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

젊은 예술가의 자기 이야기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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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18일 9:00 오전

뮤지컬, 노래의 인문학_2
인문학의 질문을 담은 고전

 

©Cygnet Theatre

 

불안이라는 시대정신

‘좀비사회학’이라는 책이 있다. 일본의 평론가 후지타 나오야가 쓴 책인데 재미있는 제목만큼 흥미로운 통찰은 이것이다. 좀비야말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라는 진단. 한마디로 말해 현대인은 모두 좀비라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 모두를 좀비로 만들어버린 기원을 찾는 작가의 해석이 흥미롭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는’ 욕망의 무제한적 자유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좀비를 키우는 젖줄이라는 거다. 경쟁을 통해 이기는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자본주의의 정의(正義)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단 여기서 도태되는 이유는 각자의 무능함에 있으니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들이 져야 한다. 낙오하는 순간 그는 사회적 좀비가 될 것이다. 좀비는 낙오의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의 이름이다.

지금 이 시대의 불안은 자칫하면 나도 사회적 좀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보장한 안정의 문 바깥으로 쫓겨나면 어쩌나. 이방인, 나그네, 약하고 가난한 자로 어느덧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 곁에 다가가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동감마저도 거둬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공포는 우울증을 비롯한 병리적 현상으로 변주되고, 이런 증세를 해결하기 위한 치료의 담론은 도처에 넘쳐난다. 하지만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이런 불안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없음은 누구나 안다. 무엇보다 불안을 병으로 보는 시선 자체가 불편하다. 정말로 불안이 병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환자라는 소리인데, 이런 진단이 과연 누구에게서 나와서 누구를 배불리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 불안을 과연 우리는 넘어설 수 있을까?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불안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에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놀라운 통찰이다. 이 통찰은 불안을 마주해야 하는 진짜 이유로 이어진다. 인간은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살아가는데,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선택하지 못한 또 다른 가능성은 ‘만약’의 불안으로 모습을 바꾸는 법이다. 불안은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이 가져오는 역설적인 열매인 셈이다. 그렇다면 더 깊이 불안에 빠질수록 인간은 더 위대해진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은 결국 이런 뜻일 게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불안을 마주할 수 있고,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이는 바로 이런 사람일 거라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뮤지컬이 있다. ‘렌트’이다.

 

불온한 낭만에 기대어

공연의 맥락으로 볼 때 ‘렌트’는 불안보다 오히려 패기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지금은 록 뮤지컬의 고전이지만 1996년에 초연됐을 때만 해도 ‘렌트’는 여러모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젊은 작가가 중산층의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에 웬만한 뮤지컬의 십 분의 일도 안되는 제작비로 만든 작품을 뮤지컬 시장에 떡 하니 내놓은 거다. 카메론 매킨토시의 메가 뮤지컬이 주류를 이룰 때 무명의 젊은 작가 조너선 라슨(Jonathan Larson)이 던진 출사표는 도발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성공의 코드를 완전히 버린 무모한 도전은 유례없는 흥행을 기록하며 보기 좋게 성공을 거뒀다. ‘렌트’는, 뮤지컬의 실험을 선도했던 ‘헤어’의 전통을 이어받고 문학적 성취를 이룬 ‘넥스트투노멀’을 준비하는, 작품성과 실험성을 융합시킨 록 뮤지컬의 기준점으로 자리 잡았다. 말 그대로 청년 정신의 승리이다.

‘렌트’의 도발은 단지 뮤지컬 시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낙오자의 모습을 한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당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같았다. 이 작품이 창작될 당시 미국의 경제는 성장일변도를 걷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은 생산이 급등한 시기여서 실업률 역시 낮았으니, 경제적인 기준으로만 보자면 살기 힘든 환경은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는 신진보주의를 추구했던 미국의 실리주의는 가시적인 경제성장만큼이나 커다란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가난하거나 사회적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라는 수식어는 무색해졌다. 무엇보다 모든 일의 가치와 의미를 경제적인 성과로 판단하는 획일성은 실리주의가 휘두른 가장 큰 폭력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살기에 척박하고 존재하기에 모욕적인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이런 시대에 ‘렌트’는 마약과 에이즈, 동성애와 죽음의 냄새로 범벅이 된 뉴욕 뒷골목의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예술가라고는 하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아무런 결과물도 내놓지 못하는 이들은 사회의 잉여이며 무능한 쓰레기일 뿐이다. 이들의 외침은 하나다. ‘우리에겐 오늘뿐, 내일은 없다!’ 완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을 할 것이고,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 사랑할 것을 외치는 이들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이 작품의 주된 정서는 1960년대 미국의 히피문화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반전과 평화를 외쳤던 1960년대 청년들과 예술과 사랑을 노래하는 90년대 청년들의 목소리는 서로 겹친다. 잉여라는 모독 앞에서 한 세대 전의 잉여를 소환함으로써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이런 ‘쓸모없음’이야말로 구원의 실천이었음을 이 작품이 환기시키는 거다. 모든 일탈과 자유를 노래하는 넘버 ‘라비보엠’은 1960년대 청년문화를 향한 오마주이다.

‘렌트’의 불온함에서 저항보다 낭만을 보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의 도발은 지금껏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덧 잃어버린 것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1990년대의 청년들에게 이 작품은 자기네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리얼리티의 뮤지컬이겠지만, 기성세대가 된 60년대의 청춘들에게도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청춘의 회고록으로 낯설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막대한 흥행을 이끈 이 작품의 배경에는 젊은 시절에 대한 미국인의 낭만이 깔려있다. 미국적인 뮤지컬 ‘렌트’의 성공은 미국적인 맥락에서 잘 이해될 수 있다.

 

불안을 이야기하다

뮤지컬 ‘렌트’ 브로드웨이 홍보 포스터

하지만 이 미국적인 작품에 전 세계 관객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낭만일 수는 없다. 만일 조너선 라슨이 첫 공연 전날 갑자기 요절하지 않았다면 이 뮤지컬은 그저 주류 뮤지컬에 돌을 던지는 신선함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의 존재와 작가의 부재가 겹친 순간 이 작품은 조너선 라슨의 삶이 되어버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대사와 노래는 작가의 고백이요 일기로 받아들여졌던 거다. 그 고백의 내용은 패기도 아니고 저항도 아닌, 불안함이다. 이 작품에는 그가 가진 젊음의 불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완성하지 못한 작품, 불확실한 미래, 떠나버린 사랑,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극 중 인물들이 아닌 조너선 라슨 자신의 불안인 셈이다. 자기가 쓰고 있는 이 작품에 과연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기대 섞인 불안에 초조한 심정이 생생하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이 작품의 원작인 오페라 ‘라보엠’에서 푸치니는 ‘가난했지만 아름다웠지’의 낭만으로 젊음을 회상하지만, 조너선 라슨은 오로지 사실적인 시선으로 젊음을 재현한다. 그는 젊음의 패기라는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그 밑에 깔린 분노와 불안을 다시(re) 드러낸다(presentation). 젊음은 패기로 가득 찬 희망이라고? 천만에. 젊음은 불안으로 흔들리는 가련함이라오! ‘렌트’에 등장하는 청춘들의 모양새는 마약과 에이즈 등등 다소 과장되어 보이지만, 이런 과잉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라는 ‘사실’이다.

‘렌트’의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안다. 나는 과연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런 능력이 나에게 있을까? 나에게 기회가 올 수 있을까? 미래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질문을 거듭하며 확신과 불안 사이를 진자처럼 오간다. 그러다가 확신이 들 때는 비장한 사명감을 다지는 거다. ‘뭔가 창조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답답한 틀을 깨고 자유롭게 미친 것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배고픔을 이기려는 노력과 사랑하고 집중하는 모든 노력을 위해, 우리는 예술로 표현하고 대화를 창조한다!’ 앞서 언급했던 넘버 ‘라비보엠’의 가사에는 혈기 왕성한 젊은 예술가의 다짐이 호기롭게 담겨 있다.

하지만 금세 불안함이 밀려온다. 이런 비장함이 아직 성공하지 못한 자의 허세이고 세상에 대한 피상적인 정의감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는 거다. 이때 질문은 더욱 예리해진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법, 이 생각을 예술로 승화시킬 능력이 나에게 있나? 작가는 적나라할 만큼 정직하게 대답한다. 아니요. 나만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로저는 ‘뮤제타의 왈츠’를 몇 줄 연주할 뿐이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마크의 작품은 홈비디오 수준의 영상일 뿐이다. 완성된 형태로 선보이는 작품은 모린의 퍼포먼스밖에 없는데, 몇 마디의 욕설과 젖소 울음소리만 남는 그녀의 결과물은 행위예술가의 작품으로는 많이 졸렬하다. 겨우 이런 걸 하면서 그들은 술집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며 보헤미안의 삶을 예찬하고 있는 거다. 실패가 무서워서 현실을 외면하는 거라고 마크에게 퍼붓는 로저의 대사는, 어쩌면 진짜 예술가가 아니라 허세와 자의식으로 가득 찬 깡통일지도 모른다는, 자기를 향한 칼날이다. 궁금해진다. 그의 정직함은 불안일까 비관일까.

 

견유주의자를 위하여

조너선 라슨은 ‘렌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기 자신을 더욱 솔직하게 드러낸다. 자기만의 음악을 완성한 로저가 노래를 불러줄 때 죽어가던 미미가 벌떡 살아나는 마지막은 극의 논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차마 쓰지 못할 결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서도 거리낌이 없다. 자기가 완성한 작품이 죽어가는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자리에서 일어서게 만들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일지라도 확신하고 싶었을 거다. ‘렌트’의 가장 빛나는 지점은 가장 어이없어 보이는 바로 이 부분이다. 이 결론이야말로 작가가 진짜 하고 싶어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숙하고 부끄럽다 해도 그는 진심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창피해서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말까지도 과감하게 털어놓는 작가의 말 걸기는 푸코가 말한 파레시아를 떠오르게 한다. 파레시아란 진솔하고 과감하게 말을 고르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자기를 말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솔직하게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말은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만 살면서 진실을 말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다른 사람에게는 고사하고 나 자신에게조차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건네는 데 우리는 영 익숙하지가 않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실천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의 삶을 올바르고 단단하게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솔직하게 말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렌트’의 마지막 장면은 작가가 행한 파레시아의 실천이요 자기를 향한 배려임이 맞다.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곧 자유로운 인간이다. 이 사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니,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이런 사람이다. 내가 살아가는 데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 사회의 관습이 말하는 삶의 방식이 나의 것이 될 이유는 없는 거다. 삶의 방식이란 선택하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들은 자기의 삶으로 증명해낸다. 알렉산더가 자기의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직접 찾아왔을 때 벌거벗은 몸으로 통 안에 드러누운 디오게네스가 요구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비켜주시겠소? 내 햇볕을 다 가렸잖소.” 그는 왕의 스승보다 한 줌 햇볕을 선택했다. 주류의 삶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의 상식을 도발하는 견유주의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지혜는, 아무것도 없는 삶이라 해도 그것이 자기의 선택일 때 그것은 더이상 불안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주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이 있고, 그 다른 삶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렌트’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 시대의 견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불안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삶을 향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그들에게서 다른 삶의 가능성이 보인다. 퓰리처상은 이런 면모에 대한 인정일 터.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이 작품의 젊은이는 모두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이 쓸모없는 청년들이 모여서 쓸모없는 일인 예술을 운운한다. 그들의 사랑은 끝이 예정되어 있고 사랑의 언어는 노골적이고 상스럽다. 그런데 이런 쓸모없음이,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 쓸모없음이야말로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직면할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성공의 논리에서 낙오해도, 자본의 문밖으로 쫓겨나도, 그 바깥에 열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예술가의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불안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불안을 이야기할 수 있다. 조너선 라슨은 이걸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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