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경계에 관하여 배우 김신록
무대와 방송, 이분법의 시공간에서 벗어나기
언젠가의 기억부터 꺼내본다.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한 연극배우를 마주했다. 아, 그냥 배우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다. 반가운 마음에 같이 보던 지인에게 “저 배우 되게 유명해”라고 말했다. “오, 이제 TV에 나왔으니 유명해지겠네”라는 답을 들었다. 아니, 원래 유명했다니까? 맘에 들지 않아 눈을 흘겼지만, 무언가에 뿔난 건지 명확히 몰라서 그냥 입을 닫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당시 방송과 무대예술의 불편한 위계, 그 경계를 감지해 찝찝했던 것 같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이 변했다. 바야흐로 OTT 전쟁이 본격화되며 글로벌 OTT까지 한국 콘텐츠에 투자 의사를 밝혔다. 한 해마다 엄청난 숫자의 작품이 쏟아지며 개성 있는 배우를 발굴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가 됐다. 이 흐름을 타고 연극배우들이 대거 방송에 진출하고 있다. 일례로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로 데뷔해 10여 년간 무대 활동을 한 전미도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이외에도 여러 무대 출신 배우들이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배우 김신록(1981~)이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의 최대 수혜자로 이름을 올렸다. 나아가 ‘지옥’을 완성한 최고의 서포터라는 평을 받았다. 어디선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연기자로 치부하기엔 조금 아쉽다. 그는 내가 아는 배우 중, 가장 배우에 관한 연구를 촘촘히 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여러 연극 무대에서 입지를 다졌다. 지금은 대학로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인 연극 ‘마우스피스’에 출연 중이다. 아울러 쿠팡플레이 시리즈 ‘어느 날’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시 한번 안방극장을 사로잡고 있다. 배우가 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신록.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한 인터뷰에서 “직업 배우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39세에 시작하게 된 거다”라고 밝혔는데, 이 말에 오해가 있다고. 오랜 시간 강의와 (무대) 현장을 병행해 왔다. 39세에 강의를 접고 현장에서 연기만 하는 삶으로 전환했다는 이야기가 마치 그때 현장에 처음 나온 것처럼 와전이 된 것 같다. 나는 2004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연극 ‘서바이벌 캘린더’로 대학로에 데뷔했다. 긴 시간 동안 연극 공부를 이어왔다. 사실 연극이라는 분야는 어쩌면 실제 무대(연기) 경험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나. 학부에서 전공하지 못한 연극과 연기를 배우기 위해 긴 시간 대학원을 다녔다. 앞서 말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도 계속 무대와 학업을 병행했다. 현장의 경험이 학업에, 학업이 현장의 경험에 상호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배우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이전부터 ‘배우’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예컨대 서울문화재단 웹진 ‘연극in’에서는 ‘배우가 만난 배우’,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서는 ‘연기비평 시리즈’를 연재했다. 여러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고(배우가 만난 배우), 여러 배우의 연기를 리뷰하며(연기비평 시리즈) 연극에 관한 사유가 더 깊어졌을 것 같은데. 평론가가 연출가의 의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도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연기라는 것이 천재의 영역, 낭만의 영역, 끼의 영역을 넘어, 소통과 탐구,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영역으로 확장되기를 바랐다. 두 시리즈를 연재하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말로도 연기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 대화들을 통해 어떤 반짝이는 영감의 조각들을 주워 모았을 뿐.
‘연기비평 시리즈’를 진행하며 “배우의 연기 또한 비평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배우의 연기를 평할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사실 이 시리즈는 몇 편 쓰지 못했다. ‘그 배우의 연기가 빛났다’ ‘눈부셨다’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등의 감상이 아닌 다른 언어를 찾는 것, 평가가 아닌 비평을 하는 것은 단순히 몇몇 연기론을 알고 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지점이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배우 김신록’이 깊게 각인된 작품은 연극 ‘비평가’(연출 이영석·극작 후안 마요르가)의 스카르파 역이었다. ‘연극배우 김신록’을 정의할 때 가장 꼭 언급하고 싶은 출연작을 꼽는다면. 가장 큰 터닝포인트는 ‘비평가’였다. 2018년과 2019년, 이 작품은 두 해에 걸쳐 배우로서 나를 성장시켰고, 관객이라는 실체를 연극의 살아있는 구성요소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연극이라는 매체에 대한 지금 나의 이해, 관심, 애정, 고민 등은 ‘비평가’에 빚진 바가 크다.
지금 한창 공연 중인 ‘마우스피스’(연출 부새롬·극작 키이란 헐리)는 어떠한 인연으로 작품을 만난 건가. 연극열전에서 제안이 와서 수락하게 됐다. 연극열전에서 올렸던 지난 작품들에 대한 믿음과 ‘마우스피스’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 동시에 작용했다.
‘마우스피스’에서는 극작가 리비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비평가’와 비슷한 지점이 많다. 2인극이며 역할의 직업이 극작가라는 점이 동일하다. 연극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얘기한다는 공통점도 있고. 그러나 두 캐릭터의 성향은 매우 다르다. 이미 스카르파 역에 깊게 몰두한 경험이 있는데, 리비 역을 처음 마주했을 때 당혹스럽진 않았는지. 리비와 스카르파 두 사람 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길 만한, 그러나 동시에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는 동일하다. 이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운 과제인가. 둘 다 절치부심 끝에 최선의 답을 들고 나타나지만 결국 극 말미에는 또다시 무너진 세계 앞에 선다. 그러나 펜을 놓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두 사람 다 예술가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우스피스’의 경우 두 사람이 만나고 가까워지고 파국을 맞는 전통적인 드라마 서사가 꽤 길게 펼쳐진다. 반면에 ‘비평가’는 말 그대로 논쟁극이다.
언젠간 경계가 무너져, 메타버스까지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지옥’(감독 연상호·극본 최규석)으로 일반 대중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연상호 감독과는 드라마 ‘방법’(감독 김용완·극본 연상호)에서 처음 만났다. 연상호 감독이 “김용완 감독의 안목을 믿고 캐스팅에 응했는데 실제 연기를 보고 많이 놀랐다”고 하더라. 예전에 비해 방송에서도 개성 강한 배우를 발굴하는 것이 중요해진 듯하다. 동의한다. OTT 플랫폼이 늘어나고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양적으로 더 많은 배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새로운 플랫폼에 맞는 새로운 얼굴, 새로운 시도에 맞는 실력 있는 배우를 발굴하려는 의지가 많아진 느낌이다.
‘무대 출신 배우’가 연기자로서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캐릭터 해석’이나 ‘연기 발성’이 특히 장기라는 생각이 들던데. 아무래도 연극은 한숨에 읽힐 수 있는 정도의, 2~3시간 내외의 텍스트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을 주로 하다 보면, 드라마투르그처럼 작품을 분석하는 훈련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현재 ‘연극’과 ‘영상’의 출연 비율을 어떻게 두고 작품 활동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일정이나 여러 조건을 조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작품이 있으면 병행하고 싶다. 지금도 연극 ‘마우스피스’와 몇몇 매체 촬영을 병행하는 중이다. ‘마우스피스’가 재연에 트리플 캐스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양쪽 작업 모두에서 시너지를 얻고 있다.
결국은 ‘무대/방송’을 넘나들 수 있는 안정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겠다. 반대로 방송 배우들도 이제는 자주 연극 무대에서 서기도 하니까. 아주 금방, 배우들이 영화·드라마뿐만 아니라 여러 숏폼 콘텐츠, 심지어 메타버스까지, 여러 매체와 무대를 넘나드는 시대가 올 것 같다. 이런 흐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도 금방 따라올 것이라고 본다.
연극이나, 영상 대본을 받을 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어려운 질문이다. 연극에서는 주제나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는가, 인물의 말을 나의 말로서 발화할 힘이 있는가, 연기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등 어느 정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솔직하게, 영상 쪽 작품은 대본도 열심히 보고 제안이 온 인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만, 감독·작가·제작사·방송사·캐스팅 등 프로덕션의 구성에도 신경을 쓰는 단계다. 영상 경력이 아직 너무 짧으니, 더 시간을 들여 여러 작품을 하다 보면 작품을 선택할 때 더 ‘나다운 기준’이 생기지 않을까 한다.
코로나 여파로 연극도 영상매체와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비단 연극계에만 필요한 환경은 아닌 것 같다. ‘순수 대 상업’ ‘예술 대 비즈니스’ ‘영혼 대 돈’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무화되기를 바란다. 그 무화된 사고를 바탕으로 규정할 수 없는 범주에 걸쳐있는 작품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사 하나를 꼽아준다면. ‘마우스피스’의 대사다. “암전.”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연극열전·극단 신작로
연극 ‘마우스피스’
2021년 11월 12일~2022년 1월 30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키이란 헐리(극작)/유은주(번역)/부새롬(연출)/김신록·김여진·유선·전성우·장률·이휘종(출연)
한때 주목받는 예술가였지만 긴 슬럼프에 빠진 중년의 작가와 재능을 가졌지만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이를 펼치지 못한 소년의 만남을 그린 연극이다. 작가 리비는 소년 데클란의 그림을 통해 영감을 얻고, 데클란은 리비를 통해 예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예술적으로 교감하던 두 인물의 관계는 ‘데클란의 삶’이 ‘리비의 희곡’으로 쓰이면서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닫는다. 예술을 통해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고자 하는 리비와 가정과 사회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데클란의 만남은 사회적·경제적 차이로 발생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격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과정을 통해 과연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예술을 다룰 권리는 누구에게 있으며, 그 권리는 누가 부여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으로 관객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