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최후의 낭만주의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9월 7일 9:00 오전

최후의 낭만주의자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지난해 강렬한 순간을 선사한 리시차가 돌아온다!

©GILBERT FRANSOIS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렌티나 리시차(1973~)를 두고 ‘피아노 검투사’라고 부른다. 내한 때마다 무려 세 시간이 넘게 힘 있는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필자 기억 속 리시차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지난해 열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독주회에서 그는 마지막 순서인 베토벤의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하던 중 눈물을 보이며 연주를 중단했다. 당시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갑자기 고령의 어머니가 떠올랐다”고 밝혔다. 슬픔을 머금은 그는 앙코르로 베토벤의 소나타 14번 ‘월광’을 연주했다. 달빛의 온기가 객석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다시금 내한 연주를 앞둔 리시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비슷한 시국이다. 지난 내한 이후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최악의 해였다. 나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비극적인 상실을 견뎌냈을까. 코로나로 인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과 같은 여러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이 나보다 더한 꿈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해외 투어를 갈 때마다 격리로 인해 남편과 아이와 반년 이상 떨어져 지냈다. 그렇지만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괜찮았을 것이다. 타인의 슬픔과 더 가까워지는 한 해였다.

작년 공연에서 베토벤의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하는 도중 눈물을 흘린 게 인상 깊었다.
공연 중반에 코로나 때문에 고국의 국경을 폐쇄한다는 무서운 소식을 접했다. 당시 끔찍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2부의 느린 악장(3악장)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것이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게 만들 거라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공연을 마무리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당시 영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앞줄에 앉은 관객 한 명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나도 갑자기 눈물이 떨어졌다. 그 후 모든 게 안갯속에 있는 것 같다.

이후 ‘함머클라비어’를 다시 연주한 적이 있나.
얼마 후 프랑스 지방 축제에서 이 곡을 다시 연주할 예정이었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는데 이 작품이 이상하게 꺼려졌다. 3악장에 이르자 뚜렷한 이유 없이 또 눈물이 쏟아지더라. 내가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 그날 연습에는 꼭 마지막까지 해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어머니의 이웃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오후에 낮잠을 자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시각은 아마 내가 ‘함머클라비어’를 연습하던 중이었을 테다. 앞으로 내가 이 곡을 언제쯤 다시 연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난해 자가 격리를 감수하면서도 여러 나라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난봄, 한국 공연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모든 공연 단체가 새로운 규칙을 수용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난 시즌 공연을 참 많이 한 편인데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겨울에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바르셀로나에서 공연했다. 통행금지 시간 때문에 베토벤의 소나타 다섯 곡을 휴식도 없이 연달아 선보여 22시 전에 끝낸 기억이 난다.

늘 앙코르의 순간이 화제였다. 지난 내한 때에도 50분 동안 앙코르를 선사했다. 도대체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 힘? 당연 청중으로부터! 객석에서 큰 박수를 보내주면 찌릿찌릿 전기가 통한다고나 할까.

앙코르까지 합치면 매 공연마다 세 시간이 넘는 연주를 선보인 셈이다. ‘리시차의 연주를 보려면 관객도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도 들린다. 건강한 연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연습하는 편이다. 육체 피로에 대해 불평해본 적은 없다. 가끔 수영하고, 집에서 정원을 가꾼다. 그리고 많이 걷는다. 밤에 음악을 들으며 몇 시간 동안 걷는 걸 즐긴다. 최근에는 코로나가 무서워 비타민을 먹긴 한다. 아, 얼마 전에 백신을 접종했다!

유튜브를 통해 이름을 알린 스타로 유명하다. 유튜브가 지금처럼 유명한 플랫폼이 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연주 영상을 게재해 온 이유가 궁금한데.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의 초기 유튜브 구독자들은, 나를 발견한 것이 초기 비트코인에 투자한 사람들만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자랑한다.(웃음) 유튜브에 오랜 시간을 바쳤지만, 새로운 관객 양성에 대해선 여전히 고민이다. 최근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같은 플랫폼에서 짧은 길이 영상이 유행이다. 영상을 모두 1분 단위로 잘라서 올리더라. 이러한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나에게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은 홍보의 도구가 아니라 교육의 도구인 듯하다.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시대가 찾아왔다. ‘연주 영상’이 더욱 화제가 되는 시기다. 앞으로 연주자에게도 영상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질 듯하다. 반면 연주 영상이 라이브 공연을 대체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사실 코로나가 끝나도 계속 연주 영상만 소비될까 봐 걱정이 크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1961)가 했던 말이 종종 기억난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 녹음에 대해 “나의 불쌍한 시체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정도 이해되는 말이다.

‘소울메이트’ 한국 팬들과 만나는 시간

한국 관객만의 특징을 발견한 것이 있나.
내가 별로 유명하지 않았을 때부터 한국 관객은 늘 따뜻했다. 특히 작년 공연이 강렬하다. 그날 우리는 ‘연주자-관객’ 이상으로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직하게 마음을 열었다. 소울메이트가 된 것 같다.

이번 공연에서는 라흐마니노프(1부), 쇼팽(2부)의 레퍼토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첫 곡으로 선보이는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42는 작곡가 말년 작품인 만큼 ‘삶과 죽음’을 주로 다룬다. 코로나 시국에 더욱 와닿는 곡이다.
작년 가을과 겨울에 나는 이탈리아 별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탈리아는 여러 차례 엄격한 봉쇄를 시행했다. 우울한 상황이었다. 내가 처음 라흐마니노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배웠을 때가 생각났다. 지하 연습실에서 나의 뵈젠도르퍼 피아노의 음정이 너무 안 맞아 연습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이어서 선보이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일 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개정판을 냈다. 이번 공연에선 오리지널버전으로 연주할 계획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이탈리아에서 연습할 때 원전 악보만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리어 이렇게 된 것이 매우 기쁘다. 라흐마니노프는 개정판을 두고 “내 살을 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2부에서는 쇼팽 4개의 스케르초를 선보인다. 스케르초는 베토벤 소나타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간 몰두해온 베토벤과 비교했을 때 쇼팽만의 변별점은.
쇼팽은 베토벤의 전통적인 스케르초를 따랐지만, 훨씬 날카롭고 야윈 질감을 담았다. 특히 네 개 작품 전체에 걸쳐 테마를 추적하는 것이 흥미롭다. 2번과 4번은 ‘해피엔딩’을 가졌고, 4번은 마냥 즐겁다. 그런데 1번과 3번은 우울하고 비극적이다. 전체를 보면 각각 독특하고 대비로 가득 차 있다.

마지막 곡인 ‘환상 폴로네이즈’ Op.61은 쇼팽 만년 최대 걸작으로 통한다. 병마 때문에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쇼팽의 비통한 마음이 잘 담겨있는 곡이다.
맞다. 그러나 리스트는 반대 의견이었다. 리스트는 쇼팽 사후에 “이 작품은 쇼팽 전성기에 걸맞지 않고 나약하고 퇴폐적이다”라고 혹평했다. 리스트는 쇼팽 초기의 영웅적인 모습과 더 친밀했나 보다.

마지막으로 이번 내한을 통해 한국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작곡가의 의도에 우리가 더하는 것은 삶의 경험이다. 우리가 어떤 일생을 겪으며 살아가는지가 모든 연주에 담긴다. 모두에게 작년은 비극적이었겠지만, 모두를 변화시켰다. 바라건대 그 시간들이 우리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었기를. 그렇기 때문에 작년과 동일한 관객이더라도 아마 모든 것이 다를 테다. 다시금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싶다.
장혜선 기자 사진 오푸스


발렌티나 리시차 피아노 독주회
9월 9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9월 11일 오후 7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쇼팽 스케르초 1~4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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