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학교가 배출한 한국 작곡가 1세대

박태준 1900~1986 · 현제명 1902~1960 · 김세형 1906~1999 · 안익태 1906~1965 · 박태현 1907~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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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18일 9:00 오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들
한국 작곡가 열전③

 

 

1885년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1910년까지 전국에 설립된 기독교 계열의 학교는 796개에 달했다. 이러한 계열의 학교들은 대부분 음악교육을 실시했는데 주로 찬송가로 국한된 경우가 많다. 이 학교들 중 한국 근대음악을 개척하고 선도한 음악가들을 대거 배출한 곳이 있는데, 1897년 평양에서 문을 연 숭실학교다.

그러나 숭실학교에는 음악 전공이 없었다. 개교 당시 음악은 성경, 산수, 한문, 역사 등과 필수과목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이는 1889년경부터 ‘노래부르기’라는 교과목을 시작한 배재학당, 1891년부터 비정규과목으로 음악을 가르친 이화학당, 1895년부터 음악교육을 실시한 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연동여학교에 이어 네 번째로 실시한 정식음악교육이었다. 당시 경성(서울) 외의 지역에서 실시한 첫 번째 음악교육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숭실학교는 학제가 바뀌어 이후 숭실중학, 숭실대학, 숭실전문학교의 역사를 거쳤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3월 에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도 음악교과목은 필수과목으로 운영되었다. 대학교에 준하는 교과과정에 음악이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봐도 파격적이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숭실학교는 수많은 음악가를 배출하는 창구가 될 수 있었다. 숭실만의 이러한 특징과 그 의미와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서양음악의 불모지에서 시작한 교육이었다는 것과 ②서양음악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③서양인이 직접 서양음악을 가르쳤으며 ④그들은 외국에서 온 선교사나 부인이었다는 점, ⑤교육은 찬송가 등 기독교음악으로 시작하여 점차 기악교육으로 확대되었으며 ⑥선교라는 목적을 앞에 둔 교육이었고, ⑦초반에 비전공자가 담당하던 음악교육을 점차 전공자들이 실시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특징이 살아 있던 숭실학교에서 음악과 함께 청춘을 보내고 훗날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이들의 청년기는 어떠했을까.

 

‘오빠 생각’의 박태준

악월회(樂月會)는 솔토 교수의 지도로 매주 월요일마다 작곡가의 역사와 작품을 연구하는 음악동호회였다

박태준(1900~1986)은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숭실 재학 시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을 배워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했는데, 이 곡들은 오늘날 한국 동요의 기초를 세운 작품들로 평가되고 있다.

졸업 후 그는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절 시인 이은상과 함께 ‘미풍(微風)’ ‘님과 함께’ ‘소나기’ ‘동무생각’ ‘순례자’ 등 가곡 형태의 곡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들은 진취적이었고, 가사가 되는 시의 선택도 자유로워 다양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모교인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던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밤’ ‘맴맴’ 등을 작곡했다.

이중 ‘오빠 생각’은 오늘날 박태준을 기억하기 좋은 노래로 손꼽힌다. 가사는 최순애(1914~1998)의 시로, 그녀가 11살이던 1925년에 친오빠 최영주를 그리며 지은 동시 ‘오빠 생각’을 잡지 ‘어린이’에 투고하여 입선한 작품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우리오빠 말타고 서울가시며/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1921년 숭실학교 제주전도대

8분의 6박자, 애상조의 선율이 붙은 이 시(가사)는 일제강점기 어린이의 의식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이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박태준의 작품에 이은상 외에 가사를 자주 붙이던 또 다른 이는 윤복진이었다. 그 곡이 50곡정도 되는데, 훗날 윤복진의 월북으로 인해 1945년 이후 박태준의 노래들은 가사들이 바뀌거나 금지되기도 했다.

박태준은 193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배편은 10월 18일이었는데, 그 전날인 17일에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미국으로 떠난 그는 더스커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합창 지휘를 공부했고, 한국인 최초로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귀국하여 1936년 숭실학교 교수로 취임해 짧은 시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그가 남긴 동요는 150여 편에 달하며 그 외 성악곡도 많다. 가곡의 소재 중 종교적인 것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평안’ ‘부활’을 작곡한 박태준 씨의 존재야말로 조선악단의 보배이며 빛이다. 역사가 길지 못한 조선악단에도 아름답고 부드러운 노래를 불을 줄 알고 그와 같은 작곡을 하는 이 적지 안컨만 박태준씨 같은 곱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악상을 가지고 작곡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씨는 일즉부터 조선악단에 혜성같이 빛나는 존재엇으니 이땅의 제2국민인 어린이들에게 명랑하고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으게하려고 무한이 애쓴 분이다. 동요 작곡가하면 씨의 얼골을 연상할만큼 되었으니 이 땅의 방방곡곡에서 노래 불으는 어린이들에게 천진스럽고 명랑한 동심을 길러준 은인이다.

씨의 작곡 중에서 ‘평안’은 기독교 성서에서 착상한 것으로 조용히 곱게 그리고 성서럽게 불으는 노래로 예수의 최후의 유언이라 한다. ‘부활’은 부활제 때에 활발스럽게 장엄하게 불으는 것으로 일즉이 씨가 미국 웨스트민스터음악학교 작곡과에서 연구할 때에 작곡한 것으로 미국에서 작곡발표회가 잇을 때에 열광적 절찬과 환영을 받엇다 하니 악곡으로서의 고귀한 값은 엿보고 나머지가 잇을 것이다.

씨의 음악생활의 씨는 평양숭실전문학교 재학시에 뿌려 으니 음악에 대한 타는 듯한 정렬과 앱비숀을 가지고 태평양 검은 푸른 물결을 건너 미국 터스트큐럼 칼레지에 돌아갓을 때는 이미 꽃이 피기 시작하도록 씨의 천재적 소질은 성장하엿다. 그후에 푸린스톤에서 ‘마스터 오푸 뮤직’ 학위를 얻을 때에는 그의 작곡가로서의 존재가 빛나게 되엇으니 그의 작곡이 미국 시민들의 심검을 울리고 웃기고 하엿다 한다.(동아일보 1939년 6월 5일자 원문표기)

 

음악계의 거목, 현제명

대구에서 태어난 현제명(1902~1960)은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1920년 숭실학교 대학부에 입학해 1924년 제15회 졸업생이 되었다. ‘인물로 본 숭실 100년’(숭실인물사편찬위원회, 1992)에는 당시 대학부는 음악교육에 각별히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악과는 없었지만, 학생이 원하면 거의 음악을 전공하다시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제명은 솔토부인으로 알려진 그레이스 짐머만 솔타우에게 피아노를, 료트부인에게 성악을 배울 수 있었다. 연주활동도 활발히 했다. 1921년 5월 대학부의 지육부(智育部)가 주관한 대강연회에서 독창을, 같은 해 여름방학에는 학생전도대 일원으로 영남지역 일대에서 음악전도 활동을 했다. 동계방학 때에는 남만주 일대에서 동포들에게 음악을 통한 선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2년 6월 10일에는 이천교회에서 열린 조만식 초청 강연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동아일보(6월 19일자)는 “서늘한 바람과 같이 노동에 지친 교인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고 적고 있다. 이듬해 6월 숭실 전도대원의 일원으로 봉천 등지를 다녔고, 10월에는 숭실중학동창기념음악회에서 박경호와 피아노 합주를 하기도 했다.

재학 시절부터 음악에 큰뜻을 두었던 현제명에게 기회가 온 것은 4학년 때였다. 선교사이며 테너로 활동하던 로디히버에게 인정을 받아 미국 시카고의 무디 성격학교로 유학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음악 유학에 앞서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철저한 지식과 신앙을 깊게 해야 한다는 로디히버의 의도 때문이었다. 숭실을 졸업한 현제명은 전주에 위치한 기독교 계열의 학교 신흥학교에서 잠깐동안 음악교사로 재직하다가 1926년 미국으로 떠났다.

귀국 후 그는 1929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영어교수로 있다가 김영환(피아노)의 뒤를 이어 같은 학교 음악부장으로 부임했다. 숭실학교와 마찬가지로 연희전문학교에 음악 전공은 없었지만 취미생들을 위한 기악합주단과 합창단이 있었고, 현제명은 이를 잘 지도했다. 그 결과 그의 문하에서 김성태·임동혁·김연준(작곡), 이유선·이인범(성악), 김생려(지휘), 정희석·문학준(바이올린) 등이 배출되었다. 학생들이 지닌 음악의 열정은 연희전문학교 관현악단으로 늘 표출되곤 했는데, 이들은 현제명의 주도로 1930년대 말까지 봄·가을로 음악회를 열고 지방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른바 국민을 깨우기 위한 계몽연주회였다.

 

흥사단가를 작곡한 김세형

김세형(1906~1999)은 평양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평양 숭덕고보를 다니던 중 1919년 10월 10일 학생들이 주도한 평양 2차 만세사건의 주동자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고, 1920년 숭실중학으로 편입했다.

그는 중학 과정을 다녔지만 대학부 음악전도단의 단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특히 중학과정에서도 유일하게 대학부 밴드부원으로 발탁되어 트럼펫은 물론 금·목관악기를 고루 배우고 연주했으며, 교회에서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목소리도 좋았기에 성악가로서의 재질도 돋보였다고 한다.

대학부에 입학하고 나서는 루츠 부인과 솔타우 부인으로부터 음악이론과 피아노·성악 등을 본격적으로 교육받았다. 특히 솔타우 부인과의 피아노 교습은 1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재학 중이던 1924년에는 가곡 ‘야상’을 작곡했고, 같은 해 교내 학생기독청년회가 주관한 자선음악회에 출연하기도 했다.

1927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인 1928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1932년 캘리포니아 챔먼 대학교 음악이론과에서 작곡전공으로 학사학위를, 1934년 웨스턴대학원 작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학시절이던 1930년에 안창호가 비밀리에 보내온 가사로 흥사단가 3편을 작곡했고, 1931년에 교향곡 1번을, 1932년에 연가곡 ‘The Long Way’를 발표했다. 연가곡은 국내에 ‘먼길’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 최초의 연가곡’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1933년에는 미국의 작곡가 메리 카르 무어(1873~1957)가 주최하는 음악경연대회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을 출품해 우수곡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34년에 ‘한국 최초의 교향시’라 불리는 ‘오텔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애국가의 안익태

숭실학교의 관악대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1906~1965)는 어린 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찬송가과 음악 소리에 매료되어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2살이 되던 1918년에 숭실중학에 입학했는데, 위와 같은 교내의 음악적인 분위기는 그가 음악을 공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안익태는 훗날 첼리스트 겸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지만, 그가 숭실에서 배우고 익혔던 것은 그는 바이올린과 트럼펫이었다. 그중 재능을 보인 것은 바이올린이었다. 1922년 9월 23일 숭실동창회기념식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이듬해 숭실중학동창기념음악회에서 찬송과 함께 바이올린을 선보였다. 전도대의 악사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평안남도 일대를 순회하기도 했다.

숭실학교의 마우리 교수 부부는 여름방학 때 안익태를 서울에 보내 캐나다 선교사인 그레그로부터 첼로를 배우게 하였다. 첼로에서도 재능을 보였던지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후 일본 유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했고, 이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오케스트라의 첼로주자로 활동을 하며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기도 했다. 1935년 동아일보 기사(1월 2일)에 의하면 “씨는 아직 숭실대학에 악적(樂籍)을 두었는데 이미 음악가로서 첫 출발로 숭실대학 오케스트라에서 그 이채를 보였”다고 한다. ‘악적을 두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삶에서 숭실학교에 대한 애착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를 작곡한 박태현

‘누가 누가 잠자나’와 ‘산바람 강바람’은 박태현(1907~1993)이 작곡한 동요다. 박태현은 숭실전문학교 졸업반 시절에 ‘동요일기’라는 이름으로 매일 한 곡씩 동요를 작곡했다고 하는데, 이 곡들은 이 때 지은 것들이다.

평양 출생인 박태현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박윤근과 말스베리 교수에게 음악을 배웠고. 전도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재능을 보여 1932년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기도 했다.

동문인 안익태의 영향으로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했고, 졸업 후 귀국하여 연주활동과 함께 동요작곡에도 힘썼다. 혼성합창단인 백조합창단을 조직했고, 1966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교향악단으로 기억되는 여성스트링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박태현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곡은 ‘태극기’일 것이다. 이 곡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그는 이 곡 외에 삼일절 노래, 한글날 노래, 애국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이완용 저격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7년간의 옥고 끝에 출감 후 사망한 박태은이 그의 형이다.

송현민(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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