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주제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DANCE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요당할 때, 우리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 말은 올해 서울세계무용제(SIDance, 이하 시댄스) 난민 특집에서 단연 돋보였던 ‘추방’의 안무가인 미트칼 알즈가이르의 말이다.
그는 시리아 출신이고 마치 난민들의 경로를 따르듯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의 몽펠리에 국립안무센터에서 안무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가 프랑스에서 춤을 추던 그 시점은 시리아 내전이 심각해져 많은 난민이 생겨나던 찰나였고,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시리아 동료 2명과 함께 3인무인 ‘추방’을 만들어 당스 엘라지 콩쿠르에 출전해 대상을 받았다.
다른 작품들과 상당히 결이 달랐던 이 작품은 음악 반주 없이 무용수 3명의 숨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만 들리는 무음의 작품으로, 작품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절실했던 눈빛과 진군이 되어가는 발소리, 허름한 옷과 웃옷을 벗은 그들의 가녀린 갈색 몸이 주는 육체성에 압도당해 당시에도 객석은 긴 기립박수를 보냈었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8개의 난민특집 작품이 올해 시댄스 무대에 올랐다. 세계 각국의 현대춤을 소개하고 지역을 특집을 주로 꾸렸던 지향점을 조금은 사회적이고, 현재적인 이슈를 초점으로 프로그램하겠다는 의지로 꾸려진 것이었다.
처음에 난민특집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프로그램 할 수 있는 작품의 수에 대한 우려였다. 일반적인 축제에서 난민을 주제로 한 작품이 잘 없을뿐더러 지금의 난민이 콕 집어 주제로 할 만 한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 농도 면에서는 떨어졌으나 몇 개의 작품은 수작으로 기록될 만했다.
‘칼날의 역설’과 ‘국경 이야기’
이란 출신인 알리 모이니의 ‘칼날의 역설’은 난민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으나 벗은 몸에 흰 끈으로 얼개를 만들고 크고 작은 스테인리스 칼 25개를 착용하고 추는 그의 솔로가 왜 이 작품이 난민 문제와 연결되는지 고민하게 한다. 공연을 잘 하지 않는 자유소극장 로비에 2x3m의 함석판을 놓고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며 춤을 춘다. 칼을 하나씩 몸에 채우고 서서히 왼쪽 자전과 오른쪽 공전을 점차 크레셴도 시켜가는 단순한 도는 춤(whirl dance)을 추었지만, 그의 몸에 묶인 칼들은 마치 가시가 돋아나는 것처럼 서서히 살아 칼끝을 세운다. 돌면서 루미의 시를 이슬람 경전을 읽는 방식으로 그가 육화해나갈 때 그는 분노한 노예인 듯, 아니면 그 분노를 다스리기 시작한 존엄하기 그지없는 성자인 듯 묘한 경계에 서있다. 전쟁과 미움, 분노와 살의,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을 지켜보는 신의 시선은 ‘추방’에서 보았던 그들의 절실한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탈리아 출신이며 영국에 자리 잡은 안무가 루카 실베스트리니의 ‘국경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다국적 사회에서 이민자의 삶을 쉽고 경쾌하게 다룬다. 다른 문화권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타자화하는 오랜 습성을 영국인이 주인이 되어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파티 상황으로 풍자한다. 형식적 인간관계와 차별의 분위기에서 시작했으나 각 문화권의 종교·음식·춤을 주제로 각자의 히스토리를 얘기하고, 점차 다른 나라의 춤을 함께 추며 서로를 관용한다. 스페인 음악가로 등장하는 안타 카라나가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 다양한 전통음악을 라이브로 무대에서 살려내는 음악적 능력이 다양한 춤과 더불어 무대를 매우 생동감 넘치는 곳으로 살아나게 했으며, 춤 본연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난파선-멸종생물 목록’과 ‘나의 배낭’
개막작이었던 피에트로 마룰로 안무의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은 유럽의 유명한 댄스플랫폼인 에어로 웨이브즈가 뽑은 올해의 안무작이다. 거대한 검은 비닐 풍선은 멸종동물인 고래나 매머드를 떠올리게 하거나 거대한 검은 비닐이 주는 일상성과 그 실감으로 공해나 음습한 파괴력을 상상하게 하는 매우 중의적인 장치이다. 그럼에도 전라의 출연자들은 버블을 마치 기계가 조작하는 것처럼 버블과 하나 되어 버블의 움직임을 고려한 계산된 움직임을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무엇으로 규정되기를 꺼려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무엇을 지칭할 때 이름을 규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난민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우문이 될 것이다. 아르떼 포베라(예술의 상업성에 반대하여 일상소재를 사용하는 가난한 예술)를 지향하는 그의 무대는 자연스러움과 그 회복의 힘에 대한 희망과 치유의 에너지가 넘실거린다.
난민으로서의 경험으로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은 ‘나의 배낭’이다. 안무자이자 혼자 춤을 추는 플로랑 마우쿠는 콩고의 수도 브라자빌 거리에서 12살 때부터 댄스 그룹을 만들어 춤추기 시작했으나 1998년 콩고 대학살을 피해 난민이 되고 어렵게 생존한다.
6개의 텔레비전을 모니터보다는 조명으로 사용하거나 12개의 조명을 바텐에 달아 낮게 드리워 놓고, 또는 하수의 벽에만 매우 촘촘히 조명기를 달아 반대 벽에 쏘는 것으로 암울하거나 무거운 그의 내면 혹은 폭력에 의해 한쪽으로 몰리는 상황을 빛의 언어로 연출한다. 또 하나 그의 섀도로 등장하는 인형과 블루스에서 격투기로 넘어가는 장면은 조용하지만, 매우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가 스트리트 댄스를 매우 잘 추는 소년이었고, 콩고의 리듬도 잘 타며 그 모든 것을 담아 현대춤 언어까지 매우 노련하고 출중하게 춘다는 것은 이 무대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이것은 내 몸에 새겨진 나의 이야기다…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브라자빌은 시적인 소용돌이로 가득 찬 녹색 도시. 그곳에서 내 몸의 환희와 분노 속에 내 발걸음이 솟아올랐지. 배낭을 지고 내일을 만들기 위해 춤을 추며 20년간 방황을 하고 있지…나는 나의 배낭의 해방을 기다린다. 내가 살아있기에 아직도 보지 못한 나의 시신. 장고가 그의 관을 끌고 다니듯, 나는 내 시신을 끌고 다닌다…아프리카의 석유탱크 기니만, 나의 고국 콩고는 기니만의 중심부이다. 석유는 단돈 3달러에 채굴되지만 100달러에 팔려나간다. 이 피의 저수조는 권력 남용·부패·면책으로 계속해서 굴러가며, 과거엔 프랑스였고, 그 후엔 미국이었고, 유럽이었고, 최근에는 중국과 브라질에 의해서 자행되는 일이다”
춤이 이어지는 가운데 차분하지만 깊은 슬픔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그의 낭독이 이어진다. 세련된 조명과 음향의 사용, 노련한 춤이지만 아직은 그의 배낭 속에 든 난민의 기억과 상처는 꺼내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아직도 헬기가 뜨는 소리는 그가 돌리는 긴 조명등의 소리와 빛처럼 그의 신경을 긁고 있는 듯 그의 난민은 아직 진행 중이다. 글 이지현(춤 비평가) 사진 서울세계무용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