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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윤이상과 서울시향, 그리고 피아니스트 김선욱
서울시향이 지난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유럽 3개국 5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새로운 대표이사를 맞이한 후, 첫 번째 유럽 투어였다. 스위스 제네바(11월 25일), 이탈리아 우디네(11월 27일), 스위스 루체른(11월 29일), 프랑스 그르노블(11월 30일)에 이어 파리 메종 드 라 라디오(12월 1일)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서울시향이 파리에서 연주한 것은 1945년 창단 이후 73년 만에 처음이다.
서울시향이 이번 유럽 순회 연주회에서 윤이상의 ‘무악’을 선곡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윤이상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고, 그의 음악은 앞으로 더욱 큰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현재 서울시향의 수석 객원 지휘자인 티에리 피셔의 지휘는 간결하고 정확했지만, 조금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악’에서 유럽 무용으로 해석되는 오케스트라 투티 뒤에 이어지는 오보에를 중심으로 한 목관과의 대조에서는 공간의 확장과 내면화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투티(총주)는 모든 악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에 윤이상의 음악 언어인 동양적 제스처가 담겨 있다. 연주가 아무리 정확해도 이 제스처를 놓치게 된다면, 성공적이라 말할 수 없다. 이는 윤이상이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지휘자에게 자주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서울시향과의 유럽 투어 동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는데, 파리에서는 ‘황제’를 선보였다. 그는 화가보다는 조각가에 가까운 방식으로 소리를 찾고 만들어나간다. 분명 고도의 집중력으로 가볍지 않은 소리를 만들어가지만, 종종 그 방식이 작곡가의 언어에 충실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그가 들려준 ‘황제’의 3악장은 매우 열정적이고 강인했다. 왜 이 협주곡이 낭만파 협주곡의 모델이 되었는지를 다시 일깨워 주는 연주였다. 특히 3악장 도입부에서 김선욱이 제시한 해석은 곡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앙코르로 들려준 슈베르트 즉흥곡 D899의 3번은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능적이었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일기에 ‘사랑을 노래하려고 하면, 사랑은 슬픔이 되었고, 슬픔을 노래하려고 하면, 슬픔은 사랑이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자신의 존재와 음악의 본질을 역설했다. 이 즉흥곡이야말로 슈베르트의 문장을 대변한다. 이날 김선욱의 슈베르트는 대리석을 재료로 한 매우 잘 다듬어진 조각품 같았다.
비르투오소 오케스트라의 면모를 보이다 서울시향은 후반부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많은 오케스트라가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이다. 메종 드 라 라디오에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음악감독 미코 프랑크)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음악감독 에마뉘엘 크리빈)가 있는데, 이 두 오케스트라도 매 시즌 ‘환상교향곡’을 연주한다.
서울시향의 앙상블은 충분히 비르투오소 오케스트라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현악과 목관의 수준도 대단히 높았고, 4악장과 5악장에서 보여준 응집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다만 1악장과 3악장에서 환상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내면의 공간을 외면화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는 지휘자의 역량, 그리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간의 매우 긴밀한 교감 없이는 어렵다. 앙코르로는 비제 ‘아를의 여인’ 중 ‘파랑돌’을 연주했는데, 아마 현존하는 오케스트라 가운데서 이 곡을 이토록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메종 드 라 라디오의 오디토리움은 음향이 풍부한 연주회장도 아니고, 잔향도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일종의 대형 스튜디오로 이곳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연주회는 프랑스 무지크를 통해서 실황으로 전송되거나 녹음 방송된다. 연주회장이지만 녹음의 비중도 크다. 서울시향은 연주 당일 오후 파리에 도착해 불과 공연 몇 시간 전에 리허설을 했다. 메종 드 라 라디오의 음향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파리 연주가 유럽 투어의 마지막이었고, 투어의 마지막 3일은 루체른과 그르노블, 파리, 이 세 도시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주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강행군이었음에도 서울시향 단원들이 보여준 집중력과 에너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
한국을 찾을 때마다, 서울과 파리의 차이를 에너지의 흐름에서부터 느낀다. 한국은 노력과 집념 덕분에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고,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부분의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한국인들이 입상했고, 또한 유럽의 여러 주요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수석에도 젊은 나이의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지명됐다. 뚜렷한 목적의식은 지난 세월 동안 많은 것을 이루게 해주었다. 큰 노력들이 뛰어난 면모를 갖추게 해주었으나 더 높고 깊고 풍부한 예술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은 효율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탓에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여지와 공간이 위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술은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이 인간적으로 되고 깊어질 때 예술도 삶의 형상을 닮아간다.
이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조금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오케스트라가 되는 것이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연주회 뒤에 악기를 내려놓고 앙코르로 합창을 한다. 이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지휘자 이반 피셔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스스로 예술가라고 느끼지 않고서는 훌륭한 예술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믿는다. 음악에 대한 뜨겁고 신선한 열정을 유지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혁명적이고 낭만적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연주할 때에 하프를 오케스트라 좌우 전면에 배치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소리 지르며 연주하게 한다. 악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창의성이 만난 예다.
또 하나는 쇠퇴해 가고 있는 유럽의 평가와 인정을 구하려고 하기보다는 한국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이나 철학에서 동양은 서양을 이해하고 포괄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너무나 단단하고 폐쇄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는 유럽인들이 동양의 열린 직관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음악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어쩌면 한국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다만 동양적 뿌리를 잃지 말아야 가능하다.
글 김동준(재불음악평론가) 사진 서울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