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독재의 예술사, 서거 200주기 맞은 나폴레옹과 예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9월 13일 9:00 오전

SPECIAL

Napoleon
Art of Revolution & Empire

PART1 | 나폴레옹과 음악    PART2 | 나폴레옹과 발레     
PART3 | 나폴레옹과 미술     PART4 | 프랑스 현지의 나폴레옹 관련 예술 행사

혁명과 독재의 예술사

서거 200주기 맞은 나폴레옹과 예술

세상은 산 나폴레옹을 저버렸으나, 죽은 나폴레옹은 세상을 얻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 1821)가 사망한 지 정확히 200년이나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점에서다. 그의 이름은 예술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했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나폴레옹을 향한 다각적 접근이 이뤄졌다. 평화에 싫증 난 평화론자, 비판을 허용하는 독재자,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미래지향적 야심가 등 나폴레옹의 상충하는 성향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 앞에 처음 등장했을 땐 열렬한 기대와 지지를 받았다. 베토벤이 그러했듯,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여세를 몰아 세상에 자유를 가져올 영웅이라 믿었다. 혁명으로 국내 정세가 불안할 때 이탈리아 원정을 승리로 이끌어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북돋는 한편, 나폴레옹의 불굴의 투지와 진취적 기상은 당시 정쟁과 부패에 찌든 총재정부와 좋은 대조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런 대중의 희망을 발판 삼아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권좌에 올랐다. 실망한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해버렸다.
서양사학자 이용재는 나폴레옹이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그가 세운 공로가 남들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구세주로 부각할 줄 아는 능란한 정치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검열제도를 확대해 비판 여론을 단속하는가 하면 관변 언론을 효과적으로 동원해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통치자의 이미지를 심어나갔다는 것이다.
  예술도 여기에 활용됐다. 회화로 자신의 위업을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각인시켰고, 음악으로 과거의 영광을 찬양하게 했다. 이러한 가운데 음악당, 발레단, 미술관 등의 조직을 재정비하는 개혁가로서의 실천도 해나갔다. 이에 따라 음악, 발레, 회화 등의 예술은 변화해갔다.
예술에 남은 나폴레옹의 흔적을 따라, 파리의 예술 공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특집 지면을 준비했다. 음악의 중심지였던 궁정 음악당, 나폴레옹이 단행한 파리 오페라 발레 조직 개혁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르니에 극장, 그리고 그가 기틀을 마련한 루브르 박물관, 올해 나폴레옹 서거 200주기를 맞아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개최하고 있는 앵발리드까지 들러보자. 각 공간에 흐르는 당대 예술은 나폴레옹의 성향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글 박찬미 기자

PART1
Napoleon’s art 
music

나폴레옹과 음악
황제가 사랑한 음악
황제를 사랑한 음악가

나폴레옹의 음악 취향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성악 작품을 선호했으며, 무엇보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좋아했다. 프랑스인으로서는 조금 특별한 그의 음악적 취향은 그가 코르시카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항상 조용하고 슬픈 음악을 즐겨 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은 주로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가 음악회에 도착할 때는 정치 현안들로 인해 근심이 가득한 잔뜩 경직된 얼굴이었지만, 음악회가 끝나고 나면 주위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대 수많은 음악가가 나폴레옹을 추종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나폴레옹의 승전, 결혼, 즉위, 득남, 재혼 등 나폴레옹의 개인적 또는 공적인 경사에 맞추어 작품을 헌정했다. 거기에 나폴레옹이 작곡가에게 위촉한 작품까지 더해져, 나폴레옹이 주최하는 축하 행사나 축제에는 음악이 넘쳤다.

말메종 성

황제의 이탈리아 음악 취향
나폴레옹이 가장 총애한 작곡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조반니 파이시엘로(1740~1816)➊였다. 나폴레옹이 파이시엘로를 처음 만난 것은 1797년 1차 이탈리아 원정 때다. 그는 이탈리아의 명망 있는 두 작곡가였던 파이시엘로와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에게 모젤 주둔군 총사령관이었던 루이 나자르 오슈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경합을 벌이게 했는데, 거기서 파이시엘로가 우승을 차지했다. 나폴레옹이 이 작품의 악보를 직접 파리 음악원에 기증한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1802년 7월 20일 나폴레옹은 그를 불러들여 새로 개관한 자신의 음악당(나폴레옹의 집권기에 따라 통령채플, 황실채플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_편집자 주)을 맡기는 등 융숭하게 대접했다. 파이시엘로는 그 보답으로 수많은 미사와 모테트, 대관식 음악을 헌정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따듯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리에 2년밖에 머무르지 않고 1804년 나폴리로 돌아가 1806년 나폴리 왕이 된 나폴레옹의 맏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위한 실내악과 교회음악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나폴리 행 배경에 관한 여러 추측이 있는데, 그중 1803년 나폴레옹에게 헌정한 오페라 ‘프로세르피나➋’의 흥행 실패와 그 배후에 프랑스 음악가들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 설득력을 얻는다. 파이시엘로는 프랑스를 떠났지만 나폴레옹은 그가 여전히 파리 음악원의 교수 자격을 유지하게 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1802년 나폴레옹이 제정한 훈장으로, 전장에서 공적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 한다_편집자 주)도 수여했다.

비록 파이시엘로와의 경합에서는 졌지만, 케루비니 역시 나폴레옹에게 여러 작품을 공적으로 위촉받은 작곡가다. 그의 오페라 ‘피말리온느’(1809/피그말리온)를 포함해 궁정 음악회에서 그의 작품들이 자주 무대에 올랐다. 그가 나폴레옹을 증오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나폴레옹의 왕정복고 직후에 있었던 일이고, 그 소문 자체도 의심할 여지가 있다. 

파이시엘로가 나폴리로 떠난 후 여러 음악가가 그가 맡았던 일들을 대신했다. 음악당의 후임자로는 장 프랑수아 르 쥐외르(1760~1837)가 내정되었다. 나폴레옹이 그를 파이시엘로만큼 총애한 것 같지는 않지만, 나폴레옹이 1804년 초연한 르쥐외르의 오페라에 감명받아 그에게 6,000프랑을 하사했으며 금으로 된 담뱃갑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나폴레옹은 파이시엘로가 맡았던 궁정극장의 음악회를 위해 드레스덴 잭슨 궁정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니난도 파에르(1771~1839)를 데려왔다. 1807년 그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종신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직을 맡았는데, 이는 음악적 능력보다는 그가 아부를 잘하고 나폴레옹을 잘 섬긴 덕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수와 반주자로서 음악적 활동은 계속했지만, 파리에 온 이후 거의 작곡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인 ‘누마왕’(1808) ‘클레오파트라’(1808) ‘디도’(1810) 등은 모두 궁정극장에서만 연주되었을 뿐 일반 청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다. 

가스파레 스폰티니(1774~1851)는 나폴레옹에게 파이시엘로, 르쥐외르, 파에르 다음으로 총애를 받은 이탈리아 작곡가로, 황비 조제핀의 특별한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오페라 ‘베스타 여사제’(1807)➌가 연주될 수 있었던 것도 황비가 고집한 덕분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나폴레옹도 이른바 ‘황제 스타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인정하고 보호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스폰티니에게 ‘페르낭 코르테즈’(1809)➍를 위촉하기도 했다.

총애를 입은 프랑스 작곡가 메율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탈리아 작곡가를 선호한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고, 그들에게 궁정의 요직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프랑스 작곡가들에게도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당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802년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1803년 칙령을 통해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학문·회화·조각·건축 등을 연구하기 위해 루이 14세에 의해 1666년 로마에 세워진 기관)를 재건하는 개혁을 시행하는데, 이 일의 책임을 작곡가 에티엔 메율(1763~1817), 프랑수아 조제프 고섹(1734~1829), 앙드레 그레트리(1741~1813)에게 맡겼다. 그들은 프랑스 대혁명기를 대표하는 음악가였다. 나폴레옹은 특히 메율을 총애했다. 오페라 ‘분노한 사람➎’(1801)의 인쇄본에 적힌 나폴레옹에 대한 메율의 헌정사를 보면, 메율과 나폴레옹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폐하와 음악에 관해 나누었던 대화 덕분에 제가 오늘날까지 작곡했던 것보다 덜 어려운 장르로 작곡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라토’ 이야기를 선택했고, 이 작품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폴레옹은 메율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의 오페라 공연에 자주 참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궁정극장에서 그의 오페라를 상영하게 하고, 주요 국가적 행사를 위한 음악을 그에게 위촉했다. 그가 나폴레옹을 위해 남긴 대표적인 작품은 ‘나폴레옹 군의 귀환을 축하하는 노래’(1807) ‘황제의 결혼을 위한 노래’(1810)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드’(1810) 등이 있다. 메율은 나폴레옹에게 가장 많은 작품을 헌정한 작곡가로 기록된다. 


나폴레옹의 귀를 사로잡은 성악가
나폴레옹은 실력 있는 성악가들을 직접 발탁하고, 경제적인 지원으로 그들의 재능을 보상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카스트라토 지롤라모 크레센티니(1762~1846)를 처음 만난 건 18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족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 크레센티니를 보자마자, 그의 목소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궁정극장과 자신의 음악당 제1가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세기까지 이탈리아 음악계에 만연하던 거세 관습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교시를 본인의 명령으로 내린 바 있어, 자신이 카스트라토를 총애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빈축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정복에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되던 ‘철의 관’을 크레센티니에게 수여했던 것은 큰 스캔들이 되었다.
이탈리아 콘트랄토 마리아 주세피나 그라시니(1773~1850)는 아름다운 목소리뿐만 아닌, 출중한 미모를 갖춰 나폴레옹이 가장 총애했던 여가수다. 그녀 역시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당하자, 그와의 공연 약속을 어기고 연주 장소에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런던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를 기념하는 축제에서 노래했다.
이탈리아 소프라노 안젤리카 카탈라니(1780~1849)는 앞서 살펴본 카스트라토 크레센티니의 제자다. 한 저녁 연주회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감명받은 나폴레옹은 그녀가 런던 극장과 맺고 있던 큰 계약까지 취소하도록 명하며 그녀를 발탁했다. 그 외에도 나폴레옹이 아낀 성악가 중에는 프랑스 테너 피에르 장바티스트 프랑수아 엘르뷔(1769~1842), 프랑스 바리톤 프랑수아 레이(1758~1831) 등이 있다.

비르투오소를 등용한 나폴레옹
나폴레옹 집권기에는 비르투오소로 추앙받는 이들이 나폴레옹의 환대를 받았다. 당대 프랑스 바이올린 악파의 수장, 로돌프 크로이처(1766~1831)는 음악당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파리 오페라의 솔리스트였다. 피에르 바이요(1771~1842)는 크로이처와 마찬가지로 음악당과 오페라 극장에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솔리스트로도 유럽 각지에서 명성을 얻었다. 피에르 로드(1774~1830)는 나폴레옹 집권기에 음악당의 솔리스트로 활동했던 연주자다. 그가 1808년 파리에 돌아왔을 때 청중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 못하자 다른 나라를 거점 삼아 활동을 이어갔다. 당대 활동한 피아니스트로는 다니엘 슈타이벨트(1765~1823), 피에르 지메르만(1785~1853), 루이 자댕(1768~1853) 등이 있다. 
하피스트 마르탱 피에르 달비마르(1772~1839)는 황후인 조제핀과 딸 오르탕스에게 음악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궁정 음악회 무대에 올랐다. 호르니스트 프레데리크 니콜라 뒤베르느(1765~1838)는 당대 호른뿐만 아니라 모든 관악기에 정통했다. 그는 당시 연주하기 어려운 호른 기교를 유려하게 연주하는 연주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연주에 감탄한 나폴레옹은 그를 개인 채플 음악가로 임명했다. 뒤베르느는 그 외에도 오페라 극장, 궁정 음악회 등에 호른 주자로 무대에 서는 한편,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한다.

찢긴 제목 위에 직위한 황제

나폴레옹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베토벤(1770~1827)이 교향곡 3번 ‘영웅’을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순간,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1784~1838)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분노에 사로잡혀 “나폴레옹도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어, 그도 이제부터 자신의 야심만 생각하며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짓밟을 거야!”라고 소리치며 표지 위에 써놨던 나폴레옹의 성(姓)인 ‘보나파르트’를 지우고 ‘한 위인을 추억하기 위한 영웅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출판했다. 그리고 작품을 베토벤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프란츠 폰 로브코비스 후작에게 헌정했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가 베토벤에게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이전에 베토벤이 얼마나 나폴레옹을 추앙했는지 알 수 있다. 
베토벤과 보나파르트 가의 인연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베스트팔렌의 왕이 된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카젤 궁의 연주회와 공연을 총괄하는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베토벤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빈을 선택한다. 나폴레옹의 혈육 가운데 유일하게 나폴레옹의 파국 이후에도 끝까지 곁을 지킨 여동생 폴린 보나파르트는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화려한 연애 행각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탈리아 작곡가 펠리체 블란지니(1781~1841)를 개인적인 음악가로 임명(1806)하고 그와 연인이 되었다. 이들의 관계는 나폴레옹이 개입하여 블란지니를 베토벤 대신 제롬의 카젤 궁의 카펠마이스터로 보냄으로써 정리되었다.

글 민은기 정리 임원빈 기자 
(※ 본 원고는 민은기(음악학자·서울대 음대 학장)의 논문 ‘나폴레옹의 독재적 음악 정책’을 발췌·정리한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3번 표지

추천 음반

나폴레옹의 음악 정책

나폴레옹이 음악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 것은 집권한 직후부터였다. 나폴레옹은 화려한 음악이 그의 통치를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프랑스 음악으로 국가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집권했더라도, 엄연한 쿠데타였기 때문에 국민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만큼 나폴레옹에 대한 외국 여론은 매우 나빴다. 이것이 그가 음악을 국가적 제도로 통제하기 시작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파리 오페라를 재정비한 이유는?
나폴레옹이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오페라였다. 그는 오페라가 국민들에게 국가적 자긍심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집권하자마자 파리 오페라를 전폭적으로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개혁 초기에 나폴레옹은 제1통령의 직속 권한으로 레퍼토리들을 승인했다. 1802년 종신 통령이 된 이후에는 파리 오페라의 경영을 행정부가 맡게 함으로써 더 깊이 개입했다.
1803년부터는 파리 오페라의 내부 행정 인력까지 나폴레옹이 직접 임명했다. 황제가 된 후 1804년 ‘파리 오페라’의 이름을 ‘황실 음악 아카데미’로 바꾸었다. 이러한 행보는 파리 오페라에 ‘왕립 음악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의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던 태양왕 루이 14세와 완전히 닮은 꼴이었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을 거치는 동안 재정 상태가 매우 나빠진 파리 오페라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 나폴레옹은 3개 법령을 발표해 자신의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1806년 법령을 통해 극장 개관에 대한 특권 체계를 재설정했고, 1807년 각 극장에서 어떠한 장르의 작품을 상연해야 하는지 결정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은 노래와 무용을 전담하였으며, ‘작품 전체가 음악으로 된 무대 작품’, 즉 오페라를 초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것은 파리 오페라가 혁명 정부에 의해 박탈당했던 프랑스어 오페라에 대한 독점권을 다시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다른 극장들은 제한된 레퍼토리만을 상연해야 했다. 오페라 코미크는 가사와 대사가 섞여 있는 작품만을, 오페라 부파는 이탈리아어로 된 작품만을 상연할 수 있었다. 이어 1807년 7월에는 파리에 8개의 극장만 허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퇴출시키는 결정적인 법령을 공표했다. 결국 25개가 넘는 극장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문을 닫았다. 이내 ‘극장 감독’직이 생기고 1808년에는 극장 총감 사무소가 세워져 왕정시대와 같은 통제 기능을 맡기도 했다.

오페라 극장에 대한 개혁은 제도뿐 아니라 극장에서 상연되는 작품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도 시행되었다. 1806년 법령에는 오페라의 주제가 “주인공들이 신이거나, 왕이거나 영웅인 신화나 역사적 사건에서 끌어온 것”이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나폴레옹이 거둔 영웅적 승리에 크게 고무되어 있던 파리 청중에게 오페라 작품 속의 영웅과 나폴레옹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상연될 모든 무대 작품은 경찰 장관의 허가를 받았다. 베르통(1767~1844), 메율(1763~ 1817), 크로이처(1766~1831) 등 오페라 작곡가들은 권력자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써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절대 권력 선전을 위한 궁정 극장
파리의 극장들이 대국민적 선동의 성격이 강했다면, 나폴레옹이 새로 세운 궁정 극장들은 그의 절대 권력을 선전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연극과 음악을 좋아했던 나폴레옹은 제1통령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정 극장들을 건립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신혼을 보냈던 말메종 저택에 세워진 말메종 궁정 극장은 200석 규모의 작은 무대와 음악 살롱을 갖추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측근들만을 위해 쓰였다. 1802년 5월 12일 이곳에서 파이시엘로(1740~1816)의 ‘마님이 된 하녀’★가 공연되었다. 1802년 8월 종신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그해 9월부터 생 클루에 거주했는데, 이곳의 궁정 극장에서 열린 저녁 공연은 훨씬 더 공식적이었다. 1808년 튈르리 궁에는 전시용 극장이 세워졌다.
나폴레옹은 과거 왕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궁전 음악당을 튈르리 궁전에 재설치했다. 통령 음악당은 나폴레옹이 총애하던 작곡가인 파이시엘로가 파리에 도착한 1802년 7월 20일 이후 열렸다. 나폴레옹의 음악당은 원래 (카스트라토를 포함하여) 8명의 가수와 27명의 연주자로 구성되었는데, 1812년에는 음악가 수가 50명으로 늘어났으며 연간 예산도 약 1.7배 증가했다.

파리 음악원을 지원하다
나폴레옹은 음악교육 기관에 대해서도 개혁을 단행했다. 그가 특별히 관심을 보인 기관은 파리 음악원이었다. 1801~1802년 사이 파리 음악원은 내부적인 불화가 심했으며, 재정 상황도 좋지 않았다. 파리 음악원은 이미 1790년대 말 정부에 경제 원조를 요청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파리 음악원은 38명의 교직원을 감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지원으로 통령 정부와 제1제정시대에 파리 음악원의 사정은 조금씩 개선되었다.
1806년 학생 기숙사가 지어졌고 1811년 음악회당이 건립되었다. 1803년부터는 그 유명한 로마상이 신설돼 이 상을 받은 학생들은 메디치 빌라로 유학 가는 행운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그 외 파리 음악원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두었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음악기관만 지원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볼로냐, 베르가모, 밀라노에도 음악 아카데미를 세웠다.
나폴레옹의 음악 정책은 주로 오페라 극장, 궁정 극장, 궁정 음악당, 파리 음악원 등 음악기관에 관한 것이었으나, 저작권이나 연금 등에 관한 칙령을 내려 음악가를 보호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나폴레옹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한 경우가 많았다.
글 민은기 정리 장혜선 기자
(※ 본 원고는 민은기(음악학자·서울대 음대 학장)의 논문 ‘나폴레옹의 독재적 음악 정책’을 발췌·정리한 것이다.)

★추천 음반

파이시엘로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
안네 빅토리아 뱅크스(세르피나)/지안 루카 리치(우베르토)/바올로 바글리에리(지휘)/밀라노 체임버 오케스트라
Nuevo Era 231726

PART2
Napoleon’s art
ballet

나폴레옹과 발레
신화 소재와 춤 형식의 정립 발레단 운영의 합리화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집권기가 발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임은 분명하다. 왕실에서 꽃피운 궁정발레(ballet de cour)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낭만발레(romantic ballet)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입고 장엄하게 걷던 귀족들의 춤이 튀튀를 입고 발끝으로 올라서는 발레리나의 춤이 되었다.
하지만 가시적인 변화보다도 발레와 왕실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왕실이 무너진 시대에 왕실에서 태어나 발전한 발레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중심엔 1787년부터 1827년까지 40년간 파리 오페라의 발레마스터로 장기집권한 피에르 가르델(1758~1840)이 있다.

가르델, 신화로 대중에게 다가가다
가르델은 파리 오페라 발레마스터였던 형(막시밀리앙 가르델)이 사망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교육과 행정에 능했다. 하지만 2년 후 1789년 혁명이 발발했고 이후 10년간 무려 6개의 정부가 세워질 정도로 어지러운 정세가 이어졌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술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작품은 애국적인 주제를 담아야 했고 친귀족, 혹은 반혁명적이라 판단되면 창작자는 체포되었다. 많은 무용수가 해외로 빠져나갔고 발레단은 초토화되었다. 파리에 남은 가르델은 시대를 읽으며 그때그때 요구되는 스타일의 작품을 창작하고, 인기 있던 전작을 되풀이하고, 때론 침묵했다.

혁명기 발레 작품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사랑과 자유를 찬양하는 작품이 많다. 가르델은 신화 발레를 12편 이상 만들었고, 주요 안무가들(장 조르주 노베르(1762; 1788), 도베르발(1788), 가르델(1790))이 ‘프시케’라는 작품을 줄줄이 내놓을 정도였다. 훗날 사람들은 세상이 변했는데 발레는 늘 신화나 영웅 이야기나 되풀이했다며 비판하지만, 이들에게 신화는 현실정치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중요한 생존전략이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는 혁명기에 찬양되었다. 신화와 영웅 이야기는 폭력과 굶주림에 지친 관객들이 현실로부터 숨 돌릴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튜닉, 로마의 토가, 그리고 끈이 달린 샌들은 혁명세대를 대변하는 최신 유행의복인 동시에 무용수들에게는 편안하게 춤출 수 있게 하는 의상이 되었다. 납작한 샌들을 신은 무용수들이 이전보다 훨씬 높이 뛰어오르면서 발레의 테크닉도 발전했다. 가르델이 혁명 직후에 안무한 ‘칼립소 섬의 텔레마코스(Télémaque dans l’ile de Calypso)’(1790)는 잘 알려진 신화를 담은 ‘서사 발레(ballet héroïque)’로, 36년간 408번이나 공연될 정도로 흥행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발레단은 혁명 후 시민사회에서 빠르게 입지를 확보했다.

물론 가르델이 신화 발레만 만든 것은 아니다. 공포정치 기간에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수백 명씩 모여 둥글게 손잡고 춤추는 원무인 ‘라 카마놀(La Carmagnole)’이 유행했고,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기획한 대규모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19세기 유럽의 사교모임이나 귀족적 연회 등에서 연극의 한 장면 혹은 회화를 무언(無言)과 부동(不動)의 상태로 연출하는 놀이를 말한다_편집자 주)이나 대규모 야외축하 행사인 ‘혁명 축제(Fêtes Révolutionnaires)’가 자주 개최되었다. 거리가 곧 정치의 무대인 상황에서 프랑스의 주인이 된 민중은 노래하고 춤추며 참여했다. 가르델이 이런 프로파간다 행사의 안무를 자주 맡았다는 사실은 무대와 일상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역행과 개혁을 아우르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변화의 흐름을 다시 역전시켰다. 1804년에 세습 황제로서 거창한 대관식을 치르고 1810년에 합스부르크가의 공주와 결혼한 그는 왕처럼 군림하고 왕실 못지않은 웅장한 의례를 즐겼다.
또한 나폴레옹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검열했다. 혁명 기간 중 파리에 극장 수가 많이 늘어났지만 나폴레옹은 극장이 사회의 롤모델을 제공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8개의 극장만 남기고 폐쇄했으며, 공연 내용을 규제했다. 이에 파리 오페라는 작품 선택부터 연습과정, 일상까지 철저히 통제받았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신과 영웅이 등장하는 귀족 스타일의 발레 작품을 선호했고, 파리 오페라 발레는 이런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단체로 허가 받았다.
나폴레옹의 통제에는 역행적인 측면뿐 아니라 개혁적인 측면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혁명가답게 관행과 관습을 뒤엎고 모든 조직을 합리화했다. 이에 파리 오페라의 발레단과 발레학교도 크게 변했다. 발레단에서는 무용수들이 외부에서 개인 교습을 받던 관행을 없애고 무용수나 안무가가 임의로 스텝을 바꿀 수 없게 했다.
또한 능력주의에 따른 위계를 중시했던 그는 윗선의 입김이나 스타무용수의 텃세 등을 제거하고 배역과 승진 등을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경쟁하도록 했다. 최근 파리 오페라의 박세은이 에투알로 임명되며 화제가 되었던 승급심사 제도가 이처럼 코르 드 발레부터 주역 무용수까지 공평하게 경쟁하는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발레학교 역시 크게 변화했다. 발레학교는 나폴레옹 집권 기간에 여러 번의 쇄신을 거쳐 합리적이고 점진적인 교육체계를 갖추었다. 초급부터 완성반까지 교육 단계를 나누고 뛰어난 교사를 초빙했으며 주요 동작을 반복 연습하여 테크닉적 완성도를 높였다. 테크닉을 중시했던 가르델은 발레학교를 감독했던 정부 관계자와 끝없이 행정 서류를 주고받으며 교육 수준을 높이려 노력했다. 여기엔 내무부 장관에게 학교를 존치하게 해달라는 청원부터 남학생의 의무 복장인 반바지 때문에 무릎을 잘 볼 수 없으니 벗게 허락해달라는 요청까지 다양하다. 이후 파리 오페라가 수많은 스타 무용수들을 배출하고 해외로부터 관객과 무용수들을 끌어들였던 것은 이러한 쇄신 덕분이다.
한편, 혁명의 기운은 발레의 미학 역시 변화시켰다. 궁정발레 시대에 남성무용수들은 귀족적이고 영웅적인 당쇠르 노블(danseur noble), 활발한 춤으로 테크닉을 과시하는 드미-카락테르(demi-caractère), 그리고 코믹하고 그로테스크한 코미크(comique)로 위계가 나누어져 있었다. 당쇠르 노블이 귀족이라면 드미-카락테르와 코미크는 평민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귀스트 베스트리스(1760~1842)라는 뛰어난 무용수가 이 경계를 넘나들었고 이후 많은 이가 그처럼 춤추길 원했다. 이는 베스트리스 개인이 일으킨 변화인 동시에 ‘발레에도 사회와 같은 위계가 있다’는 관념이 무너진 사회적 현상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를 진정한 춤의 몰락이라며 안타까워했지만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가르니에 극장

발레, 중산층에 스며들다
가르델의 인기작 ‘라 당소마니(La Dansomanie)’(1800)는 스스로 당쇠르 노블이었던 가르델이 당쇠르 노블을 희화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댄스마니아인 주인공 M. 뒬레거(‘가벼운 발걸음 씨’라는 뜻)가 딸과 구혼자의 결혼을 허락해주는 과정을 풍자한 작품으로 중산층인 주인공, 웃긴 이름과 행동, 해피엔딩, 화려한 장치, 이국적인 춤의 나열 등으로 관객의 흥미를 끌었다. 중산층 관객은 무대에서 그들과 같은 중산층을 보고 환호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집권기는 점진적으로 발레를 변화시켰다. 나폴레옹의 긴 원정으로 외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스페인, 중국 등 지정학적으로 구체적인 지역의 춤과 의상이 정확히 고증되었다. 오늘날 캐릭터 댄스의 시초이다. 또한 귀족이 아닌 중산층 관객이 동일시 할 수 있는 평민이나 혁명을 이끈 여성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고, 피와 폭력에 익숙한 이들이 빠져들 만한 대규모 장치와 스펙터클이 중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낭만발레의 시초인 ‘라 실피드’(1832, 장 마들렌 슈나이츠회퍼 작곡, 필리포 탈리오니 안무)에서 집대성되면서 우리가 아는 발레가 탄생하게 된다. 글 정옥희(무용비평가)

루브르 박물관 ⓒTTstudio

PART3
Napoleon’s art
Museum

나폴레옹과 미술
황제와 권력의 초상화

미술과 미술관에 있어서 나폴레옹(1769~1821)은 이율배반적인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를 최고의 박물관, 미술관을 지닌 문명국가로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전 왕실, 교회 그리고 해외로 망명한 자들이 남긴 예술품은 물론, 벨기에·이탈리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예술품을 약탈한 야만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약탈의 책임이 나폴레옹만의 것은 아니다. 당시 패전국은 승전국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했는데 이때 현금 또는 금, 식량, 지하자원 채굴권 등으로 주로 지불했다. 하지만 협약에 따라 예술품으로 배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1815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약 5,000점의 예술품이 본국으로 환송되었지만, 여전히 루브르 박물관은 양과 질에서 명실공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박물관 중 하나로 남았다.
1793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의 대가로 루브르궁은 ‘공화국 중앙예술박물관(Muséum Central des Arts de la République)’으로 개관하면서 왕실과 귀족, 교회로부터 몰수된 예술품은 ‘공화국 국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1799년 11월 혁명을 배신하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1803년 집권하면서 ‘공화국 박물관’도 ‘나폴레옹 박물관(Musée Napoléon)’이 되었고 1804년 황제로 즉위한 그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완성해 전쟁의 성과인 전리품을 국민과 인류에게 재분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영국,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을 벌였다.

전쟁으로 맞은 미술계 전성기
그의 통치 기간 중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이 전쟁에 시달렸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은 전성기를 맞았다. 루브르는 전리품으로 고대 이집트와 근동유물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중요미술품으로 가득했다. 그는 초기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08년 루브르 입구에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을 세웠다.
이때 그는 1797년 이탈리아 원정 시 베네치아의 산 마르크 성당에서 약탈해온 4마리의 청동말(Quadriga)을 완성된 개선문 위에 올려놓았다.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후 베네치아에 돌려주었지만, 알고 보면 이 청동 마상도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마가의 시신과 함께 훔쳐 온 것이다.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의 4두 전차상도 약탈해 파리로 옮겨왔다가 프로이센에 패한 후 1814년 베를린에 반환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통치했던 이탈리아에도 황제의 면모를 살려 미술관을 확충해 나갔다.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중심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워 북이탈리아 전역의 궁과 귀족으로부터 몰수한 수천 점의 예술품들을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이 미술품들을 바탕으로 1809년 새로운 미술관을 개관했고 미술품은 그의 이탈리아 통치기간 중(1799~1815) 꾸준히 늘었다.
볼로냐 미술관(Pinacoteca Nazionale)이나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cademia)도 나폴레옹이 교회와 귀족들에게 약탈한 작품이 기반을 이뤘고, 후일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은 미술품이 보태졌다. 프랑스 지방미술관들도 나폴레옹의 음덕에 기인한다. 1801년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 교회와 수도원에서 징발한 유명 미술품 40여 점을 로앙 궁전(Palais Rohan)에 보냈고 이후 이를 기반으로 고고학, 장식미술, 순수미술관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폴레옹은 열정적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해 자신의 전과와 업적을 과시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고·인문·지리·역사 등에서도 많은 성과를 얻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공과가 동시에 있다.

진짜 황제의 모습은?
나폴레옹은 미술을 비롯한 예술이 선전의 도구로, 우상화의 수단으로 매우 효과적이란 점을 간파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치적을 담은 그림을 그리게 하여 자기선전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명칭까지 바꾸었던 루브르만 해도 그를 기리는 미술품들이 즐비하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두 번째로 큰 작품인 ‘나폴레옹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1805~8, 유화, 621×979cm)은 크기나 내용 면에서 선전미술로 손색이 없다. 1804년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식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다비드(1748~1825)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토대로 작업하기보다는 권력 지향적이며 지배자에 대한 찬미로 일관해 ‘어용화가’로 인식되지만, 신고전주의 화풍을 완성한 실력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의 삶과 맥이 통한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쓰면서 프랑스의 제1통령이 황제가 되는 ‘셀프 즉위식’을 통해 교황을 들러리로 만들었다. 특히 당시 대관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마치 여왕처럼 중앙에 놓고, 중년이던 왕비도 20대의 순결한 미녀로 그렸다.
다비드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나폴레옹의 주문에 따라 그림의 구도를 바꿔야 했다. 이후 그는 미국 실업가들의 주문에 의해 대관식 그림을 한 점 더 그리는데 이 작품은 현재 베르사유에 걸려있다. 다비드가 그린 ‘독수리군기의 배포(La Distribution des Aigles)’(1810, 유화, 610x970cm)도 베르사유에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한 나폴레옹(Bonaparte visitant les pestiferes de Jaffa)’(1804, 유화, 523x715cm)과 1807년 2월 9일 리투아니아의 아일라우 전투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을 제압했던 나폴레옹 군의 전과를 기리기 위해 정부의 주문으로 그려진 ‘아일라우 전투의 나폴레옹(Napoléon Ier sur le champ de bataille d’Eylau)’(1807, 유화, 521×784㎝)도 있다. 다비드의 애제자 앙투안 장 그로(1771~1835)가 종군 화가로 참여하면서 그린 이 작품들은 나폴레옹의 전과와 용맹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원정 당시 시리아에서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이 수용된 자파의 병원에서 나폴레옹은 군의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을 돌보는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1807년 2월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프로이센 동맹군이 아일라우에서 전투를 벌였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처음으로 고전한 전투인데 나폴레옹 기병대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겼다. 장 그로의 ‘아일라우의 나폴레옹’(1807, 유화, 104.9X145.1cm) 속 나폴레옹은 전투가 끝난 뒤 전선을 돌아보며 포로가 된 러시아 군인들을 잘 돌보아주라고 명령해, 러시아 병사들마저 나폴레옹에게 경외감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군인 나폴레옹의 인간적인 면모를 은연중 드러낸 것이다. 또 조각상으로 표현된 나폴레옹은 로마 황제의 복식과 자세를 취하면서 황제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그린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 유화, 261cm×221cm)이다. 이 작품은 총 5점이 제작되어 나폴레옹이 한니발과 샤를마뉴에 버금가는 전쟁영웅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알프스를 넘던 나폴레옹의 모습은 다비드의 것과 같은 제목의 들라로슈 작품처럼, 그의 애마 마렝고가 아닌 당나귀를 타고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 정준모(큐레이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PART4

프랑스가 나폴레옹을 기억하는 법
앵발리드에서의 전시·공연

프랑스는 올해 초부터 나폴레옹의 해를 기념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나폴레옹이 복원한 노예제도를 문제 삼은 이들과 오늘날 프랑스 기초를 마련했다는 이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논란 끝에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지난 5월 앵발리드(군사 박물관)에 안치된 그의 무덤 앞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앵발리드는 그랑 팔레와 라 빌레트 전시관과 협력해 대규모 나폴레옹 전시를 기획하는 한편, 관련 공연들도 풍성히 준비 중이다. 나폴레옹이 남긴 삶의 유산은 비록 그가 유럽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한 인물임에도 정치적, 문화·예술적 가치가 있다.

황제의 죽음으로 꾸민 전시
‘나폴레옹은 더 이상(Napoleon n’est plus)’을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3.31~9.19)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작품과 소품으로 꾸며졌다.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 크로키, 임종 모습을 그린 데셍 등을 전시한다.
드 로시(1788~1863)의 ‘무덤에서 나오는 나폴레옹’도 만날 수 있다. 머리에 올리브관을 쓰고 손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든 채 무덤 문을 열고 나오는 나폴레옹을 그린 이 작품은 그의 불멸을 예수의 부활에 빗대어 그린 것이다.
프랑스 백성들의 곁에서 안식을 찾고 싶다는 나폴레옹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생트 엘렌 섬에서 프랑스로 옮겨졌다. 이때 사용된 범선의 축약 모델과 나폴레옹 관을 봉할 때 사용한 5개의 열쇠가 담긴 상자도 전시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거의 썩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옮겨졌는데, 부패 방지를 위해 얼마나 철저히 관을 둘러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외 그와 관련된 소품들도 만날 수 있다. 그가 남긴 자필 유언장, 시계와 같은 개인 소장품, 나폴레옹의 상징이 된 각진 모자와 칼과 군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 앙코르!’를 제목으로 열린 또 다른 전시(5.7~2022.1.30)에서는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현대 작품들을 만난다. 마리나 아브라모빅(1946~), 얀 페이 밍(1960~) 등 29명 예술가의 32개의 작품이 소개된다. 그림·조각상·설치미술과 영상물로 가득한 이번 전시의 화제작은 나폴레옹 무덤 돔 천장에 설치된 파스칼 콘베르(1957~)의 작품 ‘모멘토 모리’이다.
‘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은 영국 국립 군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나폴레옹의 애마로 알려진 ‘마렝고’의 해골을 3D로 스캔 후 복원해 그의 무덤 위에 설치한 것이다. ‘마렝고’는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 묘사된 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앵발리드의 돔은 전시장이 아닌 경건한 무덤이라며 문제를 제기해 그의 작품은 2022년 2월 13일 철거될 예정이다.

황제를 추모하는 공연
나폴레옹을 추모하는 공연들도 풍성하다. 나폴레옹의 승전을 축하하는 공연(10.5·6/생루이 성당)에서는 제롬 트레유/파리 아카데미 심포니가 베를리오즈 편곡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선보인다. 그 외 나폴레옹이 가장 총애했다는 파이시엘로(1740~1816)의 대관식 미사 중 ‘글로리아’, 메율(1763~1817)의 ‘나폴레옹 군의 귀환을 축하하는 노래’,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루이 비에른(1870~1937)의 ‘나폴레옹 100주년에 부친 승리의 행진’ 등을 연주한다. 한국계 독일 오르가니스트 사라 김이 함께한다.
‘나폴레옹과 프로메테우스’를 제목으로 한 공연(10.19/생루이 성당)에서는 세바스티앵 빌야르/프랑스 공화국 방위군악대가 베토벤의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7번 D729를 연주한다. 여기서 프로메테우스는 나폴레옹을 지칭한다.
‘나폴레옹 예찬’을 제목으로 한 공연(12.2/생루이 성당)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가장 많은 작품을 헌정한 작곡가로 알려진 메율과 황비 조제핀의 사랑을 받으며 나폴레옹에게 작품을 위촉받은 가스파레 스폰티니(1774~1851)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글 배윤미(프랑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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