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

기억의 상실과 상실을 기억하는 방법에 대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4월 13일 9:00 오전

 

 

결혼은 언뜻 미래와 더 가까운 단어 같다. 그러나 실은 결혼한 부부에겐 각자 과거의 시간과 더 친밀해지는 순간이 많아진다. 미래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시간이 이어지다 보면 마음은 자꾸 ‘쿵’하고 과거라는 중력에 이끌려 떨어진다. 상대방이 세상 전부였던 시간은 희미해지고,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저 사람이 없었다면 달라졌을 내 시간, 그 시간의 온전한 주인이었을 나 자신을 자꾸 되짚다 보면 결혼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다.

시간, 기억상실

기억은 이기적이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살더라도 자기 방식대로 이해한 기억과 그로 인한 감정만을 오롯이 시간에 새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2019)는 각자 자신의 감정을 저울질하느라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들여다볼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남자와 여자의 쓸쓸한 시간을 되짚는다.
부부는 각각 뉴욕에서 촉망받는 연극 연출가와 배우이다. 이혼을 결심한 후 아내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LA에서 TV 시리즈로 복귀하고, 남편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뉴욕에 남아 연극 연출가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결혼 이야기’는 영화와 연극이라는 매체의 차이만큼, LA와 뉴욕의 온도차만큼이나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한 쌍의 남성과 여성이자, 배우와 연출가, 남편과 아내를 관찰한다.
‘결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혼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매력은 ‘배반적 정서’에 있다. 노아 바움백은 결혼과 이혼이 대척점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혼 역시 결혼 이야기의 일부이며, 이혼이 결혼의 종지부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단절된 시간과 공간, 그 속의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흘러가며, 두 사람은 결별하지만 또 완전히 헤어지지는 않는다.
노아 바움백은 한 지붕 아래, 같은 미래를 꿈꾸는 부부에서 각기 다른 하늘 아래 각자의 삶을 되찾으려는 남자와 여자를 바라본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구심점을 두고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만나지 못한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이야기라 꽤 많은 회상이 끼어들 법도 한데, 노아 바움백은 가급적 감상과 추억의 감정을 배제한 채, 건조하고 담담하게 이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찰리를 따라 뉴욕에 살던 니콜은 고향인 LA로 돌아와 원래 자신의 삶을 되찾고, 반대로 뉴욕과 LA를 오가야 하는 찰리는 니콜이 겪었던 균열과 불안을 되짚어 겪는다.
사랑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불안한 현재에 두 사람의 시간은 뉴욕과 LA의 거리와 날씨만큼이나 다르게 흘러간다. 서로 다른 기억과 바람은 빈틈이 되어, 삶의 공허함을 키워간다. 그리고 사랑의 기억이 멈춰서는 순간,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놀이기구처럼 삶에 균열을 만든다. 시간을 공유하면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만, 명쾌한 답이 없는 그들 각자의 기억과 태도는 두 사람을 다시 갈라놓는다.

 

 

 

거리, 상실의 기억

영화의 도입부, 컨설턴트는 이혼을 중재하기 위해 부부에게 서로의 장점을 기록하고 그것을 읽어보게 한다. 이때 두 사람은 제법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자의 이익을 챙겨야 하는 이혼 소송이 진행될수록 태도가 달라진다. 소송에서 유리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서로의 단점과 자신의 불행을 끊임없이 나열해야 한다. 각자의 장점을 떠올리던 아내와 남편은 각자의 삶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상대방이 얼마나 자격이 없고 나쁜 사람인지를 계속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악에 가까운 다툼에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배려는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고 싶을 만큼 사랑하지는 않지만, 가치 없는 사람으로 평가 절하할 만큼 서로를 미워하진 않는다. 어느 순간 어긋나버리긴 했지만, 상대방이 내 인생의 최악은 아니다. 한때 사랑했고, 한때 모든 것을 걸었고, 또 한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연민과 또 그만큼의 증오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남편이 자신보다 더 잘 나간다고 생각했던 니콜은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찰리의 영감을 자극하는 뮤즈가 됐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 한다. 반면 찰리는 니콜이 자신을 통해 그저 그런 영화배우에서 반짝이는 배우가 되었다고 믿는다. 착각과 오해 속에서 이별은 평행선이 되어 나란히 걷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했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상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내 쓸쓸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다. 남녀의 이야기도 현재 속에서, 그 결혼이 끝나는 과정도 현재 속에서 바라본다.
가끔은 마음을 되돌리며, 서로를 잡아달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끝내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와 남편은 이혼소송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서로를 공격한다. 죄의식과 후회 사이의 줄다리기가 끝난 후 남은 것이 상처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연민과 이해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각자의 기억이 달라 명쾌한 처방이 없는 상실의 아픔은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결혼 이야기’는 최악의 말을 내뱉은 후, 스스로 외면한 상대방의 마음을 바라보며 함께했던 시간 속 서로의 기억을 화해시킨다. 결혼 생활은 끝났지만, 그 관계는 끝나지 않은 현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이들의 미래를 남겨둔다.
이혼한 뒤, 자식을 함께 양육하며 니콜과 찰리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로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는 전남편의 풀린 운동화 끈 정도는 묶어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노아 바움백은 해피엔딩을 위장하는 흔한 방식 대신, 각자의 시간을 따라 두 갈래로 나뉜 두 개의 삶이 이어지는 현재를 응원한다. 사랑을 잊고, 상실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한 위안은 없을 듯하다.

최재훈(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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