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춤의 운명이라니 _5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리고 단점을 보았을 때 자신의 자유나 생명을 걸고서라도 규탄할 수 있어야 한다
-캐서린 던햄, ‘사우스 랜드’ 프롤로그-
취기가 오른 젊은 백인 남녀 렌우드와 줄리가 목련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눈다. 줄리의 장난스러운 놀림에 렌우드가 발끈하여 그녀를 흠씬 구타하고는 달아난다. 정신을 잃었던 줄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치욕과 분노, 절망이 교차하던 순간 그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아내어 눈을 번뜩인다. 그리고 외친다. “깜둥이(Nigger)!” 무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흑인 노동자 리처드는 백인 폭도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뒤 목련 나무에 목이 매달린다. 코러스가 시체를 수습하여 애도의 행진을 하는 동안 리처드의 연인 루시가 목련 꽃을 들고 나타나 절규하고, 줄리는 시체의 불탄 옷자락을 찢어 전리품으로 챙겨 들고 빠져나간다.
린치 댄스
캐서린 던햄(Katherine Dunham, 1909~2006)의 ‘사우스랜드(Southland, 1951)’ 1막은 남녀의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가 다음 순간 인종차별의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젠더와 인종의 위계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백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폭행한 것은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으나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폭행한 것은 사회적 갈등으로 탈바꿈한다. 게다가 성폭행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서구사회에서는 흑인 남성의 성적 능력이 우월하다는 우생학적 믿음이 만연했고, 백인 남성은 그들(흑인 남성)이 우리의 소유물(백인 여성)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두려움은 잔혹한 복수를 정당화한다. 린치(lynch)는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혹은 그렇다고 여겨진) 흑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백인 남성의 집단 폭력행위이다. ‘사우스랜드’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빌미로 한 린치의 발생과 결과를 다룬 댄스 드라마다.
1막의 엔딩에서 루시가 바닥을 나뒹굴며 절규하는 동안 코러스 가수가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를 노래한다. 아벨 미어폴(a.k.a. 루이스 앨런)의 시를 바탕으로 빌리 할리데이가 불러 유명해진 곡이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가 매달린 채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 멋진 남부 풍경에 튀어나온 눈과 찌그러진 입술,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 그리고 어디선가 살덩이를 태우는 냄새! 까마귀가 뜯어 먹고 비를 맞고 바람을 빨아들이면 이상하고 슬픈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지네.” 성기가 훼손되고 나무에 매달려 불타버린 린치 희생자의 이미지는 흑인인권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우드랜드’에서 ‘이상한 열매’ 노래에 맞춰 루시가 애도하는 장면은 펄 프리머스(Pearl Primus)의 동명 무용작품인 ‘이상한 열매’(1943)를 연상케 한다. 프리머스의 작품은 흑인 여성의 짧은 솔로 작품으로 직설적인 제목과는 달리 나무나 시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우스랜드’의 1막은 프리무스의 ‘이상한 열매’에 인과 관계와 내러티브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2막이다. 2막은 1막의 시공간에서 분리되어 어디에나 있음직한 나이트클럽을 배경으로 한다. 한 무리의 흑인이 춤추고 노래하며 무언가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1막에서 극을 해설했던 코러스가 리처드의 시체를 들고 천천히 입장한다. 군중들은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얼어붙었다가 서서히 일그러진다. 울음을 터뜨리는 여성, 바닥에 끊임없이 칼을 던지는 남성, 바닥을 나뒹구는 커플 사이로 눈먼 거지가 홀연히 무언가를 바라본다. 모두가 느끼지만 형언할 수 없던 진실, 직접 겪지 않더라도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차별을 직시하는 것이다. ‘사우스랜드’는 노골적이고 불편한 방식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무대 위의 폭력을 안락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액자 틀이 부서지자 린치는 특수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이 점에서 ‘사우스랜드’는 도발적이고 전복적이다.
‘N 단어’를 내뱉는 고통
‘사우스랜드’의 주인공 커플인 줄리-렌우드, 루시-리처드는 실제 무용수의 이름에서 따왔다. 루시는 루실 엘리스가, 리처드는 리카르도 아발로스가 맡았고, 줄리는 던햄무용단의 유일한 백인 단원인 줄리 로빈슨 벨라폰테가, 렌우드는 렌우드 모리스가 붉은 가발과 화장으로 분했다. 작품에서 백인폭도는 무형의 존재로 처리되기에 실제 무대에 등장하는 백인은 줄리-렌우드이고 실제 백인은 줄리 뿐이다. 그런데 줄리가 연기하는 줄리는 인종적 위계를 악용해서 참사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비극의 발단은 성폭행한 렌우드이겠지만 비난의 타겟은 줄리가 된다. 특히 자기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리처드의 불탄 옷자락을 전리품으로 챙겨 든 줄리와 억울하게 연인을 잃은 루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1막이 끝나는 던햄의 연출은 젠더보다는 인종 문제를 부각하며 줄리에 대한 비난을 증폭시킨다.
‘사우스랜드’의 클라이맥스는 린치 장면이 아니라 줄리가 리처드에게 손가락질하며 ‘N 단어(Nigger)’를 소리치는 장면이다. 흑인을 경멸하는 ‘N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금기였다. 특히나 여간해선 말을 하지 않는 무용작품에서 경멸적으로 그 단어를 소리치는 것은 줄리와 다른 무용수들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줄리는 던햄에게 이 말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울며 빌었고, 이것은 연기일 뿐이라고 자신을 세뇌해야 했다. 그럼에도 리허설과 공연이 진행되면서 동료 무용수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걔가 그 단어를 어떻게 내뱉는지 들었어? 자기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는 못할 거야.” 게다가 하룻밤 공연에서 ‘사우스랜드’의 앞뒤에 보다 가볍고 흥겨운 작품을 공연해야 한다는 것 또한 무용수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악다구니를 쓰며 싸운 후에 속없이 헤헤거리는 꼴이랄까. ‘N 단어’를 내뱉은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춤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함께 땀 흘리며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투영된 작품을 통해 그들 각자의 정체성을 차갑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N 단어’는 무용수들을 분열시키고 내상을 입혔다.
무엇이 스타 댄서를 도발했나
캐서린 던햄은 미국 무용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이 드물던 시절에 던햄은 시카고 대학에서 A.R. 레드클리프 브라운,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 등 미국 인류학의 선구자들에게 사사 받고 구겐하임 재단의 펠로우십으로 아이티에서 필드워크를 수행한 흑인 여성 엘리트였다. 게다가 화려한 외모와 수려한 춤솜씨를 갖추었기에 대학 시절부터 무용수로 활동했으며, 조지 발란신이 안무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늘의 오두막(Cabin in the Sky, 1940)’에 출연하며 스타가 됐다. 진지한 인류학자와 관능적 댄서라는 이중적 정체성으로 인해 던햄은 커리어 초반부터 셀러브리티로 대우받았고 그녀의 무용단은 1947년부터 20년간 33개국을 투어하며 국제적으로 활약했다.
오늘날의 측면에서 볼 때 흑인 여성 지식인인 던햄이 린치를 고발하는 ‘사우스랜드’를 만든 것은 논리적인 귀결로 보인다. 펄 프리무스의 ‘이상한 열매’보다 여러 해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되레 이상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녀의 레퍼토리에서 ‘사우스랜드’는 이질적이다. 던햄은 미국인이고 미국 최초의 흑인무용단을 세웠지만 미국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한정되길 거부했다. 그녀는 본질주의자라기보다는 세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니그로 댄스(Negro Dance)라는 말로는 내 예술을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응수했던 던햄은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전에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해 지역,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흑인의 혼재적인 문화 경험을 포용하려 했다. 게다가 춤과 노래, 드라마가 어우러지는 레뷰(revue) 형식은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주제에 탐닉하던 당시 현대무용계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었다. 관능적이고 흥겨운 춤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녀가 돌연 ‘사우스랜드’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던햄의 흑인인권운동은 무대 밖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전국투어는 사회운동의 실천이었다. 공공장소에서 인종적 분리를 명시한 짐 크로우 법이 1964년에야 사라졌으니 1940~1950년대 미국 전역을 누비던 던햄 무용단은 매 순간이 인권운동의 시험장이었다. 흑백 분리된 열차로 이동해야 하고 가는 곳마다 식사와 숙박에서 차별을 겪으면서도 이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던햄은 백인 무대미술가 존 프랫과 결혼하고, 그들을 수용하길 거부한 호텔을 고소했으며, 흑백분리된 관객 앞에선 공연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백인 관객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해 연설했다. 유명인으로서의 힘을 명민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던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947년부터 시작된 세계투어에서 던햄 무용단은 미국에서와 비슷한 인종차별을 겪었다. 흑백 커플인 던햄과 프랫이 브라질 상파울로의 수준급 호텔에서 숙박이 거부당하자 그들은 이 호텔을 고소했고, 이는 실제 브라질의 공공장소 흑백분리법을 철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절망감에 휩싸인 던햄은 국경을 넘어선 인종 문제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남미투어 중 제작되고 공연된 ‘사우스랜드’는 던햄의 각성을 드러낸다. 미국이 아닌 국가에서 굳이 린치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든 것은 그 자체로 명료한 발언이다. 린치가 미국만의 특이하고 극단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만연한 인종적 갈등 및 폭력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우스랜드’의 초연에서 던햄은 프롤로그에 등장하여 칠레 관객들에게 스페인어로 연설했다. “이것은 미국 남부지역에 행해진 린치에 대한 실제 이야기가 아니지만 동시에 이들 모두의 이야기이다. 나는 불타는 살의 냄새를 맡은 적이 없고 남부의 나무에 매달린 흑인 시체를 본 적도 없지만 이들을 영혼으로 느껴왔다. 치부를 드러내어 많은 양심이 항거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창조적 예술가로서 이를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이것은 미국 전체에 대한 것도, 남부 전체에 대한 것도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실재한다.”
그 춤을 춘 대가
칠레 국립오케스트라의 의뢰로 제작된 ‘사우스랜드’는 1951년 1월 칠레 산티아고 시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린치에 대한 작품이라는 게 알려지자 칠레의 미국대사관 관계자가 리허설에 찾아와 린치 장면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으나 던햄은 공연을 강행했다. 공연 직후 미국 정부 관계자가 칠레 언론사를 검열하면서 공산주의계열 신문 한 곳을 제외한 모든 언론사가 이 작품에 대해 침묵했다. 무용단은 며칠 안에 칠레에서 퇴거할 것을 명령받았고, 칠레를 떠나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을 땐 해외공연에서 늘 있던 대사관 칵테일파티나 만찬 대신 싸늘한 침묵만 감돌았다. 2년 후인 1953년 프랑스 파리 공연에서 던햄은 다시 모험을 감행했다. 파리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던햄은 관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우스랜드’를 공연했으나 리뷰는 신통치 않았다. 공산주의 계열의 언론에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찬양했으나 보수적인 신문들은 던햄의 직설적인 메시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암묵적 룰을 깨뜨린 대가는 컸다. 무용수들은 ‘사우스랜드’로 인해 자신들의 안위와 무용단의 활동이 위협받을 것을 걱정했다. 그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던햄은 조국의 치부를 드러내서라도 개선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보았으나 미국 국무부에선 그 자체를 반정부적이고 전복적인 행위라 여겼다. 냉전 시대에 미국에 대한 비판은 곧 공산주의에 대한 찬동으로 해석되었고, 매카시즘의 열풍 속에 예술가의 문제 제기는 사상적 불온함을 의미했다. 칠레 공연 후 FBI는 던햄의 공산주의 성향을 조사하는 파일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게다가 1950년대에는 냉전구도 속에서 미국 정부는 자유진영을 단합시키고 자국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예술가들을 문화사절단으로 해외에 파견하던 시절이다. 앨빈 에일리나 호세 리몬과 같은 비백인 미국 무용가들은 미국의 인종적 화합을 상징하는데 안성맞춤이었기에 국가적 후원으로 해외투어를 다녔다. 던햄 무용단은 그 명성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선정되지 못했으며, 그녀 스스로 추진한 해외 공연마저 번번이 취소되거나 제약이 따랐다. 1956년에는 중국의 경극 단체가 던햄 무용단을 초청하였다. 핑퐁외교 이전이었으니 문화예술적 영광일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었지만, 그녀의 허가요청에 미국 정부는 여권을 포기하고 무용수 일인당 만 불의 벌금을 내라고 통보했다. 결국 던햄은 중국 공연을 포기했다. ‘사우스랜드’는 그녀의 정신력과 담대함을 허물어버렸다. 칠레와 프랑스 공연 이후 ‘사우스랜드’는 공연되지 않았고 던햄 무용단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1965년에 해체되었다.
문제작을 감히 되살릴 용기
1999년 90세 생일을 맞은 자리에서 던햄은 자기 생에 남은 미련이 있다면 ‘사우스랜드’를 미국에서 공연하지 못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던햄은 7년 후인 2006년에 사망했지만, 그녀가 남긴 말은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유언으로 남았다. 던햄의 제자로서 미국 덴버에서 자신의 무용단을 운영하는 클레오 파커 로빈슨은 2010년에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였다.
로빈슨은 ‘사우스랜드’의 복원을 위해 미국연방예술기금(NEA)의 미국 걸작(American Masterpiece) 부문에 신청하여 10만 불을 지원받았다. 미국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그토록 억눌렀던 작품이 이제 와서 ‘미국 걸작’으로 승인되다니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이 ‘사우스랜드’의 낙인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은 아니다. 로빈슨은 NEA 기금을 신청하면서 심리적 동요와 두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자신과 무용단의 미래가 뒤흔들릴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낙인은 그런 것이다. 복원 공연에서 줄리 역을 맡은 수잔 리처드슨은 흑인이 다수인 이 무용단에서 활동하는 백인 무용수이자 리허설 감독으로, 역시 줄리 벨라폰테와 동일한 심리적 압박을 겪었다. “아무도 내가 이걸 하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흑인 민권 운동인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유효한 미국 사회에서 ‘사우스랜드’는 과거의 걸작으로 박제될 수 없다.
작품의 복원은 쉽지 않았다. 50년대 작품답지 않게 기록이 적었다. 영상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며, 대본·의상·음악에 대한 자료도 미비하다. 해외 공연 중에 제작된 점, 특히 정치적 압박 속에서 공연을 감행한 점 때문이라 짐작된다. 여든이 넘은 줄리 벨라폰테가 복원에 참여하고 상당한 재해석을 통해 2012년 덴버에서 공연되었다. 60년 만에야 비로소 고국의 관객들에게 선보인 것이다. 던햄은 죽고 린치는 사라졌지만 미국 관객들은 한 예술가가 자기 커리어를 불살라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염원을 읽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