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춤의 운명이라니_6 무용 작품의 탄생과 파장을 담은 인생 이야기 글 정옥희
스펙터클의 부정, 기교의 부정, 변형과 신기함의 부정, 스타 이미지의 매력과 탁월함의 부정, 영웅주의의 부정, 반영웅주의의 부정, 잡동사니 이미지의 부정, 공연자나 관객의 몰입 부정, 스타일의 부정, 과장된 몸짓의 부정, 관객을 현혹하는 공연자의 잔꾀 부정, 기발함의 부정, 감동을 주고받는 것의 부정 – 이본 라이너, ‘노 선언(No Manifesto, 1965)’ –
포스트 모던댄스의 이정표
흑백 영상에 간편한 검은 운동복 차림의 단발머리 무용수가 나타난다. 무용수는 걷다가 멈추고 팔을 돌리거나 다리를 꼬고 바닥에 앉았다가 일어나 하늘을 쳐다본다. 동작들은 쉬워 보인다. 높이 뛰어오른다거나 팽이처럼 돌거나 하는 등 테크닉이랄 게 없으며, 춤 특유의 멋 부리기나 과장된 감정표현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몸으로 익히 경험해 온 동작들과 닮았기에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동시에 예측 불가하고 복잡하다. 하나의 동작은 반복되지 않으며 그다음 동작과 연관성이 없기에 전체의 패턴을 익히거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무용수는 관객의 시선을 외면한 채 업무를 처리하듯 건조하게 동작을 수행한다. 동작의 빠르기나 에너지가 균질하고 평평하다. 그래서인지 4분 30초의 춤이 매우 길게 느껴진다.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트리오 에이(Trio A, 1968)’는 포스트 모던댄스의 상징이다. 저드슨 댄스 시어터(Judson Dance Theater)는 60년대 뉴욕에서 활동했던 실험적인 예술가들의 구심점이었고, 라이너는 그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트리오 에이’는 저드슨 댄스 시어터의 다채로운 작품 중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무용학자 샐리 베인즈나 ‘빌리지 보이스’의 무용비평가 질 존스턴 같은 지식인들이 유독 ‘트리오 에이’를 찬양했다. 짧고 추상적이면서도 집요한 실험정신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라이너의 부메랑 같은 커리어 역시 ‘트리오 에이’의 신화화에 한몫했다. 6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라이너는 70년대부터는 자전적이고도 실험적인 영화제작에 몰두하다가 최근에야 다시 무용계로 복귀했다. 요절한 예술가가 천재로 등극하고 그의 유작은 걸작으로 추앙받는 법. 라이너가 영화계로 이적한 후 베인즈는 저드슨 댄스 시어터가 기존의 모던댄스를 바꾸어놓았다는 의미에서 ‘포스트 모던댄스(Post-Modern Dance)’라 명명하고 ‘트리오 에이’를 그 이정표로 지목했다. 스니커즈를 신고 경쾌하게 뛰어오르는 라이너의 ‘트리오 에이’ 사진은 1960년대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박제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했다
1960년대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빌리지에 위치한 저드슨 메모리얼 교회는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가들의 성역이었다. 개방적인 목사였던 하워드 무디가 지역의 예술가들에게 교회 지하실을 개방하고 예술 활동을 지원해주자 무용가·극작가·음악가·영화감독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1962년 이본 라이너, 스티븐 팩스턴 등의 무용가들이 무디에게 무용공연을 위한 공간사용을 요청했다. 안나 할프린·제임스 웨어링·머스 커닝험 등 실험적인 성향의 안무가들에게 영향 받은 이들은 1960년부터 커닝험의 스튜디오에서 움직임 구성에 관한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었다. 커닝험은 동전 던지기처럼 우연적인 요소를 통해 춤의 관습에서 벗어나 가능성을 확장했던 안무가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모든 움직임과 재료를 거침없이 탐색했고, 다양한 실험들이 쌓이면서 1962년 7월에 저드슨 교회에서 첫 발표회가 열렸다. 발표회의 발단은 다소 초라했다. 당시 미국 현대무용의 성지라고 할 수 있던 92번가 YMHA가 주최하는 연례 ‘젊은 안무가전’ 공연 오디션에서 저드슨 멤버들이 죄다 탈락하자 스스로 공연을 꾸린 것이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교회 지하실에서 펼쳐진 3시간에 달하는 공연에서 무용수들은 서로의 작품에 교차로 출연하고 관객들은 바닥에 앉아 이를 목격했다. 저드슨 댄스 시어터는 이렇게 가볍게 결성되고 느슨하게 조직된 예술가들의 모임으로 출발했다.
“스티븐은 걷기를 발명했고 나는 뛰기를 발명했다.” 라이너의 우스갯소리다. 저드슨 댄스 시어터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움직임을 춤의 어휘에 끌어들였다. 이전 세대의 현대무용가들이 드라마틱한 감정을 진지하고 격정적으로 표현했다면, 이들은 예술과 일상의 구분을 없애려는 듯 단순하고 평이하게 움직였다. 대신 모든 움직임이 가능했다. 매트리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는 것도, 우산을 든 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도, 여러 명이 함께 철봉에 매달리거나 사다리에 올라가는 것도 모두 춤이 되었다. 꼭 움직임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설거지용 스펀지를 모아 샌드위치처럼 입에 넣고, 피가 튄 실험복을 입고 노래하고, 초등학교 때 선생님 이름과 자신이 살던 동네 거리 이름을 읊었다. 샐리 베인즈가 이 시대에 대한 책의 부제로 강조했듯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건 분명 사회에서 통용되는 춤의 형태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의 회상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60년대에는 한동안 사람들이 아무도 춤추지 않는 무용 공연장에 가곤 했으며, 이어서 파티가 벌어지면 모두가 춤추었다.”
공간의 힘은 컸다. 경제적 부담 없이, 아무런 간섭 없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던 지하실은 춤이 만들어지고 공연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예술가들은 보다 자주, 보다 싸게, 보다 친밀하게, 보다 협동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연도 일 년에 한두 번 커다란 공연장을 빌려 잠시 공연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창작 과정을 공유하고 공개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미완성작이 완성작만큼이나 자주 공연되었고, 뚜렷한 예술적 의도가 없어도 가볍게 실험해 볼 수 있었다. 저드슨 교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자 무모한 도전에 열광해주는 공동체였다. 시몬스 포티·스티븐 팩스턴·데보라 헤이·트리샤 브라운·데이비드 고든·루신다 차일드 등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무용가들이 춤의 장면을 바꾸어 놓았고, 미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 음악가 로버트 윌슨, 조각가 찰스 로스 등도 함께 작업했다. 실패로 담금질된 이들은 예술의 전방위에서 변화를 이끌었다.
어수선한 초연, 흐릿한 윤곽선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트리오 에이’는 출발점이 어수선하고 윤곽선도 흐릿하다. 초연과 원본을 따지는 일은 꽤 복잡하다. 1965년 라이너는 매일 연습실에서 개인적으로 행하던 연습 동작을 6개월에 걸쳐 다듬어 ‘트리오 에이’를 만들었다. 총 4분 30초 정도가 소요되는 이 작품은 1966년 1월 저드슨 교회에서 ‘마음은 근육이다, 1부: 트리오 에이(The Mind is a Muscle, Part1: Trio A)’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라이너와 데이비드 고든, 스티븐 팩스턴이 출연하여 같은 움직임을 시차를 두고 수행했다. 각자의 공간과 동선에 머물렀기에 상호 작용하는 장면은 없었고, 교회의 발코니에서 간헐적으로 나뭇조각을 떨어트리는 소리를 반주음악으로 삼았다.
그런데 ‘마음은 근육이다, 1부’는 2년 후 앤더슨 시어터에서 열린 라이너의 첫 단독공연 ‘마음은 근육이다’의 파일럿 버전이었다(그사이에 한 번 더 미완성 공연이 있었다). 총 1시간 45분에 달하는 완성 공연에는 ‘트리오 에이’ 뿐 아니라 ‘트리오 비(Trio B)’와 ‘트리오 에이1(Trio A1)’이 포함되었고, 제목은 달라도 같은 작품에서 파생된 ‘강의’도 있었다. 결국 ‘트리오 에이’는 미완성작인 ‘마음은 근육이다, 1부’의 일부분으로 1966년에 초연되었으나 전체 공연은 1968년에 완성되었고 그 시점엔 세 개 이상의 버전으로 분열되었다는 점이 원본의 기원을 흐려놓는다.
게다가 ‘트리오 에이’는 움직임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라이너는 1966년의 초연에선 보고서 형식의 에세이를 함께 발표했고, 1968년의 공연 프로그램에는 기존의 춤에서 나타나는 아이디어 고갈·자기도취·성적 과시를 비판하는 긴 성명서를 실었다. 성명서나 에세이는 퍼포먼스의 상황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결국 ‘트리오 에이’는 개념적인 의도를 실현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예술의 난해한 이론, 그리고 그 이론이 공격하는 춤의 관습들을 등에 업고 있다.
‘트리오 에이’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이 작품은 라이너의 ‘노 선언’과 동일시되었다. 노 선언은 극적인 환영·기교·감정·클라이맥스 등 기존 춤의 관습에서 벗어나 ‘무엇이 춤이 될 수 있는가’를 실험할 것을 강조했다. ‘트리오 에이’ 이전에 쓰인 글이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라이너=노 선언=트리오 에이’라는 자동연상이 완성되었다. 그녀의 짧은 활동기는 모두 이 공식으로 수렴되었다(2009년 라이너는 자신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꼬리표를 떼어내려는 듯 ‘수정된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제목과는 달리 ‘트리오 에이’는 3인무에 머물지 않고 무용수의 인원·성별·의상·순서 등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50명의 학생이 춤추기도 하고, 역순으로 공연하기도 하고, 나체로 미국 국기만 두른 무용수 여럿이 춤추기도 했다. 제목 역시 다양하다. 가능한 한 많이 피루엣과 점프를 삽입한 발레 풍의 버전과 라이너가 탭슈즈를 신고 추는 솔로 버전 모두 ‘강의’라고 불렸고, 수술 후 병원 회복실에서 공연한 버전은 ‘회복기의 춤’으로 불렸다. 춤은 무음에, 텍스트 낭독에, 그리고 ‘인 더 미드나잇 아워(In the Midnight Hour)’라는 R&B 곡에 맞춰 춤추어졌다. 또한 무대 위에서 라이너가 다른 무용수에게 동작을 가르쳐주는 리허설의 형태로도 자주 공연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춤 공연인 ‘이것은 어느 여인의 이야기인데(This is the story of a woman who…, 1973)’마저도 그리그의 피아노곡 반주에 맞춘 ‘트리오 에이’가 포함되었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제목처럼, ‘트리오 에이’는 ‘매일 변화하는 연속 프로젝트(Continuous Project-Altered Daily)’로 존재했다.
카피레프트에서 카피라이트로
‘트리오 에이’의 변주에 다른 이들도 동참했다. 라이너는 이 춤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라면 잘 훈련된 무용수이든 아마추어이든 상관없이 가르쳐줬고, 마치 자신이 대중에게 포스트 모던댄스를 전파하는 복음 전도사가 된 듯 뿌듯해했다. 또한 그녀는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추든지 개의치 않았다. 무용작품의 저작권을 주장하고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저항정신과는 모순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춤의 관습에 저항하고 민주적인 접근법을 탐색했던 라이너가 ‘춤의 민주화’를 시도했던 것은 일맥상통한다.
저작권자가 방치하다시피 하면서, 그리고 영상 기록의 존재로 인해 ‘트리오 에이’는 누구나 손대고 도전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었다. 초연의 영상 기록은 없지만 1978년에 라이너의 솔로 버전이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이 글의 도입부에 묘사된 영상이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춤추기를 그만둔 지 3년 후, 작품이 초연되고 12년 후였다. 라이너는 무릎도 제대로 펴지지 않는 기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춤은 라이너의 손에서 벗어나 진화해나갔다.
문제는 ‘트리오 에이’의 민주화가 점차 라이너의 작품 의도와 상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튜브 시대가 되자 더욱 피상적으로 춤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복제를 거듭하여 망가진 VHS 테이프처럼 원작자가 싫어하는 작품을 맞닥뜨리거나 자기 작품을 못 알아보는 상황까지 생겼다. 이런 상황은 라이너를 모순에 빠뜨렸다. 그녀는 사람들이 안무의 섬세한 측면을 살리지 못하면서 춤이 왜곡되었다고 느꼈다.
라이너는 그동안 방치했던 소유권을 주장하고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우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영상을 금지했다. 여전히 부분 영상은 돌아다니지만 말이다. ‘트리오 에이’의 워크숍도 기획되었다. ‘공인 트레이너’가 매일 3.5시간씩 총 5일간 꼼꼼하게 움직임을 가르치며, 참가자는 움직임 학습뿐 아니라 작품의 이론적·역사적 배경에 대해 읽고, 토론하고, 글을 써야 한다. 라이너는 4분짜리 춤을 완전히 익히는데 전공자는 30시간, 비전공자는 50~60시간이 걸린다고 보았다. 덧붙여 비전공자가 이 춤을 공연하려면 반드시 자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2002년에는 라이너가 다른 무용수에게 ‘트리오 에이’를 지도하는 리허설을 담은 영상기록이 이루어졌다. 리허설을 ‘트리오 에이’의 공연형식으로 활용한 것은 많았지만 보존을 목적으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이듬해 여름에는 라바노테이션으로 춤을 기록했다.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은 헝가리 무용이론가 루돌프 드 라반이 창안한 무용기보법으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라고 여겨진다. 라이너는 라바노테이션이 ‘트리오 에이’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고, 완성된 무보를 통해 정확한 복원이 가능하다고 안도했다. 라바노테이션은 읽을 수 있는 이가 한정된 복잡한 체계인 만큼, 작품에 대한 지식에도 위계가 생겼다.
체계적이고 공인된 방식을 동원하여 라이너는 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디테일을 바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트리오 에이’는 카피레프트(copyleft)에서 카피라이트(copyright)로 전환되었다. 라이너의 번복은 그녀 자신이 맞닥뜨린 딜레마를 드러낸다. 한 시절 풍미했던 반항아가 이제 거장이 된 것이다.
펫 케터슨이 공연한 ‘트리오 에이’, 뉴욕 현대미술관 © Yi-Chun Wu
거장이 된 반항아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는 ‘저드슨 댄스 시어터: 작업은 끝나지 않는다(Judson Dance Theater: The Work Is Never Done)’ 전시가 진행 중이다(2019년 2월까지). 전시와 함께 워크숍, 공연, 관객과의 대화 등이 이루어지는데, 라이너를 비롯하여 저드슨 멤버들이 직접 지휘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전시가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만 벌써 서너 번째이고 다른 기관을 합하면 훨씬 많다. 비교적 최근 역사이고 그 멤버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스포트라이트라 할 만하다.
세계적인 미술관이나 자료관, 무용단에서 전시와 오마주 공연이 이어지는 오늘날엔 종종 잊히지만, 이들은 비주류였다. 대표작인 ‘트리오 에이’ 역시 대중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드슨 교회의 지하는 관객이 공연 중 밖으로 나가려면 ‘무대’에 해당하는 영역을 가로질러야 하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오 에이’의 초연에서 많은 이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무용비평가인 클라이브 반즈는 그는 ‘트리오 에이’를 포함하여 그날 공연 전체를 “자아도취자들의 헛발질”이라 비난하면서 “완전한 재앙···정정하자, 완전한 무(無)”라고 표현했다. 다운타운의 실험적 공연에 대해선 다루지 않는 것이 뉴욕 주류 언론사의 관행이었다고 하니 이런 혹평이라도 남은 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다지 잃을 게 없는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트리오 에이’의 핵심이다. 무용사에서 라이너는 60년대에 머무르는 인물이다. 그런데 2000년에 무용계로 돌아왔다. 무려 40여 년 만의 귀환이다. 올해 83세인 초로의 라이너는 시도하고 실패하는데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최종본’이나 ‘걸작’을 내놓기보다는 ‘미완성’ 혹은 ‘지속적인 수정’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지금 내놓는 작품이 40년 전의 초기작을 뛰어넘지 못할지라도 체면 차리며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트리오 에이’을 영상이나 무보로 기록하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회고전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 역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뒤로 물러서서 작품을 전설로 남기기보다는 직접 참여하고 챙기고 관여함으로써 작품이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전시장과 자료집, 역사책 속에 들어앉았던 ‘트리오 에이’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거장으로서 점잔빼기보다는 끝까지 현역으로 남겠다는 이처럼 말이다.
이 춤의 운명이라니 (목차는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7월 백조의 호수(Swan Lake)
8월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9월 불새(The Firebird)
10월 계시(Revelations)
11월 사우스랜드(Southland)
12월 트리오 A(Trio A)
2019년 1월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One Flat Thing, Reproduced)
글 정옥희(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강의·연구·번역과 집필을 통해 춤이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사유한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무용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