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MPORARY COMPOSER 7
작곡가 김지현
음악의 경계
KIM JI-HYUN
작곡가 김지현
세상에 묻는다. 낯선 소리로 그리면 현대음악이 될까?
고전(古傳)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인류를 일깨운다. 하지만 수백 년 전 작품이 오늘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을 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 속에서 오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오늘의 모습을 담아 고전으로 숙성시킨다. 김지현(1988~)은 이러한 ‘오늘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작곡가이자, 그 작품을 알리는 장(場)을 만드는 기획자이다. 서울대 음대에서 석사를 마친 후 미국 인디애나 대학을 거쳐 현재 라이스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다. 아르디티 콰르텟 등 해외 유수 단체에 의해 그의 곡이 연주되었다. 2017년에 여성음악인연맹 콩쿠르에서 리비 라슨상, 린 야오지 작곡 콩쿠르와 창악회 콩쿠르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2018년에 아메리칸 프라이즈에서 성악과 합창 부문 입상했다. 음악감독으로서 미국에서 코리안 뮤직 페스티벌 ‘보이스 오브 코리아’를 매해 개최하고 있다.
서울대 음대를 조기 졸업했다.
남들보다 빨리 졸업한 것은 학석사 연계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이다. 학사와 석사 총 6년의 과정을 5년 안에 단축해서 마칠 수 있는 과정이다. 부끄럽지만(?) 모범생이었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현대음악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곡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작곡가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소리를 구축해 나갔는지 들여다보고, 그게 실제로 음악에서 어떻게 들리는지 확인해보는 과정이 재밌었다. 대학 시절에는 분석을 통해 학습한 작곡 기법을 바로 대입해 짧은 연습곡을 많이 썼다. 그때 공부해 놓은 것들이 지금 작곡하는 데에 유용한 기본적 소양이 되었다.
전공과목뿐만 아니라 교양 과목도 상당히 좋아했다고.
‘서양 미술의 이해’ ‘공연 예술의 이해’ ‘영화의 이해’ 등 다양한 과목에서 접한 내용이 어느 순간 작곡에 대한 출발점이 된다. ‘서양 미술의 이해’에서 접했던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을 토대로 쓴 ‘The Street for Chamber Orchestra’(2012)는 범음악제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2010년부터 미국 유학을 가기 직전까지 모교인 덕원예고에 출강했다. 유학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베베른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을 분석해보면 12음기법 등이 매력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기법들을 작곡에 적용하면 결과물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머리로 이해한 기술이 음악으로 제대로 표현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의 간극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좀 더 작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유학을 결심했다. 보다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는 새로운 환경에서 신선한 자극을 받으면서 곡을 써보면 좋을 것 같아서 미국으로 결정했다.
미국에서 쌓은 음악적 자산
인디애나 대학에서의 공부는 만족스러웠나?
연구한 결과물들을 비교적 쉽게 소리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 규모가 커서 학기 중 작곡과 연주를 굉장히 여러 번 했다. 작곡과 학생 중에도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떤 곡을 쓰고 싶다고 상상만 하면 친구들이 다 연주해 줬다.
반면 현재 박사 과정 중인 라이스 음대는 규모가 좀 더 작은데.
라이스 음대는 아시아 음악 관련 행사를 많이 지원해 매력적이다. 이곳에서 ‘From the Bottom of the Sea’(2015)라는 생황과 전자음악을 위한 곡을 썼다. 그리고 페다고지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서 관심 분야 중 하나인 교육학도 공부하게 됐다. 소수 정예 느낌의 학교여서 교수님과도 더 긴밀하게 교류할 수 있다.
‘보이스 오브 코리아(Voices of Korea)’라는 국제 음악제를 기획하고 있다. 공연 기획 경험을 쌓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라이스 대학에서는 매 학기 아시아 음악 관련 행사를 기획하는 대만 출신 천시후이 교수와 협업을 진행한다. 그 기회로 아시아 음악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음악회 시작 단계부터 차근차근 경험하면서 음악 기획에 대해 많이 배웠다.
라이스 대학이 위치한 휴스턴의 음악적 환경은 어떠한가?
미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한국음악과 관련된 행사도 종종 있는데, 한국인이 적어 관련 행사가 있으면 내가 불려 다녔다. 탈춤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장구 반주를 하고, 사물놀이에 대한 특강을 했다. 심지어 케이팝 콘테스트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음악과 국악기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계기로 2019년에 라이스 대학과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후원을 받아 ‘보이스 오브 코리아’를 개최했다.
음악제 프로그램은 어떻게 구성했나?
판소리를 이용한 현대작품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고, 판소리 연주자와 앙상블을 위한 ‘희로애락’(2019)이라는 나의 곡을 초연했다. 행사가 휴스턴 지역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관심을 받아서, 올해 4월에는 텍사스 주립대학의 후원을 받아 오스틴에서 열릴 예정이다.
창작 활동만으로도 벅찰 텐데, 기획자로서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실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 하지만 음악회를 기획하면서 청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 나의 음악이 연주될 수 있는 곳을 주도적으로 찾고, 나아가 다른 좋은 곡도 소개하는 기회의 장을 만드는 것도 작곡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나름 소명의식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음악을 만드는 다채로운 도구
학부 시절은 주로 작곡법을 익히는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막상 그렇게 배운 도구들로 음악을 만들 때 어렵진 않았나?
2010년에 ‘In the Water’를 쓰면서 고민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제주도에서 스킨스쿠버를 한 달 정도 배웠는데 물속에서 들었던 소리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바닷속 경관이 아름다웠다. ‘In the Water’는 그 소리와 풍경을 음악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동안 배웠던 악기론이나 작곡법 지식을 넘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로서 관객에게 음악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곡을 쓰기 시작할 때 항상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내 음악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지 초점을 좁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하고 소리를 찾는 순서로 작업한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자기만의 소리는 어떻게 찾는가?
메시지는 문학 작품에서 강조하고 싶은 주제를 찾거나, 일상생활에서 접했던 이미지들에서 발견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뚜렷하게 정돈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새로운 소리’는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소리로 표현할지 고민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곡가의 모습이다. 즉 소리 자체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소리라도 구성을 다르게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우리치오 카겔(1931~2008)의 작품에서 텍스트와 음악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보컬 음악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음악 외적인 아이디어를 소리라는 매개체로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나의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표제음악과 비슷하다. 곡을 쓸 때 텍스트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고, 텍스트를 전달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 성악이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 카겔을 깊이 연구하게 된 것은 서울대 ‘Studio 2021’의 조교로 일하면서 카겔의 ‘Divertimento?’의 연주를 기획했던 것이 계기다. 카겔의 음악은 성악과 기악 모두에서 작곡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합창지휘를 전공한 동생으로부터 성악의 표현 방법 등 조언을 많이 얻었다.
전자음악과 기악음악에서는 남다른 섬세함이 느껴진다. 실내악곡 ‘위로’에서 평균율과 순정률의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전자음악은 음색의 점차적인 변화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미국에서 음색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마침 인디애나 음대에서 전자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전자음악은 직접 소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다. 음향의 특성을 공부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히며 음악에 매력을 느꼈다.
2015년 ‘Sneeze’라는 작품에서는 화가와 영화제작자와 함께 작업했다. 타 장르와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작품의 아이디어는 주로 음악 외적인 것에서부터 오고, 곡을 쓸 때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많이 상상하는 편이다. 시각예술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Sneeze’가 대표 작품으로, 기획 단계에서부터 각자 그 영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토론하면서 맞춰 나갔다. 그래서 작품이 가진 메시지가 훨씬 더 또렷해졌다.
2016년 이후에는 동양악기를 사용한 작품들을 특히 많이 써왔다.
중국의 전통악기 쟁(箏)을 위한 독주곡을 시작으로, 아쟁과 더블베이스를 위한 ‘Dark Shadow’, 가야금과 현악 4중주를 위한 ‘Ripples’ 등이다. 서양 악기로는 모방하기 힘든 국악기 음색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다룰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판소리에도 관심이 많다. 판소리만의 음색과 스토리텔링이 흥미로웠다.
지금 작업하는 곡은 무엇인가?
‘Cityscape’라는 관현악곡을 작업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코로나가 팬데믹으로 규정되면서, 내가 사는 휴스턴 지역도 이동 제한이 있었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평소에 꽉 막히던 도로가 한산해지고, 자주 들리던 차 경적도 뜸해졌다. 이러한 지금의 상황을 표현하는 곡이다. 차의 경적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아서 발전시키고 있다.
오늘날 현대음악은 청취자도 드물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곡가들이 현대음악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시대가 변하면서 작곡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변화할 것이다. 의도를 표현하는 ‘도구’였던 음악도 자연히 변할 수밖에 없다. 어떤 매개를 통해서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어왔다.
너무 많은 스타일의 음악이 있는데 작품이 쓰인 시기만으로 ‘현대음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규정되는 것이 너무 단편적이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현대음악’이라는 구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낯선 소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이전의 음악과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선입견이 안타깝다. 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경계를 유연하게 가지며 동시대 작품들을 감상하면 좋겠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집필과 해설, 공연기획 등 다양한 접점으로 우리시대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 ‘콘미공’ 진행자,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정보
TIMF 아시아 작곡가 쇼케이스
4월 3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 발표곡 Consolation(한국 초연)
2021 Korean Music Series ‘Voices of Korea’
4월 9일 텍사스 대학(오스틴) | 발표곡 Ripples(개작 초연)
Pierrot Plus Ensemble
4월 25일 장소 미정 | 발표곡 A Gentle Whisper
SEED 2021
9월 중 장소 미정 | 발표곡 생황 독주곡(생황 우 웨이)
2022 Korean Music Series ‘Voices of Korea’
12월 중 휴스턴 | 발표곡 해금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해금 여수연)
김지현을 더 알고 싶다면!
웹 사이트 coolsound88.wixsite.com/jihyunkim 음원 사이트 vimeo.com/user35010856
음반 소개
New Choral Voices Vol. 2
Ablaze Records
수록곡 A Boat Beneath a Sunny Sky(2015)
루이스 캐럴의 시 ‘A Boat Beneath a Sunny Sky’를 가사로 작곡한 합창곡이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가장 마지막에 실린 시로,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계절이 바뀌는 모습들을 묘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시에서 표현하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 계절의 이미지, 마치 꿈처럼 지나간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화했다.
주요 작품 리스트
Gorilla(2013/2015) 길이 약 18분 | 편성 소프라노, 바리톤, 체임버 오케스트라
At Dawn(2015)* 길이 약 12분 | 편성 오케스트라
A Boat Beneath a Sunny Sky(2015) 길이 약 6분 | 편성 합창
From the Bottom of the Sea(2015) 길이 약 6분 | 편성 생황, 전자음악
Consolation(2015/2017) 길이 약 11분 | 편성 플루트, 클라리넷, 트롬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심청(2018) 길이 약 14분 | 편성 소프라노, 테너, 체임버 오케스트라
Ripples(2017/2019)** 길이 약 12분 | 편성 가야금,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2대), 더블베이스
희로애락(2019) 길이 약 18분 | 편성 판소리, 장구,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At Dawn* 조용한 마을에 아침이 밝아올 때, 빛이 서서히 밝아오며 교회당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작곡했다고 한다. 빛이 서서히 번지고, 소리가 서서히 퍼지는 두 현상이 공간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음악적으로 묘사한다. 곡 초반부의 무의미해 보이는 소음들은 점점 종소리라는 실체로 변화한다.
Ripples** 잔잔한 물 위에 돌을 던졌을 때, 그 돌로 인하여 파동이 시작되고 잔물결로 이어지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곡한 작품이다. 발현 악기인 가야금으로 시작된 파동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피치카토의 잔물결로 이어지면서, 솔로 가야금과 앙상블의 현악기들이 상호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