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 어웨이크닝

낙관하지 않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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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4월 15일 9:00 오전

뮤지컬, 노래의 인문학

(*테리 이글턴의 책 제목을 인용했다.)

질문의 위험함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인생은 그 자체로 n개의 답이라는 말인즉, 뒤집으면 인생에는 무수하게 답이 많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현실을 살다 보면 금세 깨닫게 된다. 인생에는 정답이 아니라 아예 답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답은 언제나 미궁이다. 사회문제도 인간관계도 답을 모르겠는 일들로 첩첩산중 아니던가. 최소한의 답이라도 찾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질문을 던지기. 질문이 명확할 때 답을 찾을 확률은 높아지고, 설사 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세상과 인생에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질문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향해 질문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네’라고 대답할 때 ‘네?’라고 되묻기만 해도 긴장은 시작되지 않던가. 질문이란 상대를 향해 몸을 돌려 마주 서는 적극적인 말 걸기이다. 대화의 어원이 논쟁이었음을 기억하자면, 질문이야말로 대화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화술인 셈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볼 때 자기 홀로 돌아서서 이 방향이 맞는지를 물으며 대결을 청하는 사람은 신발 안에 들어간 작은 돌처럼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질문하는 사람의 운명을 잘 보여준다. 그가 추구하는 진리는 간단하다. 모든 인생의 목표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 좋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전통도 권위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알 때 스스로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는바, 살아감이 좋을 때(good) 그 삶은 선해지는(good) 법이다.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방법은 질문이었다. 자신의 앎을 확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앎을 질문으로 되돌림으로써 그들이 무지의 늪에 빠져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만든 것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몰랐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정한 앎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으니, 이 걸음을 내딛는 사람에게 선한 삶은 마땅히 따라오는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이런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전통을 향해 질문하고 권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누가 그들에게 질문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들의 질문은 저속하고 무례하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받고 말았다. 되는대로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촉구한 사람이 맞이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이미 완료된 사건일까. 질문하는 사람의 운명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닐까.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로드웨이 초연 무대 ©Monique Carboni

눈 뜨는 자들이 마주하는 현실

이 작품의 원작은 독일의 희곡작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눈 뜨는 봄’으로, 1891년에 희곡이 완성됐지만 1906년에야 공연됐을 만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청소년의 성을 주제 삼아 임신·자위·동성애·자살 등 사회적 금기를 정면으로 다루었는데, 통제와 규율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교육전통을 가진 당시 독일 사회에서 논란은 더 커졌더랬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 당시 독일의 학생들은 억압적인 학교에서 공부에 대한 압박에 짓눌려 있었다. 학생들의 자살이 유행처럼 이어져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으니 학교와 사회가 이들에게 어떤 굴레로 다가왔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사회적 반골이었던 베데킨트는 성을 무기 삼아 이러한 제도의 위선과 사회의 억압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아이의 영혼과 어른의 몸이 하나로 섞여있는 이들에게 사회는 울타리가 아니라 감옥임을, 이들의 욕망은 거부되어야 할 죄악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역동임을, 전통과 권위는 이들을 죽이는 억압임을 베데킨트의 작품은 직설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거다. 뮤지컬은 원작의 파격을 록의 형식으로 온전히 받아 안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지금 여기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성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가득 찬 10대들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지만 몽정을 경험하면서 자기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당황스러워하는 소년 모리츠는 친구 멜키어가 그려준 비밀스러운 그림을 탐독하는 평범한 소년이다. 벤들라 역시 마찬가지다. 치마를 더 짧게 자르고 싶지만 아이는 황새가 물어다 주는 거라고 말하는 보수적인 엄마가 허락해줄 리 없다. 친구들과 모여서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구인지 수다 떨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만끽할 뿐이다. 피아노 선생님에게 이성의 육감을 느끼는 소년과 세상의 모든 질서가 의심스러운 소년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는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몸의 변화가 아직 욕망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러나 감각의 충만함으로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깨어나는 몸의 기쁨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왜 밤에 이상한 꿈을 꾸는 것인지, 그 꿈을 꾸었을 때 왜 기분은 이렇게 묘한 것인지, 아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하지만 이들의 질문은 답변을 얻지 못한 채 봉쇄당하고 만다. 자기 몸에 대한 최소한의 앎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질문한 대가는 잔혹하다. 소심한 모리츠는 낙제생으로 낙인찍혀 학교와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순진한 벤들라는 엄마가 가둔 무지의 틀에 갇혀 낙태를 당하며, 일세와 마르타는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오히려 침묵과 추방을 강요당한다.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자기를 발견한 순간 이들은 사회가 가하는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어두운 작품을 청소년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청소년 뮤지컬은 주인공이나 관객층이 청소년인, 맑고 밝은 작품을 지칭하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회의 질서와 도덕의 체계를 향해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적극적인 논쟁의 태도, 이것이야말로 청소년 뮤지컬의 마땅한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새삼 일깨워준다. 꿈과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어둠으로 점철된 이야기에서 청소년들의 삶은 현실의 목소리를 얻기 시작한다.

 

질문하는 자에게 주어진 선택

사실 청소년에 대한 터부는 어디에서나 있어왔다. 미숙한 존재라는 선입관을 벗지 못한 이들에게 사회가 허락한 권리는, 복종하는 것 외에는, 없다. 하지만 선명한 형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 그들의 정신은 몸이 커나가듯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가치관은 혼돈을 일으키고 호기심은 불온하게 일어나며 세상을 향한 질문은 많아진다. 물론 사회는 이런 존재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무런 실용적 능력도 경험적 지식도 없는 주제에 사회의 가치에 거부감을 표시하고 자기를 주장하다니. 사회적으로는 무능한데 사회의 가치관에 온전히 포섭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청소년은 철학자나 예술가와 그 범주를 같이 한다. 분명 무용지물인데 세상의 유용함에 별로 기죽지 않는 존재들은 단순한 약자가 아닌 위험한 일탈자들인 거다.

이 작품의 주인공 멜키어는 약자이기보다는 일탈자에 가깝다. 멜키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는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는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하고 삼각함수 역시 꿰뚫고 있어서 지식을 습득하는 데서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학생으로 가장 앞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멜키어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학교에서 전수하는 지식이 아니다. ‘책에 쓰인 지식은 모두 눈먼 사람들이 적어 놓은 틀일 뿐, 그것이 과연 진리일까? 그 틀에 갇힌 사람들은 나의 호기심을 다 틀린 것이라 말하지만 난 상관 안 해, 내 몸으로 느낄 거야! 질문을 던지는 순간 물어뜯기고 버려지겠지만 그래도 난 모든 것을 의심하며 스스로 알아갈 거야. 날 지켜봐!’ 멜키어의 노래에는 그가 대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인 셈이다. 윤리적 소피스트답게 멜키어는 모든 권위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고전을 향해서. 고전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다른 관점을 용인하지 않지만, 해석과 비평이 없는 책 읽기는 강요되는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두 번째, 종교를 향해서. 자연스런 본능을 부끄러운 수치심으로 여기는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거짓된 교육일 뿐이다. 세 번째, 도덕적 행위를 향해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금 자족적인 자선활동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런데 멜키어는 그저 질문하는 자리에 멈춰 서지 않는다. 그의 도발은 자기가 질문한 자리에서 행동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 고전을 읽을 때 전혀 다른 관점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종교의 위선을 깨달았을 때 교회가 나가기를 거부하며, 몸의 욕망이 살아날 때 감각에 자기를 내맡기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멜키어는 위험한 존재이다. 위험한 존재를 다루는 사회의 방식은 폭력이다. 맑고 밝은 미래의 새싹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위험한 폭발물이기에, 그들은 북돋워 주는 격려가 아니라 꾹꾹 누르는 짓밟힘을 먼저 경험하게 되는 거다. 철학자다운 정신과 예술가다운 실천에 물들기 전에 뇌관을 제거하기. 멜키어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소년원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멜키어가 겪는 진짜 잔혹함은 따로 있다. 자기 주변에 있던 또 다른 질문하는 자들, 모리츠와 벤들라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와 다름없는 존재들의 죽음 앞에 섰을 때 질문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나의 신념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아닐까. 나는 계속 질문하고 행동하며 살 수 있을까. 세상을 향했던 질문은 어느새 자신을 향한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그들의 죽음에 함께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삶에서의 싸움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담담하게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처럼 그의 제자들도 자기에게 주어진 잔을 마셔야 한다.

 

선택에서 피어나는, 희망

뮤지컬과 원작의 차이가 확연해지는 부분은 바로 이 마지막 결론이다. 원작에서는 모리츠의 영혼이 멜키어를 데려가려고 할 때 가면을 쓴 신사가 나타나 그를 다시 삶으로 이끌어낸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그런 결론을 내지 않는다. 죽은 모리츠와 벤들라 옆에 함께 선 멜키어의 노래는 의미심장하다. ‘나 이제 걸어가, 그들과 함께.’ 이 가사는 무슨 의미일까? 뮤지컬은 원작의 명확한 결론을 유보한 채 해석을 열어두지만, 언뜻 원작보다 더 비관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멜키어는 삶을 포기해버린 걸까? 인생의 ‘봄’에 ‘눈을 뜨는’ 10대들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이 세상에 희망의 자리는 아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관과 절망 속에서 어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Keegan Theatre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역시 소크라테스식의 질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이 진짜 희망인지 먼저 되물어야 하는 것이다. 희망이 미래에 이루어지는 성취라면? 만약 그렇다면 더 나은 미래를 경험하지 못하고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게 돼버린다. 예상되는 미래가 오지 않았을 때 현재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래에 저당 잡힌 시간으로 전락해버린다. 희망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라면? 만약 그렇다면 희망은 개인의 기질에 따라 좌우되는 개별적인 가치로 축소되고 만다. 비관적인 사람은 애초부터 아예 희망을 가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긍정이라는 말 자체가 자의적이다. 긍정의 태도란 모든 일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텐데, 이러다 보면 직시해야 할 진실마저 자기 기질에 맞게 왜곡할 우려가 있다. 희망이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겐 성공의 기억이 거의 없는 게 된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더 많이 배우고 제도를 정비하고 사람을 바꿔도 현실의 변화는 오뚜기의 걸음만큼이나 더디다. 이런 더딤은 희망보다는 비관의 자양분이 되기 쉽다.

자명해졌다. 우리가 생각한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테리 이글턴이 희망의 본질은 ‘없는 것’(nothing)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게다. 정말 희망은 말 그대로 희박한(希) 바람(望)인 걸까. 그런데 통찰은 이 불모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희망을 말했던 곳에 희망이 없다면 희망을 말할 수 없는 곳이야말로 희망의 자리일 수 있다는 역설 말이다. 테리 이글턴은 인간에게 희망은 없어질 수 있어도 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가 바로 희망이 자라나는 유일한 자리이니, 희망은 비극 위에서만 피어나는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다.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쉬지 않는 비관이 우리를 구원하리니.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결말이, 설사 멜키어가 모리츠 벤들라와 운명을 함께 한다 하더라도, 결코 절망이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다. 원작이 던진 질문이 뮤지컬에서 더 깊어졌다. 그래서 멋지다.

 

글 정수연(뮤지컬 평론가)

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했다. 공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며 마음을 키워왔으며, 앞으로도 같은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더 뮤지컬’ 등 여러 매체에 공연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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