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VERSARY
국립극단 ‘스카팽’
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 탄생 400주년
희극의 왕에게 바치는 무대
서양연극사를 관통하는 몰리에르의 존재감이 국내 무대로 옮겨진다
지난 9월 국립극장이 파테 라이브(Pathe Live)로 상연한 코메디 프랑세즈의 ‘타르튀프’(9.10~17)에서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한 배우가 관객 앞에 서서 이 무대는 “우리 모두의 주인님(patron)”인 몰리에르(1622~1673)를 위한 것이라 선언했고 뜨거운 박수 속에 막이 올랐다. 이어서 파테 라이브를 통해 소개된 코메디 프랑세즈의 ‘인간 혐오자’(4.23~24) 공연에서는 막과 막 사이에 극단 배우 전원이 무대에 올라 몰리에르를 위해 준비한 짤막한 기념식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17세기 몰리에르가 활동했던 극단의 계보를 잇고 있어 ‘몰리에르의 집(Maison de Molière)’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코메디 프랑세즈는 몰리에르 연극의 시작점이자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그의 생일인 1월 15일이 되면 코메디 프랑세즈의 모든 단원들이 극장에 모여 무대 위에 몰리에르의 흉상을 세워놓고 그의 희곡 중 한 소절씩을 돌아가며 낭독하곤 한다. 특히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들이 보여준 오래된 전통은 새삼 이 위대한 극작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프랑스 연극의 뿌리 깊은 자긍심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양연극사에 있어 몰리에르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휴식과 여흥을 위한 소품처럼 여겨지며, 비극보다 열등한 장르로 평가받아온 ‘희극’을 비극과 동등한 차원의 예술로 끌어올렸다. 몰리에르의 희극들은 단순히 웃음을 위한 오락용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결함과 사회의 폐단을 무대 위에 날카롭고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관객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의 기능을 자처했다.
또한 극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 몰리에르의 날카로운 시선과 생생한 인물 묘사는 시대를 뛰어넘는 이해와 통찰력을 제시해왔다. 형식적으로도 그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로 대표되는 서양 희극의 요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단순히 계승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비판적인 시선과 생생한 인물 묘사를 더해 희극의 품격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몰리에르를 서양 희극의 완성자 혹은 종결자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평생 소극·발레희극·성격희극·풍속희극 등 다양한 장르의 희극을 쓴 몰리에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르는 역시 성격희극이라 할 수 있다. ‘타르튀프’ ‘수전노’ ‘인간 혐오자’ 등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며, 문학적으로도 가장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몰리에르는 당대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풍속묘사의 수준을 넘어 인간과 사회를 꿰뚫는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보편성 덕분에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공연되고 있다. 더불어 위선자 타르튀프, 수전노 아르파공, 염세주의자 알세스트 등 이후 프랑스 문학의 전형이 되는 개성적인 인물들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연극보다 더 극적인 삶
몰리에르는 그 스스로의 생애 역시 한 편의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극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연극에 푹 빠져 ‘장 밥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이란 본명을 버리고 유랑극단을 따라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기 시작한 것부터 이미 남다른 삶의 서막을 보여준다.
이후 유랑극단의 무명배우로 시작해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으며 ‘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얻기까지 숨 가쁘게 이어진 화려한 경력, 귀족과 성직자, 동료예술가 등 수많은 적들로부터 쏟아진 비난과 이에 대항해 벌인 끝없는 투쟁, 불행한 결혼생활과 고독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다.
특히 마지막 작품 ‘상사병 환자’를 연기하던 중 무대 위에 쓰러져 생을 마감한 그의 최후는 평생 무대를 위해 살다간 예술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극적 죽음’이었다. 몰리에르가 죽은 뒤 그의 극단은 ‘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계속 사용하면서 이어지다가 이후 다른 극단과 합쳐져 코메디 프랑세즈의 원형이 되었다.
이렇듯 연극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몰리에르는 작품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으로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고, 실제로 그의 삶은 영화·문학·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로랑 티라르 감독의 ‘몰리에르’,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왕의 춤’, 베라 벨몽 감독의 ‘마르키스’ 등 몰리에르란 인물을 직간접적으로 조명하는 영화가 여러 편 제작되었다. 20세기 러시아작가 불가코프는 루이 14세와 몰리에르의 관계를 그린 ‘위선자들의 밀교’란 희곡을 썼으며, 현대 발레의 거장 보리스 에이프만 역시 ‘돈 주앙과 몰리에르’란 작품을 통해 선배 예술가인 몰리에르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신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맞아 코메디 프랑세즈는 2022년을 ‘몰리에르의 해’로 정하고 공연과 낭독회·학술행사·강연 등 그를 기리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한국 관객도 그중 두 작품을 국립극장의 파테 라이브 프로그램을 통해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4월 소개된 ‘인간 혐오자’는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상류층을 배경으로, 염세주의자 알세스트라는 기념비적인 인물을 창조해낸 작품이다. 타협을 모르고 위선을 싫어하는 정직한 성품이면서도 스스로의 모순으로 갈등하고, 결국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알세스트의 형상은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 주인공을 넘어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개성 있는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클레망 에르비외 레제는 몰리에르의 원작 속 인물과 사건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현대적인 의상과 동시대적 언어로 치환함으로써 400년 전 이 위대한 작가가 써 내려간 날카로운 비판과 성찰, 그리고 웃음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켜주었다. 알세스트의 독특한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그를 둘러싼 당대의 사회적 위선을 신랄하게 묘사한 덕에, 관객은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자신과 닮은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바라보며 뜨끔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9월에 상연된 ‘타르튀프’는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연출가 이보 반 호프의 신선한 해석과 세련된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타르튀프’ 텍스트가 아니라 역사상 단 한번만 공연했던 오리지널 버전을 역사가 조르주 포레스티에가 복원, 이보 반 호프가 연출을 맡아 새롭게 선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다.
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던 원작의 인물과 장면들을 진지하고 비극적인 맥락으로 해석하면서 인간 본연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묘사한 지점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고, 장면마다 “타르튀프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새까만 무대 위에 펼쳐놓은 흰 종이와 동그라미는 등장인물들이 올라가 벌이는 파워게임의 장으로 읽혔으며, 연출가 스스로의 해석으로 덧붙인 파격적인 에필로그 장면은 관객 모두로 하여금 이 작품의 동시대적 의미를 질문하게 하는 세련된 장치였다.
스카팽, 한국식으로 재해석된 몰리에르의 웃음
프랑스를 넘어 서양연극 전반에 걸쳐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몰리에르의 공연을 한국 무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시대를 초월해 보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비극과 달리, 희극은 조금만 시류를 벗어나도 웃음의 코드가 달라지기 때문에 원작 그대로 올린다 해도 생생한 웃음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또한 몰리에르가 만들어내는 언어유희와 풍자는 언어 및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 아무리 매끄럽고 완벽한 번역을 했어도 원작의 웃음을 고스란히 자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몰리에르는 연극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실제 공연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도완이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의 공연 ‘스카팽’은 여러모로 반가운 무대가 아닐 수 없다. 2019년 초연 이후 여러 연극상을 수상하며 몰리에르 희극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스카팽’은 올해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맞아 10월부터 12월까지 구리·거제·제주·대전을 거쳐 명동예술극장(11.23~12.25)에 이르기까지 전국 순회 여정을 진행하고 있다.
몰리에르의 소극 중 하나인 ‘스카팽’은 재치만점의 익살스러운 하인 스카팽이 기지를 발휘해 선남선녀의 사랑을 이어주고, 기득권 계층의 탐욕과 편견을 조롱한다는 단순한 줄거리지만, 임도완 연출은 여기에 동시대를 관통하는 유머코드와 허를 찌르는 유쾌한 대사들을 더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잘 훈련된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앙상블, 그리고 중독성 있는 주제곡도 작품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이 공연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원작과 달리 무대 위에 작가 몰리에르가 직접 등장해 극의 처음과 끝을 여닫고, 중간마다 극에 개입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공연 중 몰리에르는 단순히 공연의 시작과 끝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무대 곁에 서서 공연을 지켜보면서, 때로는 배우들에게 불평하고 때로는 배우의 불만스러운 지적에 변명하기도 하며 극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러한 몰리에르의 등장은 표면적으로는 공연에 웃음을 더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무대 전체를 몰리에르에게 헌정하는 하나의 선물로 만드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사람을 울리는 것보다는 웃기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눈물과 한숨을 만들어내는 비극보다 웃음을 만들어내는 희극이 훨씬 까다로운 작업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머나먼 프랑스 희극작가의 작품이 400년 후 서울에서도 여전히 유쾌한 웃음과 풍자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희극작가에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마 무대 한구석의 ‘몰리에르 선생’은 공연 내내 흐뭇한 기분으로 무대를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탄생 400주년을 맞아 본래의 연극적 터전인 코메디 프랑세즈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무대에서 오르고 있는 몰리에르의 작품들은 이렇듯 오랜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한 웃음과 삶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새삼 그의 희극의 위대함과 가치를 되새기게 만든다.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장·국립극단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극단 ‘스카팽’
11월 23일~12월 25일 명동예술극장
작 몰리에르 | 연출 임도완 | 출연 강해진·김명기·김예은·문예주·박경주·성원·안창현·이중현·이혜미·이호철
——
국립극단 ‘스카팽’
몰리에르
코메디 프랑세즈 ‘인간 혐오자’ ©Brigitte/Enguerand
코메디 프랑세즈 ‘타르튀프’ ©Jan Versweyv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