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시 파리, 전능한 신의 시대
때는 1482년,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
우리는 무명의 예술가 제각각의 작품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훗날의 당신에게 대성당들의 시대가 찾아 왔어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
하늘 끝에 닿고 싶은 인간은 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
돌 위엔 돌들이 쌓이고 하루, 또 백년이 흐르고
사랑으로 세운 탑들은 더 높아져만 가는데
시인들도 노래했지,
수많은 사랑의 노래를 인류에게 더 나은 날을,
약속하는 노래를 대성당들의 시대가 찾아 왔어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
하늘 끝에 닿고 싶은 인간은
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
대성당들의 시대가 무너지네
성문 앞을 메운 이교도들의 무리
그들을 성 안으로 들게 하라
이 세상의 끝은 이미 예정되어 있지
그건 이천년이라고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중 ‘대성당들의 시대(Le Temps Des Cathedrales)’
파리의 거리를 배회하는 음유시인 그랭구아르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서막을 열며 부르는 곡, ‘대성당들의 시대’다. 15세기 프랑스는 백년전쟁과 전염병 페스트를 거치면서 흉흉해진 민심을 축제와 마녀사냥으로 메우며 성당의 권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 시기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이방인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바라보는 꼽추 콰지모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썼다.
1831년 출간된 위고의 소설을 바탕으로 1998년 초연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집시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느끼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주교 프롤로, 근위대장 페뷔스 등 각기 다른 인간상을 통해 당대 파리의 사회적 혼란을 그린다. 프랑스 뮤지컬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은유적으로 표현된 무대에 노래 연기를 하는 배우와 전문 댄서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오페라에 가까운 ‘송스루(Song-through)’ 형식의 음악과 진중하고 시적인 매력의 가사가 특징이다. 소설을 쓰기 전, 노트르담 대성당을 둘러보던 빅토르 위고는 성벽에 새겨진 ‘ANArKH(아나키아)’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리스어로 ‘숙명’을 뜻하는 ‘아나키아’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문을 여는 ‘대성당들의 시대’에서는 종교가 지배하는 대성당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노래하는데, 동시에 이 시대가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변화를 암시한다. 2막을 여는 노래 ‘피렌체(Florence)’에서도 인쇄술의 발전으로 작은 것(책)이 큰 것(성당·건축)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변화를 이야기한다. 즉, 뮤지컬에서 ‘숙명’이란 거대한 시대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얼마 전 노트르담 대성당이 실화로 인한 불길에 휩싸였다.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자 파리라는 도시가 빚어낸 최고의 걸작이었던 이곳은 존재 자체로 수많은 문화·예술에 영감을 주었다. 전 세계가 노트르담 성당 화재를 안타까워하며 추모의 뜻을 표한 이유다. ‘대성당들의 시대가 무너지네’라는 그랭구아르의 마지막 노랫말이 일부 현실화한 것을 바라보며, 오늘날 ‘숙명’이란 이름의 또 다른 ‘변화’가 덮쳐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사색에 잠긴다.
글 권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