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식 탄생 100주년, 교향악단과 후학의 텃밭을 일군 거장

한국의 교향악단과 교육현장에 임원식(1919.6.24~2002.8.26)이 남긴 정신과 뜻을 KBS교향악단이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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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6월 10일 9:00 오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들  한국 작곡가 열전_5

임원식 탄생 100주년

7월 1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5번 ‘운명’ (지휘 김대진·장윤성)

3·1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그 해 6월 24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임원식은 5세 때 개신교 전도사였던 부모를 따라 만주 봉천으로 이주했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덕분에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봉천에서 얼마 멀지 않은 하얼빈으로 떠났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하얼빈과 도쿄에서

러시아 혁명으로 고국을 떠난 백계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던 하얼빈은 ‘동양의 작은 파리’로 불릴 만큼 유럽의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교향악단·오페라단·발레단도 그 문화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가 입학했던 하얼빈 음악원도 러시아식 학교나 다름없었으며 유럽문화를 가르쳤다. 집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학비를 충당했다. 하얼빈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도쿄음악학교 본과에 입학했다. 도쿄는 훗날 조선의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김원복, 정훈모, 김성태 등의 선배들과 전봉초, 윤기선 동년배들이 먼저 와 유학 중이었다. 임원식은 작곡과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가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았던 것은 아르바이트로 영화음악과 뮤지컬 편곡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자 그에게도 징용장이 날아들었다. 그는 도쿄를 빠져나와 하얼빈으로 향해 징용을 피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지휘자

하얼빈에는 하얼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하얼빈 방송교향악단이 있었다. 하얼빈 방송국에 편곡자로 들어간 그는 관현악 편곡을 담당했다. 녹음방송을 위해 하얼빈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하얼빈 필의 상임지휘자로 있던 아사히나 다카시로부터 지휘공부를 배우며 기본기를 다졌다. 방송 관련 일을 맡아 한 지 1년이 되던 그때 즈음,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아사히나는 적성국가의 지휘자로 분류되어 더 이상 지휘봉을 잡을 수 없게 됐다. 그의 지휘봉은 임원식으로 갔다. 임원식은 아사히나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귀국 절차를 밟을 수 있게 했다. 이 일화는 훗날 일본경제신문에 게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임원식은 1945년 11월, 하얼빈 필의 지휘대에 서게 된다. 며칠 밤 새워 지은 ‘자유조선’ 행진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 ‘운명’을 올렸다. 협연자는 당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소문났던 14세의 백고산. 그는 훗날 북한에서 가장 존경받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1946년, 임원식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는 현제명을 중심으로 한 고려교향악단이 창단되어 출범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지휘자가 없던 시절. 떠밀려 지휘봉을 잡던 이들과 달리 스물 네 살의 임원식은 혜성처럼 등장한 지휘자였다. 고려교향악단과 처음으로 만난 임원식은 암보로 기선 제압을 했다. 딱히 즐길만한 대중문화가 없던 시절이어서 고려교향악단의 공연은 매회 많은 인기를 누렸다. 교향악단과 서양음악이 신기해 찾아오는 이들은 물론 여학생들에게 젊은 지휘자 임원식은 인기 스타였따. 귀국과 동시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때 맺은 이화와의 인연은 훗날 서울예고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45년 하얼빈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데뷔하던 모습

꿈을 안고 미국으로

1948년 1월, 국제오페라사가 서울시공관에서 선보인 오페라 ‘춘희’(‘라 트라비아타’)에서 임원식은 고려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 공연은 오늘날 한국오페라사의 머리말에 놓이는 ‘한국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된다. 그 해에 임원식은 미군정청의 주선으로 줄리아드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순남과 윤기선도 함께 선발됐다. 하지만 김순남은 거절하여 임원식과 윤기선만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하와이 호놀룰루 심포니를 지휘할 기회도 얻었다. 공연을 본 어떤 미국인과의 인연이 쇤베르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그의 소개로 찾아간 산타 바바라 서부음악아카데미에서 어느 노인과 함께 우연히 탁구를 쳤는데 그가 바로 쇤베르크였던 것.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하던 임원식은 1949년 탱글우드페스티벌 여름학교에 참가했다. 쿠세비츠키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산책을 하던 쿠세비츠키에게 임원식이 러시아식 인사를 건넸던 것. 하얼빈에서 배운 것이었다. 러시아의 거장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고, 이를 계기로 임원식은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다. 큰 모션을 그리지 않는 그의 지휘법도 팔과 몸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큰 동작을 취하지 못하도록 가르친 쿠세비츠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미 중인 임원식 씨는 전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버-크샤」 음악제(현 탱글우드페스티벌)에 「보스톤·심포니」의 지휘자로 참석하고 있다고 하는데 (…) 「보스톤심포니」를 지휘하는 최초의 동양인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한다.(경향신문 1949.7.24)’

 

1947년 덕수궁 음악회

전쟁 속에서도 이어간 오케스트라

줄리아드에서 2년을 보낸 후, 1949년 가을에 잠시 귀국한 그에게 음악계가 많은 일들을 맡겼다. 서울관현악단의 지휘도 본격적으로 맡게 되었다. ‘음악적 논리자이며 신고전주의 음악의 창시자인 「뽀라암스」의 제4교향곡을 임원식씨 지휘로 듣게 됨은 뜻 깊은 일이다. 전번 「베에토오벤」 제7번에 지지 않는 탁월한 처리법으로 우리들 유수고담(幽遂枯淡)의 경지에 이끌어서 인생의 만가(輓歌)를 들리어 주었고 최종 영장(榮章)을 알 수 없는 불경을 듣는 무허경에서 체념에 가까운 우수를 지녀주었다.(경향신문 1950.3.21)’ 그는 ‘「레퍼토리」 미비문제로 동면상태’에 있는 교향악단과 음악계에 ‘새로운 반성을 요구’(경향신문 1950.3.21.)하며 새로운 작품을 수혈하곤 했다. 미국행을 잠시 미루고 지휘자로 활동하던 그는 전날까지 서울교향악단을 지휘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을 맞았다. 1950년 임원식은 육군의 지원으로 육군교향악단을 조직했다. 그가 고려교향악단을 이끌던 시절부터 발전적인 경쟁을 해오던 김생려는 해군정훈음악대를 맡았다. ‘육향’ ‘육군심포니’ 등으로 불린 육군교향악단은 해군정훈음악대과 함께 한국 교향악의 역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열정과 달리 물자와 정신적 여유조차 부족한 전시 하에서의 연주는 늘 고된 것이었다. 오화섭은 1955년 5월 제17회 육군교향악단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김생려 씨를 내성적인 해석자라 하고 임원식 씨를 그와는 다른 타이프의 지휘자라고 한다. (…) 이번에 연주된 곡목 중 “운명”은 지휘자가 지니고 있던 전일의 정열을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한 느낌을 준다. (…) 그동안 좋은 지휘자가 없어 앙쌍불에 익숙지 못한 연주는 “청산 속에 무친 옥”에나 비교할 수 있을지! 이 옥들은 닦기만 한다면 광채가 날 것이기에. (…) 두 개의 교향악단이 각기 좋은 지휘자를 가짐으로써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비약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 임원식씨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동아일보 1955.5.7)’ 훗날 육군교향악단은 KBS교향악단으로, 해군정훈음악대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이 된다.

KBS교향악단의 기초를 다지다

1956년, 임원식은 육군교향악단이 흡수통합된 KBS교향악단의 초대 지휘자를 맡았다. 음악평론가 이상만은 KBS교향악단의 창단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KBS교향악단은 1956년 당시 KBS의 음악계장이던 김창구와 그의 서울대 음대 동문이었던 이성재·이남수·최영우의 발의로 시작됐다. 당시 육군교향악단 단원이던 이재선·양재표·봉두완 등이 앙상블을 만들어 KBS에 출연하곤 했는데, 이를 모체로 관현악단에서 교향악단으로 발전시키고, 이화여대 교수인 임원식을 초대 지휘자로 영입하며 탄생한 것이다. 당시 KBS 방송국은 정부 직속으로 공보실 산하에 있었다. 음악 애호가였던 공보실장 오재경이 없었던들 이 악단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는 가난해서 단원의 봉급은 쥐꼬리만 했다. 그런데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자 하루아침에 KBS교향악단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KBS교향악단은 1년간 한국교향악단이라는 이름의 민간교향악단으로 활동하다가 5·16 이후 오재경이 공보부 장관이 되어 KBS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객석 2019년 5월호)’ 1961년 5·16 직후 KBS로 복귀한 KBS교향악단은 1969년 운영권이 국립극장으로 이관되며 국립교향악단이 되었다가 1981년 KBS가 운영권을 재인수했다. 임원식은 1971년까지 국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한상우는 이 시기를 ‘임원식으로서는 가장 전성기를 맞는 화려한 지휘자 생활을 보낸 시기’라 말하며, ‘국향에서 물러날 때까지 합주 기량을 국내 최상의 위치까지 발전시켰으며, 풍만한 음감과 유려한 음색 등 고유의 체질을 형성해 놓은 것이 그의 공’이라 평한다. 1968년 동백림사건 때는 위험을 자처하고 재판정까지 나와 윤이상을 변호하기도 했다. 작곡가는 결국 세상 떠날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진 못했지만, 국내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될 때마다 지휘봉은 임원식이 쥐게 되었다. 고인이 원한 바였다. 임원식은 KBS교향악단과 국립교향악단 재임 시는 물론, 사임 후에도 수많은 객원지휘를 맡았다. 1984년 65세의 나이로 인천시향 상임지휘자가 되어 교향악단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칠순을 넘긴 뒤에도 쉴 틈 없이 국내외 무대를 누볐다. 1991년과 1992년에는 한국 지휘자 최초로 러시아를 순회하며 객원지휘를 하기도 했다.

미래의 후학을 존경했던 마에스트로

임원식은 오케스트라 외에 음악교육에도 열과 성의를 다했다. 줄리아드 유학 시절, 우연히 방문한 예술고등학교로 인해 음악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뜻이 펼쳐진 때와 장소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1953년 피난지 부산이었다. 그는 이화여고 신봉조 이사장과 정일형 박사의 지원으로 문교부로부터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개교 당시 학교명은 이화예술고등학교. 건물은 부산 영도에 위치한 이화여고 가건물 교사를 빌려 썼다. 첫 신입생 중 지원자는 21명. 그중 남학생은 김정규(피아노·전 서울대 교수) 뿐이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이화예술고등학교는 1953년 서울로 복귀하며 서울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4회 입학생을 모집하면서는 학급의 정원이 60명을 넘기도 했다. 임원식은 무용과 신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무용과를 개설한 대학은 하나도 없던 때였다. 이사회와 학부모들도 기생 운운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임원식은 졸업생이 배출될 때면 대학에 무용과가 신설될 것이라 장담했고, 놀랍게도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1963년에 이화여대에 최초의 무용과가 개설되었다. 국내 무용교육의 발판이 아이러니하게도 음악가인 그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1966년에는 예원중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 예술교육의 장을 더욱 다진다. 1977년에는 국제청소년음악연맹(FIJM) 제29회 세계총회를 한국에 유치하는 공로를 남겼다. 이례적인 큰 국제행사였다. 서울예고를 운영하던 그는 국제적 연대가 없이는 고립될 것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72년 아우스부르크에서 열린 총회에 참가해 가입하고, 1973년 이스라엘 총회에서 정회원국이 되었다.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92년에는 연맹의 종신 회원이 되었다. 그는 예원학교 오케스트라 일본 순회공연, 서울예고 오케스트라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는가 하면, 팔십을 눈앞에 둔 1997년 서울국제음악제에서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의 합동 연주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이화여고, 이화여대, 서울대, 경희대 등 여러 교육현장에서 교편을 잡았다. 제자들이 임원식의 칠순을 기리기 위해 자리에서 모금한 돈과 자신의 사재를 출연해서 운파음악장학회를 조직하여 해마다 운파임원식음악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제네바콩쿠르에 입상한 이효주(피아노·2011년 수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진상(피아노·2013년 수상) 등이 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임원식의 제자들로 구성되고, 그의 호를 딴 운파메모리얼 오케스트라가 정기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고인은 그로 인해 한국음악사와 후학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흐름은 끊어졌다. 일본에서 1992년부터 매년 8~9월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서 ‘세이지 오자와 마츠모토 페스티벌’가 열린다. 세이지 오자와가 그의 스승 사이토 히데오를 기리는 페스티벌이다. 원래 사이토를 기념하는 음악제였지만, 오자와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의지하여 진행하는 상황에서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 이름을 바꾸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객석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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