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캔디드’ & 살로넨/필하모니아 내한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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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1월 1일 2:43 오후

‘르네상스인’ 번스타인을 추억하다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레너드 번스타인을 생각하면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린다. 호기심 많고 창조적인 르네상스인이었던 다 빈치처럼 레너드 역시 왕성한 창작력과 타고난 음악성으로 지휘·작곡·피아노 등 어느 분야든 빠지지 않는 완성도를 자랑했다. 미국이 낳고 기른 ‘레니’는 카라얀·솔티 등과 함께 20세기 후반 스테레오 시대의 클래식 음악 업계를 이끌었던 스타였다.

번스타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들이 관심 속에 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곡가 번스타인’이 이처럼 주목받았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10월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캔디드’와 10월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펼쳐진 에사 페카 살로넨/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협연)의 ‘불안의 시대’는 번스타인을 두고두고 기억할 의미 있는 무대였다.

 

유쾌하고 섹시한 ‘캔디드’

12일 예술의전당, 티에리 피셔가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번스타인 오페레타 ‘캔디드’를 콘서트 버전으로 한국 초연했다. 합창석에 국립합창단이 위치하고 서울시향이 무대 위에 자리했다. 유명한 서곡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티에리 피셔의 지휘는 기존의 해석에서 들을 수 있었던 들뜬 분위기보다 더 차분하면서 분석적으로 다가왔다. 목관악기가 강조되고 울림이 투명했다. 타악기도 뚜렷했고 곡은 한층 달아오르다 산뜻하게 끝났다.

해설자를 맡은 뮤지컬 배우 마이클 리의 영어 내레이션이 극을 매끄럽게 진행시켰다. 그는 캔디드(테너 조너선 존슨), 쿠네곤데(소프라노 로렌 스누퍼), 팽글로스 박사(바리톤 휴 러셀) 등 등장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해설자가 이야기의 키를 확실히 제시하니 흐름이 잘 보였다.

2막 전체를 감상하고 나니 대체로 여성 성악가들의 가창력이 남성 성악진보다 우위에 있었다. 특히 테너 조너선 존슨은 풍부한 성량이 아쉬웠다.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쿠네곤데의 ‘화려하고 즐겁게’는 괴로움과 즐거움 사이에 번민하는 쿠네곤데의 이중적 성격을 잘 드러냈다. 조수미의 가창같이 소름 돋는 콜로라투라의 극한은 아니었지만, 로렌 스누퍼는 쿠네곤데의 귀여운 매력을 발산했다. 이후에도 스누퍼는 특유의 섹시함으로 배역을 잘 소화하며 이날 공연의 주인공으로 객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번스타인 특유의 유머를 무대 위에서 만났다는 수확이 컸다. 전쟁·지진·종교재판·고문·교수형·폭행·사기·협박, 축첩 등 인간사의 부조리들이 버젓이 무대 위에서 언급됐다. 사회 지도층도 예외가 아니긴커녕 이들이 더 하다는 풍자도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캔디드가 쿠네곤데를 첩으로 삼은 주교와 유대인을 해치우는 장면 같은 웃음 포인트가 휙휙 지나갔다. 러시아 수도원장 딸 올드 레이디는 매 대사와 움직임 자체가 웃음을 자아냈다. 이 역할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빅토리아 로젠구드는 티에리 피셔를 껴안기도 하는 등 능청스러움과 너스레로 관객들을 미소 짓게 했다. 파케트 역의 메조소프라노 알렉스 로마노도 잊을 만 하면 나타나 두터운 가창력을 선보였다.

마지막 가사인 ‘우리는 집을 짓고 장작을 팰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정원을 가꿀 거예요’에서 드러나는 천재 작곡가 번스타인의 낙관주의가 기분 좋은 뒷맛을 남겼다. 티에리 피셔는 ‘캔디드’ 콘서트 버전을 유타 심포니와 다시 연주할 예정이라 한다.

 

따스하고 강렬한 ‘불안의 시대’

15년 만에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한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한 백발에 풍성해진 체구는 세월을 떠올리게 했다. 1986년 번스타인 지휘로 번스타인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를 협연한 지메르만은 “내가 100세가 되었을 때 함께 연주하자”고 한 거장의 제안을 잊지 않았다.(*편집자 주: 널리 알려져 있듯이, 지메르만은 공연 중 촬영 및 녹음에 극도로 민감하여 본 협연에서도 사진 촬영이 진행되지 않았다.)

지메르만은 호기 있게 웃으며 악보를 피아노에 걸쳤다. 우울한 목관 선율로 ‘프롤로그’가 연주되는 동안 그는 몸을 왼쪽으로 틀고 관객처럼 피아노 의자에 앉아 오케스트라 쪽을 쳐다봤다. 저음이 넓게 퍼지며 하강음형을 연주하자 지메르만은 다시 몸을 바로 틀고 15년만의 첫 건반을 눌렀다. 왼손으로 지휘하는 시늉을 하며 오른손으로 능숙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하프와 플루트, 타악기는 청신하면서 뚜렷했다.

곧 거스를 수 없는 시대가 진군하듯 현의 총주가 발산했다. 피아노에 현악기가 얹히며 볼륨감을 높였다. 현과 관의 총주는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메르만의 피아노 독주는 영롱하면서도 왠지 고독하고 쓸쓸했다. 불안의 진군 같은 연주에 모든 악기들이 가담하며 피아노도 고조됐다. 지메르만은 피아노의 비틀거리는 싱커페이션 등 복잡한 리듬을 야무진 음색으로 처리했다. 엄습하며 포효하는 금관악기로 ‘일곱 시기’를 끝냈다. ‘일곱 무대’는 천천히 상승하는 피아노로 시작됐다. 총주와 피아노는 공 소리와 함께 불안의 시대를 소리 높여 외쳤다. 듣는 이의 폐부 깊숙이 불안의 시대를 주입하는 듯했다.

분위기를 바꾼 건 ‘가면무도회’였다. 가장 빠른 부분으로, 오든의 시에 나오는 한 여자와 세 남자의 파티 장면이다. 래그타임과 재즈의 이디엄을 노출한 이 부분에서 지메르만은 몸을 들썩이며 가공할 기교를 선보였다. 팀파니·첼레스타·타악기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피아노가 흥겹고 고급스런 터치를 보였다. 빅밴드를 방불케 한 관악군의 생동감이 남달랐다. 파티가 끝나기 전 무거운 선율이 드리웠다. 지메르만은 번스타인과 접신하듯 거침없었다. 정갈하고 힘 있는 타건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새아침의 여명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불길함을 끼얹은 듯 거대한 공 소리에 흩어졌다. 곡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며 이 작품이 초연됐던 1949년이나 현재나 여전히 ‘불안의 시대’임을 역설했다.

이 곡에 앞서 살로넨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라벨 ‘어미거위 모음곡’에서는 소담스럽고 달콤한 목관이 귀에 들어왔다. 타악기는 산뜻했고 포근한 현 위에 플루트가 그윽했다. 살로넨의 지휘 동작은 우아했다. 피치카토가 풍윤하고 현의 고음이 푸근했다. 2부에 연주된 버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금관과 높은 밀도의 바이올린군을 들으며, 살로넨이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예전 도흐나니 시절보다 고급스런 음색을 내는 오케스트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고조를 향한 클라이맥스에서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뽐내듯 가장 큰 음량을 들려주었다.

앙코르는 느린 템포로 시작해 약음을 선보이고 전속력으로 끝난 시벨리우스 ‘슬픈 왈츠’와 독일적이지 않았지만 목관이 명료하게 현과 금관을 이어준 바그너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이었다. 뚜렷하고 시원시원한 진행에 따뜻한 음색의 금관이 뇌리에 남는다.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서울시향·마스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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