 소셜 미디어와 춤의 역동적 미학을 특징으로 한다. 작품에 소개된 점프스타일(Jumpstyle)은 유럽 벨기에와 네덜란드 교외에서 시작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진 것으로 춤과 음악에 절정의 에너지를 요하는 스타일이다. 젊은 청년들이 강렬한 전자 박동에 맞춘 멋진 점프 안무를 짧은 클립영상으로 인터넷에 게시하기 시작했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만남은 서로 춤을 겨루기 위한 오프라인상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파리 트리오 예술가 집단 ‘라 호르데(La Horde)’는 안무, 비디오 및 설치 작업을 하며 큰 무대공연을 위해 오리지널 디지털 속 안무의 개성과 이들 공동체의 배경을 무시하지 않고 현대무용 형식을 고안하였다. 열한 명의 젊은 무용수들은 바람막이 점퍼와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관객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춤을 추는 내내 그들의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했다.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씩씩한 기합 소리를 내며 개개인의 개성을 표현했고, 그들의 움직이는 리듬은 관객들의 에너지를 충전해주었다. 춤에 대한 열정, 즐거움, 그리고 젊은이들의 반항적 심리가 아주 유쾌하게 표현되었다. 이처럼 ‘투 다 본’은 드러나지 않았던 오늘날의 청소년 문화와 소셜 미디어의 호환된 예술을 보여주고 강력한 심미적 호소력을 전달했다. 이번 국제여름축제에서 무엇보다 주목되었던 점은 바로 작품의 다양성이다. 그동안 작품 선정과정에 있어서 독일 함부르크 도시의 예술가와 예술학자들의 취향 및 그들이 선호하는 작품형식의 기준으로 인해 초청되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작품들까지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좀 더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은 물론 여전히 전통 무용 테크닉을 고수하는 작품 등 다양한 무용미를 경험할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안무가와 예술가들이 초청된 만큼, 예술작품의 옛것과 새로움이란 시대적인 물음이 아니라 여러 도시가 각기 선호하는 그들 고유의 미학의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다채로움으로 가득했던 이번 축제에 이어 또 다른 색다름으로 다가올 다음 국제 여름축제는 2019년 8월 7일부터 25일까지 독일 함부르크 캄프나겔 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글 김수진(안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