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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화제 공연 리뷰 & 예술가
그랑주 드 멜레 페스티벌 6.17~26
무더위와 음악적 열기의 한판 대결
‘헛간’을 달군 열기 속에서도 음악과 피아니즘의 향연은 계속 됐다
58년 전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가 창설한 그랑주 드 멜레 페스티벌이 또 한 번 프랑스의 여름을 장식했다.
프랑스어로 ‘라 그랑주(La Grange)’는 ‘헛간’이라는 뜻으로, 축제는 과거 곡식을 저장하던 역사 유적지에서 열린다. 루아르강을 따라 이어지는 고성으로 유명한 도시 투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다. 축제를 앞두고 파리 거리 곳곳에도 홍보 포스터가 걸렸다. 덕분에 올해 그랑주 드 멜레 페스티벌은 많은 파리지앵으로 더욱 붐볐다.
시원한 음악을 위해 더위와 싸우다
축제 둘째 날인 18일은 더위가 절정을 이룬 날로, 최고 기온이 41도에 달했다. 게다가 공연이 진행된 헛간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에어컨 설치가 불가능하다. 후덥지근한 환경 때문에 명성 높은 피아노 조율사 드네스 드 윈터도 매 연주 전 더욱 공들이는 모습이었다.
하프시코디스트 장 롱도(1991~)를 중심으로 꾸려진 네버마인드 앙상블(플루트 안나 베송·바이올린 루이 크레아쉬·비올라 다 감바 로뱅 파로)이 오후 6시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이따금 서로를 향해 부채질해주면서도, C.P.E. 바흐의 플루트와 피아노 3중주를 위한 작품들 Wq93~95(H537~539)에서 놀라운 균형감을 보여주었다.
오후 9시, 알렉상드르 타로(1968~)는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에 아예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스카를라티 소나타 세 작품은 그를 향한 기대를 한껏 충족시켰다. 특히 K380에서 드러난 뛰어난 리듬감과, 멀리서 호른이 울리는 듯한 원근감, 감칠맛 나는 장식음 처리는 타로의 진면목이었다. K481은 멜랑콜리한 정서와 우아함이 묘하게 어우러지며 아름다움을 자아냈고, K514에서는 수려한 아르페지오의 기교를 자랑했다. 풍성한 페달링과 유난히 강조된 트릴 등은 음 사이 유기성에 대한 타로의 집착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종종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타로가 직접 편곡한 슈베르트의 ‘로자문데’와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 이어,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기민하고 섬세한 핑거링, 뉘앙스가 풍부한 다이내믹 등 타로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은밀하고 사적인 곡들이 모두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편곡된 것처럼 과도하게 넘쳐흘렀다. 곡의 긴장이 이완되지 않고 경직되기도 했다. 타로의 피아니즘은 수채화로 묘사되곤 하지만, 이날은 두꺼운 유채화였다.
다음날인 19일,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1961~)의 무대가 오전 11시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관객은 30여 분간 기다려야 했다. 폭염으로 손상된 피아노를 다시 조율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C.P.E. 바흐의 소나타 Wq62/12(H66)의 알망드 악장에선 유연성과 건실한 화성구조 사이 균형이, 사라반드 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리타르단도가 자아내는 사색적인 향수가 돋보였다.
아믈랭의 진가는 베토벤 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에서 터졌다. 강한 옥타브 타건과 얽히고설킨 대위법이 가득한 1악장에서 그는 풍성한 울림으로 그 에너지를 표현해냈다. 양손이 만들어내는 대조는 성부의 구조가 발전되는 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3악장(아다지오 소스테누토)은 말년 베토벤의 넋두리처럼 들렸다. 혼신을 다해 마지막 단어들을 뱉어내는 작곡가의 모습이 가슴을 찔렀다. 마지막 4악장(라르고)에서는 세상의 혼돈과 그에 맞선 투쟁이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불협화음이라고 할 만큼 각 성부는 다른 캐릭터와 색감을 지닌 채 거대한 무리를 이룬다. 작곡가이기도 한 아믈랭은 이 대위 선율을 완전히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긴장이 이완되는 말미는 잔향 같은 피아니시모로 시작해 찬란한 트릴로 끝난다. 폐허가 된 전쟁터에서 희망의 빛이 솟아오르는 장면이 연출됐다. 알프레드 브렌델(1931~)은 “베토벤은 무질서가 질서로 향하는 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승화를 이날 아믈랭의 연주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연주 이후 잠시 만난 아믈랭은 “잘 안 풀리는 날도 있다. 그런데 오늘은 해낸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차가운 플레트뇨프의 따뜻한 연주
같은 날 저녁 7시, 미하일 플레트뇨프(1957~)가 쇼팽 폴로네이즈와 녹턴, 뱃노래 등 11곡을 연주했다. 예순이 넘은 그이지만 녹슬지 않은 피아니즘으로 시적인 쇼팽의 세계를 선사했다. 특히 뱃노래에서 그의 왼손 오스티나토는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노 젓는 뱃사공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게 했다.
녹턴 Op.9에서는 꺼져가는 촛불 같은 동요가 길게 이어졌고, Op.15에서는 잔잔한 셋잇단음표와 연정에 찬 선율이 대조를 이루며 이글거리는 시인의 내면을 표현했다. 손을 건반에 아주 가까이 유지한 채 연주함으로써 나오는 질감이 특히 귀를 사로잡았다. 이날 쓰인 가와이 피아노가 플레트뇨프의 음악성을 받쳐주지 못했다는 비평도 나왔으나, “나쁜 피아노는 없다. 나쁜 피아니스트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상기시킬 정도로 플레트뇨프는 쇼팽의 고상함과 번뇌를 탐미했다.
‘영웅’ 폴로네이즈는 담백한 음색으로 시작했다. 아첼란도로 빨라지는 프레이즈에서는 마주르카 리듬이 쳐지지 않도록 민첩하게 핑거링했다. 기교적 난제를 풀어나가면서도 음악적 밀도나 강도를 유지하는 영민함이 돋보였다.
연주 후 플레트뇨프는 자신의 피아노, 그리고 조율사와 함께 현재 거주 중인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다. 그 전에 그는 축제 예술감독인 르네 마르탕에 작별을 고하러 리셉션장에 들렀다. 얼음처럼 차갑던 과거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온화해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그는 여러 연주회를 취소해야 했다. 그에게 이번 전쟁을 지지하는 예술가들과 똑같은 처분이 떨어진 것이다.
한편 르네 마르탕은 전쟁 지지를 선언한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좁스키의 공연을 주저 없이 모두 취소했다. 그는 “이로 인한 재정적 타격은 축제에도 크다”고 덧붙였다.
글 배윤미(프랑스 통신원) 사진 그랑주 드 멜레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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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화제 공연 리뷰 & 예술가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 ‘트로이인들’ 7.6
소외된 이야기가 환영받지 못한 이유
베를리오즈의 장대한 음악. 연주는 호연, 연출은 외면
2003년 가을, 서울 오페라계가 술렁였다. 예술의전당이 선보인 베르디의 ‘리골레토’ 때문이었다. 당시 공연은 프로덕션에 적나라한 난교 파티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홍보되었다. 이 프로덕션이 2002년 로열 오페라에서 초연되어 논란 속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공연이 서울에 상륙할 수 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2021년에 새로운 ‘리골레토’ 프로덕션이 나오기 전까지, 이 프로덕션은 런던에서 무려 20년간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 논란의 한복판에는 당시 오페라 연출계의 ‘악동’이라고 불렸던 데이비드 맥비커(1966~)가 있었다.
당시 논란이 됐던 장면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서 묘사된 ‘지배자의 도덕적 해이와 잔혹함’을 보여준다는 명분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맥비커는 2012년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서 ‘경(Sir)’이라는 기득권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가 2010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선보인 ‘돈 카를로’는 매우 얌전했고, 전혀 도발적이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악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20년 전에 이슈가 됐던 오페라 무대 위의 노출 및 과감한 성적 묘사도 예술적 표현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번에 베를리오즈(1803~1869)의 오페라 ‘트로이인들’로 독일 오페라계에 데뷔를 한 프랑스 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1970~)는 어떨까?
급진적 연출. 하지만 지루한 결과물
오노레는 작가이자 배우, 또 영화감독이면서도 오페라 연출가이다. 프랑스 영화계 누벨 바그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그는 2007년에 영화 ‘러브 송’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정됐고,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 2013년부터는 오페라 연출에도 영역을 확장해서 리옹과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돈 카를로’ ‘코지 판 투테’ ‘토스카’를 맡았고, 급진적인 연출로 큰 화제를 모았다. 저서, 영화, 그리고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은 성적 소수자나 에이즈, 자살, 약물 등 사회에 분명 존재하지만, 대중의 관심에서는 외면받은 소재에 주목한다.
이번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에서 선보인 그의 ‘트로이인들’ 프로덕션에서도 그의 시각이 여실히 드러났다. 독일에서 손꼽히는 보수적인 도시인 뮌헨과 오노레의 만남은 이른바 대참사였다. 관객들은 화가 나서 야유를 퍼부었다. 언론의 평가도 연출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노이에 무지크차이퉁’은 “이 장대한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공연을 망치기 위해 많은 일이 일어났어야 했다. 첫 번째 전략은 지루함(1·2막)이었고, 두 번째 전략은 도발(3·4막)이었다”고 평했으며, ‘아벤트차이퉁’은 “오노레의 연출은 프랑스 연극의 뻣뻣한 전통에 걸맞게 엄숙한 발걸음과 손짓 등이 많았다. 트로이 목마를 의미하는 네온사인, 맥주 상자 같은 무대장치와 소품은 어리석기까지 하다”고 언급했다.
오페라 ‘트로이인들’은 베를리오즈 생전에 작품 전체가 온전히 공연된 적이 없을 정도로 큰 스케일을 가진 작품이다. 작곡자는 이 오페라 속에 지독하게 많은 사상적 요소–식민주의, 광신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그리스 신화–까지 쏟아 부었다. 영국 비평가 W.J. 터너는 1934년에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오페라”라는 다소 성급한 평가를 하기도 했고, 베를리오즈 권위자인 데이비드 케언즈는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화려함의 오페라, 장대함에 의한 감동, 음악적 시도의 다양함에서 느껴지는 매력이 가득하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지만 ‘하얀 코끼리’(편집자 주-유지 비용이 많이 들고 쓸모없는 애물단지를 표현하는 용어)라는 평가도 있다. 매우 비싸고 또 섬세하지만 오페라 극장 레퍼토리로는 수익성이 약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트로이인들’은 5막 구성으로 5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프로덕션들은 발레나 무대장치를 통해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이번의 뮌헨에서 연출가는 정반대의 노선을 취했다. 오랜 전쟁을 상징하듯 콘크리트 잔해로 표현된 무대에서 1·2막의 배경인 트로이 이야기가 펼쳐졌다. 베를리오즈의 끝없이 해결되지 않고 흐르는 화성 속에서 무대 위의 움직임은 최대한 절제됐다. 그중에 카산드라(메조소프라노 제니퍼 홀러웨이)는 열연을 펼쳤다. 카산드라의 연인인 초레브 역을 맡은 바리톤 스테판 드구도 훌륭하게 그녀를 서포트했다. 가수들은 열창에도 불구하고 1·2막의 트로이 장면에서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카트린 레아 탁이 디자인한 무대 세트는 무대 뒷공간까지 적나라하게 오픈되어 있었는데, 장대한 베를리오즈의 오케스트레이션과 맞물리면서 가수들의 상당한 성량 손실을 가져왔다. 충족되지 않는 성량이 전반부 지루함의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애써 지켜낸 음악. 하지만 객석에선…
3막에서 5막까지는 트로이인들이 카르타고에 가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트로이 멸망 후 일행을 이끌고 카르타고에 도착한 에네아스(테너 그레고리 쿤데)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메조소프라노 에카테리나 세멘축)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에네아스는 사랑보다는 의무를 선택하고 디도를 버린 채 카르타고를 떠난다. 디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역사적 사명을 띤 채 열변을 토하는 에네아스와 디도와는 달리 연출자가 선택한 배경은 남성들의 동성애를 위한 쾌락의 정원이다. ‘이집트 노예들의 춤’ ‘누비아 노예의 춤’ 등 다양한 발레 음악이 포함된 4막에서 연출가는 동성애 난교 영상을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오노레가 프로그램북에 적은 ‘친애하는 가수 여러분’이라는 편지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극의 필연성과 기쁨, 폭력에 대한 기대와 비난, 사랑의 공포와 불가능성”을 성적인 코드로 풀어냈다고 이해하려고 나 역시 안간힘을 써보았다. 그런데도 오래전 악동 연출가 맥비커가 ‘리골레토’에서 보여준 시도는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데 반해, 오노레가 시도한 접근법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는 점이 분명했다. 객석의 빈자리가 상당했다.
반대로 음악가들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68세의 그레고리 쿤데는 아픈 동료를 대신해서 무대에 섰다. 바로 전날 베르디의 ‘오텔로’를 훌륭하게 소화해 꽉 찬 객석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그는 다음 날 이 오페라에서도 지친 기색 없이 빛나는 트럼펫 소리와 함께 다양한 음악적 해석을 보여주어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에카테리나 세멘축도 카리스마 넘치는 여왕에서부터 사랑 앞에 나약한 여인의 모습까지 탁월한 소화력을 보여주었다. 무대 위의 참혹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미소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지휘자 다니엘레 루스티오니(1983~)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도 음악적으로 손색없는 베를리오즈를 구현해서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