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ON
피아니스트·지휘자 김선욱
음악과 나를 믿고, 준비된 선 밟기
피아노라는 뿌리, 지휘라는 줄기를 타고 그가 만든 소리의 열매가 맺힌다.
6월 지휘 공연을 앞둔 김선욱은 이 열매를 위해 피아노와 지휘에 늘 진심이다
한 피아니스트가 수년간의 활동에서 인정받았다면, 이는 다음의 두 가지가 검증됐음을 의미한다. 우선은 그의 음악적 관점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꾸준한 연마의 시간을 견딘 ‘맷집’을 지녔다는 것. 여기에 ‘대중의 관심’까지 놓치지 않고 챙겨왔다면, 어떤 경계를 넘나들던 그가 가진 예술적 역량은 보장된 셈이다.
김선욱/경기필하모닉(협연 김두민)의 6월 23일(경기아트센터), 24일(예술의전당) 공연은 김선욱의 그러한 ‘예술적 역량’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최근 지휘자로서의 행보를 부지런히 밟고 있는 그에게 ‘피아니스트’라는 단어를 살짝 옆에 놓고 ‘지휘자’라는 단어와 함께 행보에 대해 물었다. 기자가 재직하고 있는 ‘객석’에서도 김선욱의 기사는 많은 수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기사였다.
두 마리 토끼, 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둘 중 ‘피아니스트’를 먼저 적게 되는데, 언젠가 기자가 ‘지휘자’라는 수식어를 먼저 적게 될 날도 올까? 어떤 수식어가 마음에 드나.
수식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피아노 앞이든, 포디엄 위든 음표에 생명을 불어넣어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피아니스트 출신의 지휘자’를 찾자면 그 일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두 역할을 잘 병행하기란 쉽지 않아 보이는데.
상상 이상으로 쉽지 않은 길이다. 관점에 따라 편견도 있고. 그러나 나 자신을 믿고 있기에 하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해서 얻게 되는 만족감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종착지가 없을 테니, 계속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두 마리 토끼 잡기’를 위한 구체적 계획이 있나.
최근 피아노 레퍼토리를 제한하기로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많은 피아노 작품을 공부했고, 잘 연주되지 않은 협주곡에도 도전해 왔다. 바흐·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만·슈베르트·브람스의 피아노 작품 외의 다른 작품은 당분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앞에 열거한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만으로도 무척 많긴 하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이나 프로코피예프·리게티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은 보기 어려우실 것 같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김선욱이 익숙한 일부 청중에게는 이 결정이 아쉬울 수도, 또 낯설 수도 있다. KBS교향악단(2021년) 지휘를 시작으로 지난해는 서울시향, 오는 6월에는 경기필하모닉과 함께 한다. 피아노 연주와 병행하면서 국내 지휘 활동을 가속화하는 것인가.
우선, 나 자신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지휘자로서의 연혁이 짧기에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아노를 주업 삼고 지휘를 부업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지휘 레퍼토리를 넓히고 성장할 것이다. 내년에는 피아노 독주회도 계획 중이다.
지휘의 유래에서 찾은 본질적 경계 넘기
김선욱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지휘자’라는 직군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시대 교향곡, 심지어는 일부의 낭만 시대의 교향곡도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전문 지휘자가 없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성 음악 앙상블 연주는 통주저음을 담당하는 건반 악기 연주자가 이끌었고, 지휘란 ‘자, 지금부터 시시시이-작!’을 외치는 기능에 불과했다. 하지만 ‘분업화’라는 역사의 기조를 받아들인 양, 19세기 관현악법의 발달로 인해 전문 지휘자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더 복잡하고 커진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며 지휘자는 명확한 역할을 부여받았고, 20세기에는 카라얀·솔티·번스타인과 같은 지휘자들의 강력한 리더십이 음악 애호가들을 열광시켰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떨까? 정반합의 수순을 밟으려는 것처럼, 사회는 ‘탈분업화’라는 흐름을 맞았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의 행보에 대해 이제는 ‘덜 전문적이다’라고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수록, 예술적 본질을 명확히 꿰뚫고 있는 이가 된다.
물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음악가의 모습을 이 흐름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앞서 언급했듯, 관현악법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그러한 형태가 오히려 자연스러웠으며 오늘날에도 다니엘 바렌보임(1942~), 미하엘 플레트뇨프(1957~)와 같이 전방위적 활동을 이어가는 음악가들이 다수 존재한다.
피아니스트로서 지휘에 출사표를 던진 이 인터뷰의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편견과 걱정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피아노든 지휘든 음악에는 진심이다.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서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로 음악, 두 번째도 음악, 그리고 세 번째도 음악이다. 자주 강조하는 얘기인데, 피아노를 연주할 때 ‘피아노를 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휘할 때도 ‘지휘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내 어린 날의 희망
처음 지휘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TV에 방송되던 클래식 음악회를 빠짐없이 녹화해 보여주셨다. 당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는데 영상 속 지휘자의 모습을 보며, 호기심이 생겼다. 특히 정명훈 지휘자의 영상은 얼마나 자주 봤는지 비디오테이프가 풀려 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초등학생 때부터 장래 희망란에 ‘지휘자’를 쓰기 시작했고, 두 악기를 모두 배우는 경험이 미래에 지휘자가 되었을 때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2010년부터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3년의 지휘 전공 석사 과정을 밟기도 했다.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후, 터전을 영국으로 옮기며 오랫동안 염원하던 지휘의 기본 언어를 밀도 높게 배웠다. 입학을 위해 세 차례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1차는 두 대의 피아노를 지휘하고, 2차는 체임버 오케스트라, 3차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이 시험을 치면서 인생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본 셈이다.
실제로 지휘를 배우고 느낀 점은 무엇이었나. 흔히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총보적 성격’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는 지휘 감각 익히기가 좀 더 용이하다고도 하는데.
지휘 스승으로부터는 내가 가진 음악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을 많이 배웠다. 기본적인 테크닉, 표정·감정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비롯해 지휘자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도 배웠다. 사실 기본적인 지휘법은 일주일이면 다 배울 수 있지만, 그 지휘에 어떤 음악을 담는지는 평생의 숙제다. 지금까지 피아노로 표현해 왔던 나의 음악적 주관을 지휘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휘 스타일 형성에 영향을 미친 지휘자를 꼽자면?
평소 협연 공연 때, 일부러 지휘자들의 리허설을 보는 편이다. 나로선 장점도, 단점도 모두 배울 거리가 있다. 좋은 지휘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최근에는 야쿠프 흐루샤, 베르트랑 드 빌리, 파보 예르비의 리허설을 봤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게 공부가 되었다.
지휘로 다다를 궁극의 지경
올해 경기필하모닉과의 첫 지휘(6월)가 예정되어 있다.
경기필하모닉과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음악의 뼈대와 골격, 그속에 숨겨진 규칙과 이야기를 간과하지 않으면서 나만의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것이 재밌다.
서울시향과의 협연 및 지휘(10월)도 주요 일정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협연하고 R. 슈트라우스 ‘죽음과 변용’을 선보일 예정인데.
모차르트와 R. 슈트라우스는 천재적인 관현악 작법과 서정적인 작품의 성향에 기반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모차르트가 100년 뒤에 태어났다면, R. 슈트라우스와 같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서울시향과 함께했던 첫 연주는 벌써 20년도 더 전 일이다. 특히 내 음반 중 두 개를 함께 연주했으니, 그 음악적 성향을 서로 잘 이해하는 기분이다.
유럽 무대에는 2021년 본머스 심포니를 지휘하며 데뷔했다. 앞으로 예정된 해외 지휘 일정이 있나.
6월에 마카오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코리올란 서곡’, 교향곡 3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다음 시즌에는 영국 본머스 심포니, 루마니아 에네스코 필하모닉 외에 폴란드·헝가리에서도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2025년에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지휘·피아노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
다양한 악단들을 경험하며, 지휘자로서 배우는 점이 있다면.
본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리허설 시간과 준비 과정이야말로 지휘자를 성장시킨다. 지휘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매우 주관적 분야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간의 상호 작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많이 배운다.
언젠가 한 단체의 상임지휘자를 맡게 될 수도 있다. 취임 연주를 하게 된다면, 어떤 작품으로 자신의 색깔을 선언하고 싶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그 오케스트라가 가진 고유의 색깔과 나의 색채가 만나 좋은 시너지를 만드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휘자로서 꼭 해내고 싶은 프로젝트는?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많다. 전곡 연주로는 베토벤·브람스·슈만·쇼스타코비치·R.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그 외 모차르트·말러·브루크너·드보르자크·슈베르트·차이콥스키·루토스와브스키·버르토크 등 많은 작곡가들을 다루고 싶다. 피아노와 같이 할 수 있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협주곡은 꼭 하고 싶다. 마치 실내악 연주처럼, 서로의 음악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통해 가능성을 극한으로 발전시킬 프로그램들에 도전하고 싶다.
지휘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음악적 이상은 무엇인가.
광범위한 음악의 탐구를 위해, 오케스트라에 관한 공부는 필연적이었다. 관현악곡을 많이 남긴 작곡가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지휘의 경험이 쌓일수록, 피아노 연주 해석도 같이 성장하고 미묘하게 달라지기까지 한다. 그간 궁극적으로 바라왔던 내 음악에 대한 깊이는 지휘를 통해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본질에 대한 탐구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이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성장 중이라고 믿고 있다. 앞으로 음악가로서의 김선욱을 같이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빈체로
김선욱(1988~)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왕립음악원 지휘 전공으로 콜린 매터스를 사사했다. 2006년 리즈 콩쿠르 최연소·아시아 최초 우승을 거둔 피아니스트.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선보였으며, 런던과 독일에서 다수의 연주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 KBS교향악단을 지휘하며 공식적으로 국내 지휘 데뷔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김선욱/경기필하모닉(협연 김두민)
6월 23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 6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서곡, 슈만 첼로 협주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