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REVIEW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1월 1일 2:29 오후

editor’s note
‘객석’ 기자들이 직접 뛰어다닌 공연 현장

 

리더의 중요성

파비오 루이지/KBS교향악단(협연 임동혁)

10월 13일 | 롯데콘서트홀

©Bonsook Koo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의 버림을 받고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우리에게 길들여진 세계에서 깨어나게 하는 충격을 주는 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비단 책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바꾸어 보아도 문장은 그리 어색하지 않게 흐른다. 물론 충격을 주는 음악만이 절대적으로 좋은 음악은 아니다. 삶의 일부처럼 여유롭고 편안하게 흐르는 음악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음악도, 위로가 되는 음악도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처럼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는 음악도 필요하다. 더욱이 습관화된 일상에 길들어 있거나 마음이 지나치게 느슨해진 상태라면 말이다.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를 초청하며 KBS교향악단 특별연주회로 열린 이 날의 공연은 그런 충격의 일부를 맛보게 해주었다. 그동안의 틀을 깨고 또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고, 악단을 이끄는 리더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KBS교향악단과 함께하는 첫 번째 무대에서 그가 꺼내든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K466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었다. 특히 2부를 채운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은 이전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녹음하며 에코 클래식 상을 받았던 작품으로(당시 그는 함께 수상 명단에 오른 작품 중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이 있다는 것에 반해 수상을 거절했다) 기대감을 더했다.

그의 메시지는 확고했다. 1시간 남짓한 긴 연주 시간에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주 섬세한 소리부터 홀 전체를 울리는 거대하고 광포한 울림까지, 숨죽이고 바라보게 만드는 다이내믹한 움직임이 ‘KBS교향악단을 통해’ 흘러나왔다. 지휘자와 악단의 호흡은 임동혁과 함께한 모차르트 협주곡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악보에 충실한 해석에서 나오는 우아한 음색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서울에 이어 다음날 통영까지 무대가 이어졌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시간은 분명 악단에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악단을 이끄는 리더인 지휘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고, KBS교향악단의 성장도 멈추지 않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들 앞에 앞으로 이러한 기회가 더욱 많이 놓이기를, 이를 통해 더 큰 도전과 성장을 이루기를 기대해본다. 이미라

 

여운에 담긴 자기 증명

클라라 주미 강 & 알레시오 백스 듀오 리사이틀

10월 14일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최근 한국 음악계에서는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강세를 보인다. 피아니스트의 흐름은 남성 연주자들이 주도하는 양상에 반해 바이올린의 영역에서는 김다미·김봄소리·임지영·장유진 등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한 세대적 흐름 위에는 클라라 주미 강이 있다. 2010년 센다이 콩쿠르와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우승 등으로 두각을 드러낸 초년기를 지나, 이제는 자신만의 위치와 색깔을 분명하게 점유하고 있다.

드뷔시와 부소니, 이자이와 프랑크로 구성된 이번 리사이틀은 클라라 주미 강의 강점인 예리함과 균형감을 십분 드러내는 무대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단 두 대의 악기뿐이었지만 2천 석이 넘는 콘서트홀을 채우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함께 호흡을 맞춘 피아니스트 알레시오 백스는 시종 안정적인 연주로 바이올린이 마음껏 유영(遊泳)할 수 있게끔 도왔다.

스페인풍의 색채가 지배적인 드뷔시 소나타 G단조에서 클라라 주미 강은 서정과 에너지와 유머를 오가며 다채로운 음악적 표정을 보여주었다. 부소니 소나타 2번은 곡 전체가 수미쌍관을 이루는 작품으로, 1악장에서부터 천천히 쌓아 올린 감정들이 4악장에서 해소되어 평안하게 끝맺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간의 긴밀한 호흡이 돋보였다.

이자이 ‘슬픈 시’에서는 비브라토를 지저분하게 남발하지 않는 클라라 주미 강의 스타일이 더욱 빛을 발했다. 곧고 담백한 소리 안에 짙은 감정과 언어가 담겨 청자에게 진솔하게 전달됐다. 마지막 작품인 프랑크 소나타는 이날 프로그램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이지만, 클라라 주미 강은 이 작품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에 함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었다.

1부와 2부를 거치며 두 사람이 보여준 섬세한 합은 앙코르 세 곡에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글루크 ‘멜로디’와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 드뷔시 ‘아름다운 저녁’은 기교와 색채감을 고루 담아내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 속에서 전해진 것은, 클라라 주미 강의 음악적 심지였다. 파워풀하거나 격정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청중의 몰입을 끌어내는 자신만의 힘이 있다는 것, 그 사실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을 증명한 무대였다. 이정은

 

백혜선의 베토벤

진지함에 진정성이 더해진 무대

9월 14일 | 롯데콘서트홀

 

피아니스트들에게 베토벤의 음악은 넘어야 할 산처럼 크고 무거운 존재다. 그러면서도 음악가로서 자유를 얻고 싶어 하는 연주자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발을 담근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이 악보에 담은 철학적 메시지에 질문하고 또 도전해 왔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서울대 최연소 교수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백혜선에게도 베토벤은 늘 닮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음악가였다.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그녀의 베토벤 사이클은 2018년 3월 16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Ⅰ’ 공연부터 5월 25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Ⅰ’과 7월 27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Ⅱ’ 공연을 마치고 9월 14일 피아노 소나타 Ⅱ편으로 마무리되기까지 4번에 걸쳐 펼쳐졌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에서 그녀는 소나타 4번과 소나타 8번 ‘비창’, 소나타 6번과 소나타 23번 ‘열정’을 연주했다.

백혜선의 베토벤 무대는 그녀가 가장 아끼고 존경하는 음악가로 뽑아온 베토벤 작품으로 구성된 무대여서기도 했지만 크로스 오버나 마티네 콘서트가 대부분인 낮에 정통 클래식 음악으로 진행된 기획공연이었기에 음악계에서도 여러모로 관심이 많았던 무대였다. 그리고 깊은 내면의 철학을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 베토벤 음악의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이날 무대는 진지함과 진정성이 느껴진 음악회로 백혜선의 팬들과 처음 음악회에 발을 디딘 청중에게도 큰 의미를 남겼을 시간이었다.

소나타 4번에서의 풍부한 선율과 아름다운 화성의 표현, 8번에서의 내면의 고요한 정서를 가늠할만한 피아니즘은 백혜선의 탁월한 음악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소나타 6번에서의 풍부한 선율과 노련미, 23번 ‘열정’에서의 결렬하고 극적인 표현력은 베토벤 음악의 철학적 메시지를 잘 담아낸 무대였다.

앙코르 연주까지 모두 끝나고 마지막에 진행된 토크 이벤트 역시 그동안 다양한 해설 무대에서 활약해 온 그녀의 노련한 진행이 돋보여 감동과 웃음을 함께 선사했다.

백혜선의 진지한 음악과 롯데콘서트홀의 진정성 있는 기획이 돋보인 ‘백혜선의 베토벤’은 오전이나 점심때 열리는 마티네 콘서트에서는 대중적이고 듣기 쉬운 작품만 연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중성과 진정성이 공존했던 시간. 그동안 개척자의 길을 걸어온 백혜선다운 무대였다. 국지연

대물림될수록 악(惡)은 진해진다

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

10월 2~7일|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서울예술단이 2018년 첫 신작으로 선보인 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85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원작은 극작가 이희준과 작곡가 박천휘의 손을 거쳐 무대 언어로 재탄생하며 한국의 젊은 작가가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극명히 드러냈다.

1~9지구로 나눠진 철저한 계급사회가 배경인 작품의 주인공은 1지구의 꽃, 프라임 스쿨에 재학하는 다윈 영이다. 다윈은 동급생인 루미와 함께 아버지 니스 영의 친구이자 루미의 삼촌인 제이 헌터의 죽음을 파헤쳐 나간다. 30년 전 살해당한 제이의 죽음에 관한 진실에 다가설수록 다윈은 악의 기원에 마주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작품 속 시선은 악에 대해 옹호와 단죄, 그 가운데 지점에 서 있는 듯했다. 가문이 척결당할 위기에 앞서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니스 영은 자신 안에 끔찍한 괴물이 산다고 말하며 자책감에 시달린다.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다윈 역시 그를 사랑해야 한다며 괴롭게 울부짖는다.

클라이막스 넘버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는 살인을 저지른 이후 푸른 눈과 검은 눈을 가진 목격자의 환영에 시달리는 부자의 모습이 등장해 연민을 자아낸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는 죄라는 점 또한 명백하게 드러낸다. 프라임 스쿨의 시험 시간 ‘인간이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에 관해 서술하라’는 대목에서 학생들은 모두 살인을 읊조리며 다윈을 옥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으며 아이는 죽는다’는 마지막 가사 역시 대물림되는 악을 꼬집으며 일말의 도덕의식을 일깨운다.

오프닝넘버 ‘프라임 스쿨1’에서 다윈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저 하늘이 지금 얼마나 새파란지 풀냄새가 얼마나 숨 막히게 진한지 어린 새가 이 순간 어떻게 날았는지’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서 악으로 물들어가는 작품 속 사회는 기시감을 자아낸다. 이를 풀어가는 작가의 통찰력과 서울예술단의 연출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적재적소의 무대 사용과 합창 역시 눈에 띄었다. 다만 가무극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합이 맞지 않았던 가무가 아쉬웠다. 짧은 공연 기간뿐 아니라 부족한 연습 시간이 개선되어, 서울예술단만이 선보일 수 있는 칼 군무와 좀 더 오랜 공연 기간으로 관객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권하영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