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칸 영화제, 3년 만에 돌아온 영화의 전당 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7월 4일 9:00 오후

WORLD HOT_ FRANCE
전 세계 화제 공연 리뷰 & 예술가

파리 오페라 ‘파르지팔’ 5.24~6.12
종교의 폭력적인 민낯
도그마에 빠진 종교를 비판하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밀도있게 풀어내다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이 영국 연출가 리처드 존스(1953~)의 연출, 시몬 영(1961~)의 지휘로 바스티유 오페라에 올랐다. 구르네만츠 역을 맡은 베이스 연광철(1965~)의 활약이 돋보인 공연이었다.
바그너의 유언장과 같은 ‘파르지팔’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Parzival)을 바탕으로 한다. 파르지팔은 중세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서왕이 성배를 찾기 위해 보낸 기사다. 작품은 도그마에 집착하는 종교를 꼬집는데, 이러한 바그너의 생각은 1848년 쓰인 그의 ‘종교와 예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리처드 존스는 “예식에 복종하는 단체가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지” 파헤치기 위한 무대를 구상했다. 대본에는 성배를 지키는 기사들이 거주하는 몬살바트 사원이 장소적 배경으로 설정된다. 이번 바스티유 오페라 무대는 종교적 상징이 철저히 배제된 현대로 꾸며졌다. 성배와 성찬, 예식에 복종하는 한 단체가 그 중심에 있다.
단체 일원들은 단출한 회색 체육복 차림이다. 주방 벽에는 단체 창립자의 초상이 걸려 있다. 서재에는 여러 언어로 된 책이 꽂혀 있다. ‘Wort’ 혹은 ‘Word’. ‘단어’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이다. 지식을 담은 일종의 성경으로,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 책을 읽는다.
그 사이로 푸른색 체육복 차림의 관리자가 등장한다. 구르네만츠(베이스 연광철)다. 일원들을 새벽까지 졸지 말라고 깨우며 암포르타스(바리톤 브라이언 멀리건)의 목욕을 준비시킨다. 바닥에서 천대와 조롱을 받는 쿤드리(메조소프라노 마리나 프루덴스카야)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암포르타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랍에서 왔다는 약을 선사한다. 암포르타스는 허리에 입은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다.
이어서 무대가 수평으로 이동한다. 옴니버스 구성처럼 여러 세트가 하나로 연결된 콘셉트다. 주방 옆으로 암포르타스의 방이 있다. 시종들은 피로 물든 그의 침대를 청소하고, 병환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 티투렐은 윗방 침대에 누워 있다. 그 옆방에는 성배가 간직되고 있고, 또 그 옆으로는 성배 예식이 거행되는 교회가 자리한다.
구르네만츠는 쿤드리에게 길고 긴 전설을 들려준다. 클링조르가 성창으로 암포르타스를 찔러 상처 입힌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청중의 큰 관심을 얻지는 못하지만 극 전개에 있어 중요하다. 무대 연출과 천사, 갑옷 입은 기사 등의 시각 효과를 더해 청중이 신화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한 프로덕션들도 있으나, 이번 연출에는 이런 바그너적 이미지가 전무했다. ‘오페라로 가장한 오라토리오’라는 평을 얻은 배경이기도 하다.
청중은 이 전설을 따뜻하고 포근한 음색으로 노래한 연광철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많은 파리지앵이 기침하던 날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객석에 침묵이 흘렀다. 특히, 3막에 이르기까지 점차 노화되는 목소리를 표현한 데서 연광철의 역량이 빛을 발했다. 시몬 영은 극적이기보다는 은밀한 뉘앙스에 집중해 분위기를 뒷받침했다. 공연 후 만난 연광철은 “이 작품은 다른 바그너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격정적인 감정 변화나 영웅적 요소가 옅다. 특히 구르네만츠가 성배에 관한 전설을 풀어갈 때는 바그너 작품에 기대되는 거대한 음향은 극도로 절제된다”고 설명했다.

고통을 잠재울 영웅의 등장
무대는 곧 파르지팔(테너 시몬 오닐) 때문에 소란스러워진다. 티셔츠, 짧은 바지 차림의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철없는 개구쟁이에 가까워 보인다. 시몬 오닐은 비음이 강한 고음으로 캐릭터를 확실히 했다. 구르네만츠는 파르지팔이 과연 성창을 찾아줄 영웅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그에게 성창과 성배가 보관되는 장소를 보여준다. 성배는 있지만, 성창 자리는 비어 있다.
파르지팔 앞에서 예식 의복과 관을 두르고, 무거운 성배를 든 암포르타스는 억지로 예식장으로 끌려간다. 성배를 지키는 것은 그의 의무다. 그러나 매번 예식을 치르고 나면 암포르타스는 허리의 상처가 터져 고통에 시달린다. 그는 단체를 향해 “죽게 내버려 달라”고 호소하지만 매해 수난의 금요일이 되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거듭한다. 브라이언 멀리건의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고음은 그 고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다른 프로덕션들과의 차이가 암포르타스의 비중에서 두드러진다. 암포르타스의 상처는 성배 예식 속에 희석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 프로덕션은 그의 고통이 핵심이었다.
2막, 사악한 유전과학자로 재설정된 클링조르(베이스바리톤 팔크 슈트룩만)는 파르지팔을 죽이려 성창을 들지만 파르지팔은 단번에 그 창을 빼앗는다. 클링조르는 파르지팔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3막은 다시 몬살바트 사원, 어느 금요일이다. 1막과는 다른 분위기다. 세월이 한참 흘렀고, 경건함과 질서에 복종하던 단체 일원들의 태도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분노에 차 서로 싸우기도 한다. 서재의 책들도 많이 줄었다. 백발이 된 구르네만츠는 멀끔한 정장 차림이다. 이어 검은 군복을 입은 외부인이 등장한다. 성숙한 어른이 된 파르지팔이다. 그는 구르네만츠에게 클링조르를 죽인 후 숲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이제야 도착했다며 그간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쿤드리는 황금 동상 아래 분수에서 파르지팔의 발을 세척하고, 자기 머리로 물기를 닦는다.
이날은 또 한 번 성찬 예식이 치러지는 날이자, 영웅 티투렐의 장례식 날이다. 방문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예식을 거부하는 암포르타스는 급기야 티투렐의 관을 열어버리는 신성 모독죄를 저지른다. 그리고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다. 단체는 그에게 의무만을 강요하며 폭력적으로 그를 밀어뜨린다.
절망과 폭력 가운데 등장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의 상처에 성창을 댄다. 고통은 사라지고, 성창은 성배와 합일한다. 기적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예식 의복을 벗으며 하나둘 무대를 떠난다. 쿤드리는 파르지팔과 손을 잡고 나가고, 구르네만츠 역시 이곳을 떠난다. 홀로 남은 암포르타스는 길고 긴 휴식을 맞는다.
밀도 있는 화성과 수려한 선율에 중점을 둔 시몬 영의 지휘는 단 한 번도 성악진의 역량에 그늘을 드리운 적이 없다. 금관은 대부분 무대 뒤에서 연주했고, 합창단 일부도 오페라 발코니에서 노래하는 등 음향 조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부활의 종소리가 만개할 때는 공연장이 떠나갈 만큼 엄청난 포르테시모를 연출했다. 이렇게 ‘파르지팔’이라는 거대한 미사는 막을 내렸다.

글 배윤미(프랑스 통신원) 사진 파리 오페라

 

 

INTERVIEW
베이스 연광철
파리 오페라에서는 주로 이탈리아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공연에 부담은 없었는지? 백 번 넘게 노래한 역할이지만, 극 전개상 비중이 크고 파리 오페라 무대가 결코 작지 않아서 딕션에 더 집중했다. 연기자로서는 키가 작은 신체적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특히 1막에서 사람들을 통솔하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연기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비롯한 세계적 무대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수없이 경험했다. 타고난 바그너리안 지휘자가 있다고 보나? 바그너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많은 경험을 통해서만 쌓인다. 처음 바그너를 지휘하는 이들에게는 오류가 많을 수 있다. 템포부터 시작해서 오케스트라와 성악가가 어느 순간에 숨을 쉬어야 하는지, 투티의 음량이 성악가를 얼마나 보조하거나 혹은 방해하는지 등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수다. 바그너가 의도한 음향을 가늠해보려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직접 체험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크리스티안 틸레만 등이 가장 바그너리안다운 지휘자라고 본다.
여러 무대 중 만족하지 않은 프로덕션은 무엇이었나? ‘파르지팔’ 중에서는 이탈리아 토리노 공연을 꼽고 싶다. 연출가가 독일어도, 음악도 몰랐고 별로 아이디어가 없었다. 시각 요소만 고려해 연출을 했다. 프로덕션을 이끄는 연출가가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결국 구성원들이 각기 자기 작품을 하게 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식이었다. 연출의 역할보다 성악가들의 자의가 중요히 여겨졌다. 지금은 관객에게 더욱 확실히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연출 구상에 더욱 힘이 실린다. 이에 따라 성악가에게 요구되는 집중도도 높아졌고. 때때로 성악가를 소도구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풀어야 할 난제다.
바그너에게 예술이 먼저였나, 종교가 먼저였나? 예술이다. 성창과 성배가 등장하지만 예수는 언급이 없다. 극 중 쿤드리 또한 환생하지 않나. 바그너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를 고려하건대 이 작품이 단순히 종교, 특히 기독교를 부각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WORLD HOT_ FRANCE
전 세계 화제 공연 리뷰 & 예술가

제75회 칸 영화제 5.17~28
3년 만에 돌아온
영화의 전당
‘객석’ 통신원이 현장에서 직접 살펴본 12일의 축제 기록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 © CJ ENM

5월 17일, 제75회 칸 영화제 개막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3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은 칸 영화제를 축복이라도 하듯. 쨍한 해 아래 바람이 시원했다. 하늘과 바다는 올해 포스터인 영화 ‘트루먼쇼’(1998) 엔딩 장면처럼 푸르렀고, 칸을 찾은 영화인들은 자유를 찾아 계단을 오르는 트루먼(짐 캐리 분)의 모습처럼, 되찾은 자유 속에 팔레 드 페스티벌의 레드카펫을 올랐다.
올해 칸 영화제는 5월 17~28일 12일간 열렸다. 경쟁 부문 21편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 20편, 감독 주간 21편, 비평가 주간 11편 등을 포함한 150편 이상의 영화들이 쉴 틈 없이 상영됐다. 사이사이 하비에르 바르뎀 등 배우와 만남, 작곡가 가브리엘 야레드의 음악 수업, 각종 영화 포럼과 심포지엄, 75주년 기념행사 등이 열렸으며, 칸의 상징인 크루아제트 해변에서는 매일 밤 ‘해변극장’으로 여름 무드를 돋우었다. 방문객 추산은 20만 명에 이른다.

큰 충격이나 호불호 없던 경쟁 부문
올 경쟁 부문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보다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들이 고루 포진된 해였다. 아시아권에서는 한국이 두 작품(‘헤어질 결심’ ‘브로커’)이 오르며 달라진 한국영화의 위상을 실감했다. 두 작품의 투자배급사인 CJ ENM의 치밀한 전력 분석과 과감한 홍보 투자도 눈에 띄었다.(CJ ENM은 2019년 ‘기생충’을 비롯해 지금까지 12편의 작품을 칸에 진출시켰다.) 한국 외에는 각 3편씩 진출한 벨기에와 북유럽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이민 문제와 인종·국적의 무경계성은 끊임없이 영화의 중심 소재로 파고들었다. 이란계 덴마크인 알리 아바시의 ‘성스러운 거미’, 스웨덴 이민 2세대 타릭 살레의 ‘천국에서 온 소년’은 우리가 떠올릴 ‘북풍’과는 거리가 먼 현재의 관점을 제시했다. 벨기에로 넘어온 난민 이야기인 다르덴 형제의 ‘토리와 로키타’, 코트디부아르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가족의 여정을 그린 레오노르 세라유의 ‘어머니와 아들’, 루마니아 시골의 스리랑카 노동자 차별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R.M.N’ 등, 영화는 현시대 어디서 어떤 충돌이 일어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충돌이 있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황금종려상은 루벤 외스틀룬드 ‘슬픔의 삼각형’에게 돌아갔다. 돈과 외모에 집착하는 현대의 소비주의 사회를 고발하는 풍자 영화로, 인플루언서 커플과 자본주의 러시아 부호, 마르크스주의 미국인 선장 등이 탄 호화 크루즈가 좌초된 뒤 생존 능력에 따라 계급이 역전되는 이야기다. 호화로운 크루즈에 역한 구토와 배설이 난무하고, 가장 낮은 위치의 화장실 청소부가 섬의 독재자가 되는 극단적인 설정을 거부감 없이 엮었다. 인간 본성을 직설적으로 희화화한 외스틀룬드의 위트는 마치 오페라 세리아가 범람하던 가운데 빛난 베르디 ‘팔스타프’를 연상시켰다.

영화는 ‘보는’ 만큼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음악 애호가들에게 칸 영화제는 음악상 수여가 없어 예측의 재미는 덜하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곳곳에 즐길 거리들이 있다. 경쟁 부문 영화의 음악에서는, 당나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이랴’의, 가장 미약한 존재에 가장 우주적인 음악을 병치한 감각이 놀라웠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제임스 그레이 ‘아마겟돈 타임’의 회상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나 아르노 데스플레생 ‘형제자매’의 위태로운 피아니즘에 매료될 만했다. 비경쟁 부문에는 무려 3편의 음악 영화가 상영됐다. ‘물랑루즈’로 잘 알려진 바즈 루어만의 ‘엘비스’, 피아노 스타일 로큰롤의 대명사 ‘제리 리 루이스’의 자취를 좇은 이선 코엔의 동명 다큐멘터리, 데이비드 보위를 다룬 영화이자 현지의 열렬한 호평을 받은 ‘문에이지 데이드림’이다.
24일에는 작곡가 가브리엘 야레드의 음악 수업이 있었다. 그의 전설적인 영화음악 경력 50년을 축하하며, 오스카 상을 안긴 ‘잉글리시 페이션트’부터 올해 감독 주간에 초청된 ‘스칼렛’까지, 클래식 음악에 바탕한 그의 작업들을 돌아봤다. 대위법을 통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 ‘리플리’의 도입부, 미니멀리즘 음악을 요구한 자비에 돌란 감독에게 “세상에서 가장 미니멀한 음악은 바흐”라며 결국 바흐풍 음악으로 선회시킨 ‘단지 세상의 끝’ 엔딩 장면, 올해 칸 영화들 중 가장 고전적으로 아름다웠던 ‘스칼렛’의 음악 작업 과정 등,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들이었다.
앞선 22일 저녁 레드 카펫에는 야레드를 비롯해 ‘클로즈’의 발랑탱 아자즈, 개막작 ‘파이널 컷’의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등 영화음악 작곡가 30명이 함께 계단을 오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아자즈는 “영화는 현대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라며 “칸에 영화음악상이 없는 것은 오래전부터 논쟁거리다. 음악상을 제정한다면 또한 다른 분야에도 상을 제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번번이 옆으로 제쳐지는 작곡가들의 공로는 분명히 조명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브로커’ 레드카펫 현장(26일). 좌로부터 송강호·고레에다 히로카즈·이지은(아이유)·이주영·강동원 © CJ ENM

아내의 눈으로 보는 차이콥스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여러모로 이슈였다. 첫째, 러시아 작품인 것.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공개적으로 반전을 지지하는 감독의 작품이자 전쟁 전에 제작을 끝났기에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둘째, 키릴의 가택 연금이 올해 해제되어, 6년 만에 칸에 돌아온 것. 모스크바 고골 센터의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는 유럽 연극, 오페라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가진 연출가다. 2017년 푸틴은 그를 가택연금시켰다. 표면적 죄목은 고골 센터의 공금 횡령이지만, 실상은 영화 ‘스튜던트'(2016)에서 러시아 정교와 기성 체제를 비판한 이유로 푸틴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 중론이다. 때문에 전작 ‘레토'(2018) ‘페트로프의 플루'(2021)가 칸 경쟁 부문에 초청됐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레토’의 주연 유태오는 항의의 표시로 그의 이름이 적힌 패널을 들고 레드카펫을 올랐다. 키릴은 연금 동안 두 편의 영화를 감독하고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나부코’, 빈 슈타츠오퍼의 ‘파르지팔’ 등을 원격으로 연출했다. 올 초 구금은 해제됐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최초 상영일인 18일 3시 뤼미에르 대극장, 키릴 팀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장했다.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광적인 팬이었던 아내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시선으로, 또 그녀의 비참한 결혼 생활을 통해 차이콥스키의 삶을 들여다본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음악가에 관한 영화지만 오로지 음악에 대한 영화는 아니”라고 했던 키릴의 말처럼, 우리가 ‘차이콥스키’하면 떠올릴 발레 음악이나 교향곡들은 들어가 있지 않다. 안토니나의 사랑을 표현하는 피아노 소품들이 드문드문 연주될 뿐이다. 키릴은 영화를 통해 차이콥스키 천재성의 핵심에는 타고난 재능, 실패한 결혼(아내에 대한 혐오), 성적 취향, 그로 인한 삶의 비극들이 모두 동등한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고고히 헤엄치는 백조 같은 차이콥스키의 음악만을 들어온 우리에게,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그 아래 험한 갈퀴질을 보여준 것이었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아내의 광적인 사랑은 오래된 건물과 도구들의 생생한 효과음, 러시아 정교와 아내의 기복 신앙들, 남성 중심 사회의 고압적 태도 등 19세기 러시아 생활상의 충실한 묘사에 둘러싸여 더욱 증폭되며, 차이콥스키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시간순으로 흘러가는 아내의 이야기를 담기에 2시간 30분 러닝 타임은 긴 감이 없지 않았다. 상영이 끝난 뒤 키릴은 러시아어로 “전쟁을 반대한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다음날 저녁 한 여성이 레드카펫 위에서 갑자기 드레스를 벗고 “우크라이나를 강간하는 것을 멈추라”고 쓴 나체를 드러내며 시위를 벌였다.
기자회견에서 ‘차이콥스키의 아내’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러시아 문화 보이콧에 대해 아주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러시아 보이콧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들에겐 러시아어가 들린다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를 전면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공기고, 물이고, 구름 같은 것이다. 국적과 무관한 독립적인 요소다. 러시아 예술에 대한 보이콧은 때로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러시아 예술은 언제나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가치, 인간애를 상정하며 약자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다. 우리에게 도스토옙스키, 체홉,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음악과 연극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다. 러시아 예술은 언제나 반전을 말한다. 문화예술계는, 전쟁으로부터 이러한 인간적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완벽한 미장센의 표본 ‘헤어질 결심’
23일 상영된 ‘헤어질 결심’은 완벽하게 조직된, 아름다운 미장센의 표본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스웨덴의 범죄 소설에서 본 배려심 있고 예의도 갖춘 형사”와 “한국가요 ‘안개’를 사용하는 로맨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합쳐져 ‘헤어질 결심’이 탄생했고 밝혔다. 정훈희의 ‘안개’(1967)는 어두운 도시 이포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희뿌옇게 감싼다. 그 모호성은 컬러와 음악에도 녹아있다. 녹색인 듯 파란색인 듯 보이는 청록색은 해준(박해일 분) 집의 벽지와 서래(탕웨이 분)의 옷, 절의 단청 등에서 끊임없이 눈을 시험한다. 깊지 않게 겹쳐진 현악의 레이어들은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며, 스타카토와 도약들은 가벼우면서도 미스터리하게 안갯속을 뚫고 나올 듯, 고개를 들고 튀어 오를 듯 넘나든다. 음악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조영욱 음악감독이 맡았다.
‘올드보이’ 속 비발디 ‘사계’와 ‘친절한 금자씨’의 비발디 칸타타 등 클래식 음악으로 특정 장면을 강렬하게 각인시켜온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도 그에 필적할 장면을 만들어냈다. 말러 교향곡 5번과 연결한 등산 장면이다. 등산을 즐기는 서래의 전 남편은, 산을 오르며 “말러 5번을 틀고 시작하면 4악장 끝날 때쯤 도착하고, 정상에서 5악장을 듣고 하산하면 완벽하다”고 말한다. 산의 높이는 계단 층수로, 산행 시간은 음악의 길이로 치환해 ‘등산’이라는 막연한 행위가 단번에 체감되게끔 치밀히 짜 맞추었다.(이는 해준이 사건의 전말을 깨닫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연 안개 아래 모호한 척 빽빽이 설계한 작품의 밀도는 직접 극장에서 감상하며 느껴보시길.

말러 5번을 택한 이유를 물은 필자의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사실 말러 교향곡 5번은 쓰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도망 다녔다. 설정 상 서래의 남편이 고전 음악 애호가인데, 그가 등산을 하면서 들을 만한 곡이 무엇일까, 또 등산 시간과, 편집과 어울리는 무드는 무엇일까. 모두를 고려했을 때 아무리 도망쳐도 다시 말러 5번으로 돌아오게 되더라. 사실 4악장 아다지오는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너무 완벽하게 사용됐기 때문에, 그걸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졌다’ 생각하고 말러로 돌아왔다. ‘말러 5번 4악장은 비스콘티만 쓰란 법 있나?’(웃음) 생각하면서”라고 답했다.

글 전윤혜(프랑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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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화제 공연 리뷰 & 예술가

로마 오페라 ‘에르나니’ 6.3 & 볼로냐 극장 ‘루이자 밀러’ 6.5
베르디의 도전작을 만나다
자주 공연되지 않는 베르디의 두 작품을 실연으로 만난 순간

 

로마 오페라 ‘에르나니’

오페라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이라도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리골레토’ 속 ‘여자의 마음’이나,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의 멜로디는 흥얼거릴 수 있을 것이다. 베르디가 오페라 역사상 가장 높은 대중성을 획득한 작곡가라는 데 이견이 있을까. 하지만 그가 ‘리골레토’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기 전에 15편이나 되는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매번 새로운 시도에 과감하게 도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자주 공연되지 않는 오페라 두 편이 이탈리아에서 공연되어 큰 화제가 됐다.

획기적인 작품과 보수적인 연출의 ‘에르나니’
베르디의 다섯 번째 오페라 ‘에르나니’는 1844년 초연됐다. ‘나부코’ ‘롬바르디아인’ 등 종교적 소재와 애국심을 결합한 오페라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30세의 베르디가 처음으로 도전한 낭만적인 오페라이기도 하다. 30분에 달하는 3중창으로 피날레를 맞거나, 합창단의 비중을 확대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도전이 시도되었다. 또한 ‘에르나니’는 훗날 ‘베르디 테너’라고 불리는 특징적인 음색과 아리아를 가진 캐릭터의 첫 번째 등장이었다.
사실, 음악보다 더 급진적이었던 것은 원작 그 자체다. 원작은 젊은 빅토르 위고(1802~1885)가 1830년에 쓴 ‘에르나니(Hernani)’로, 작품은 당시 프랑스에서 ‘에르나니 전투’라고 불릴 정도로 고전파와 낭만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위고는 고전주의 연극이 관객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낭만주의자들의 선봉에 섰고, 그 결과물이 이 ‘에르나니’였다.
오페라는 1519년의 스페인 배경이다. 귀족의 혈통이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산적이 된 에르나니와 정략결혼을 앞둔 엘비라의 로맨스 외에도 조카인 엘비라를 노리는 실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카를 5세를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반란을 도모한다는 소재는 당시 민감한 이탈리아 정치 상황에 살벌한 검열의 이유였지만, 결국 이 작품은 19세기 내내 유럽에서 큰 사랑을 받았고 작곡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2022년에 로마에서 올려진 ‘에르나니’는 2013년에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고 우고 데 아나가 연출과 의상, 무대를 맡았던 프로덕션을 수정한 버전이다. 이탈리아 레퍼토리로 이름난 지휘자 마르코 아르밀리아토가 이 작품으로 로마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박진감 넘치는 템포와 역동성을 보여준 아르밀리아토는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호흡으로 베르디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무대 위의 가수들과 합창단에게도 그의 영향력이 구석구석 미쳤는지는 의문이었다.
엘비라 역을 노래한 미국 소프라노 안젤라 미드(1977~)는 2008년 동 역할로 뉴욕 메트에 데뷔한 바 있다. ‘안나 볼레나’와 ‘노르마’를 부르다가 최근에는 ‘아이다’까지 레퍼토리를 확장한 그녀는 엘비라를 부르기에는 중저음 쪽에 무게 중심이 과하게 치우치고, 날렵함은 부족했다. 에르나니 역을 부른 테너 프란체스코 멜리(1980~)는 베르디 레퍼토리에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수답게 관객의 큰 호응을 받았다.
반면 카를 5세 역을 맡은 바리톤 뤼도비크 루도빅 테지에(1968~)는 3막에서 아리아 ‘오, 내 젊음의 꿈과 속임수’를 부르고 나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정도로 이날 빛나는 별이었다. 그 역시 이번이 로마 오페라 데뷔였는데, “아름답게 빛나는 음색과 탁월한 딕션으로 이상적인 베르디 바리톤을 보여주었다”(죠르날레 델라 무지카) 등 호평이 이어졌다.
한편, 보수적인 로마 오페라 분위기와 2013년에 선보인 프로덕션임을 감안하더라도 연출은 지나치게 단조로웠다. 고전적인 틀에서 철저하게 수행되는 그의 연출은 ‘예술의 진화’라는 물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의 수호’를 외치는 뚝심의 수문장을 보는 듯했다. 커튼콜에서 일부 관객은 연출자에게 야유를 보냈고, 언론도 “무대는 화려하지만, 연출가의 아이디어는 빈약했다”(죠르날레 델라 무지카)라고 평했지만, 대부분의 로마 관객은 개의치 않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볼로냐 극장 ‘루이자 밀러’ ©Andrea-Ranzi

엇갈린 반응의 ‘루이자 밀러’
베르디는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의 희곡을 네 번이나 오페라로 작곡했다. 가장 유명한 오페라는 ‘돈 카를로’(1876)지만 1849년에 작곡된 ‘루이자 밀러’도 최근에 그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실러가 쓴 ‘간계와 사랑’(1784)이 원작이다. 이 실러의 희곡도 ‘에르나니’만큼이나 새로운 시대를 불러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청년 실러가 이 희곡의 부제를 다름 아닌 ‘시민 비극’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남녀가 죽음으로서 끝을 맺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플롯이지만, 두 사람을 가로막는 것은 귀족 가문의 원한이 아닌,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신분이다. 시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소불위의 귀족 권력이 그들을 비극적인 최후로 몰아간다.
‘루이자 밀러’는 베르디 오페라 황금기로 가는 바로 직전 모퉁이 같은 작품이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주목할 점은 연출·무대·의상에 조명까지 맡은 마리오 난니였다. ‘빛의 마에스트로’라고 불리는 그답게 빛은 이 프로덕션에서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됐다. 마리오 난니에게는 첫 번째 오페라 연출이었다. 그는 연출가 노트를 통해 회화의 2차원적인 빛을 무대에 강렬하게 구현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언론의 평가는 엇갈렸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무대와 세련된 조명을 선보였으며 이전의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도발적인 연출로 논쟁의 대상이 된 것보다는 이 편이 낫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절대적인 공허함이 무대를 지배한다”는 상반된 비평을 받았다.
모든 언론과 관객의 찬사를 받은 이는 로돌포 역을 노래한 테너 그레고리 쿤데(1954~)였다. 심지어 그의 아리아가 끝나고 나서는 빈틈없이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를 카리스마 넘치게 장악하던 지휘자 다니엘 오렌마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올해 68세의 테너는 여전히 안정적이고 강력한 고음과, 확신에 찬 음악적 해석, 완벽한 조절 능력을 보여주었다. 반면 타이틀 롤을 맡아 노래한 미르토 파파타나시오우의 가창은 로마의 ‘에르나니’의 안젤라 미드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관록의 소프라노지만 이미 토스카라는 무거운 레퍼토리까지 악기를 확장한 가수가 부르기에 ‘루이자’ 역은 음역부터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그 외 모든 가수진과 합창단은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해냈다. 특히 밀러 역의 프랑코 바살로는 웅장하면서도 따뜻한 음성과 해석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바리톤 레온 킴(김한결)이 두 번째 공연에서 밀러 역을 맡아 호평받았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통신원) 사진 로마 오페라·볼로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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