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플레이리스트, 김대진: 내 음악을 결정지은 세 개의 음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2월 19일 8:00 오전

새연재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내 음악을 결정지은 세 개의 음반

 

 

김대진(1962~)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학사·석사·박사를 취득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기악과장·부원장·원장, 예술영재교육원장을 역임했다. 수원시향·창원시향 예술감독 및 KBS교향악단·여수음악제 음악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일본 센다이 콩쿠르·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미국 클리블랜드 콩쿠르 등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대원문화재단 대원음악상 및 금호문화재단 스승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직을 맡고 있다.

 

 

 

 

어린시절 반복해 들었던 ‘미완’의 완성작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인생 첫 클래식 음악

클라우디오 아바도/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감상 포인트

아바도가 자아내는 오케스트라 소리의 특별한 블랜딩에 주목할 것!

 

사실, 저는 피아노를 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었습니다. 음악 애호가셨던 부친 덕분에 저의 집에는 LP가 아주 많았습니다. 부친께서 미국 유학 시절부터 용돈을 아껴가며 구입한 LP가 거의 천여 장 넘게 있었으니까요.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당시 FM 라디오 방송국에서 부친의 음반을 빌려 간 적도 있었습니다.

부친이 퇴근한 저녁 무렵부터는 당신의 최애 곡인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항상 집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그 음악이 클래식 음악인지도 모른 채, 늘 감상 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 음악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꾸는 꿈을 잘 보기 위해 안경을 끼고 잠에 들었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었죠. 그의 멜로디에는 감수성과 공감 능력,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와 섬세한 감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집에 오면 스스로 전축을 틀어 이 곡을 감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실수로 전축을 잘못 만지는 바람에 음반에 손상이 생겼고, 그 일로 부친에게 크게 혼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저를 꾸짖고 돌아서는 부친의 얼굴에 띈 야릇한 미소를 말이죠.

그날 이후에도 저는 계속 ‘미완성 교향곡’을 들었고, 이상하게도 이 곡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요즘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도 모르게 이 곡을 찾게 되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곡이 저를 피아노로 이끈,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향곡은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두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온화하고 친근한 사랑의 말로서 다정히 속삭이는 이 곡은 분명 ‘미완성’이지만, 결코 ‘미완성’은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도를 떠나 ‘미완성 교향곡’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한 번쯤 들어봐야 할,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낭만의 정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일상에서 자주 듣는 곡

바실리 페트렌코/오슬로 필하모닉

 

감상 포인트

젊은 러시아 지휘자의 열정이 돋보이는 연주

 

얼핏 생각하기에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음악을 자주 들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음악가들은 음악을 들을 때, 다른 모든 일을 멈추고 음악만 듣는 일종의 ‘직업병’이 있습니다. 설사, 듣는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감상의 목적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분석하며 듣게 되죠. 그래서 저는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는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심지어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스스로 연습하며 듣는 소리, 학생들을 가르치며 듣는 소리 등 온종일 음악 소리에 파묻혀 있다보니, 귀가 휴식을 달라고 애원하는 통에 가급적 음악을 멀리하는 편입니다. 식사할 때나, 운전하며 듣는 음악은 거의 고통(?)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듣고 싶어서 찾아 듣는 곡이 있습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3악장입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고, 후기 낭만주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즘의 연장선상에서 현란한 기교가 부각되는 작품을 여러 곡 남겼습니다.

사실 그는 작곡가로서 시대에 조금 뒤처진 면이 있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활동 시기에는 인상주의 사조가 풍미하고, 무조음악이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낭만주의 감정을 부각한 그는 어쩌면 철 지난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당시 그러한 평가를 받던 라흐마니노프는 낭만 감성의 진수를 보여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어쩌면 가장 개성이 강한 작곡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교향곡 2번 3악장은 이러한 면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애잔하고 감미로운 선율미의 극치를 느끼게 하죠. 그를 ‘멜로디 메이커의 왕’이라고 칭송하게 만드는 3악장은 무척 황홀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향곡 2번 3악장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넘어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음악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해준 클리블랜드에서의 연주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곡

마린 알솝/포트워스 심포니 오케스트라(협연 임윤찬)

 

감상 포인트

임윤찬의 깊은 내면이 잘 표현된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무대

 

1985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카자드쥐 콩쿠르(현 클리블랜드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참가한 첫 콩쿠르에서 우승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받고 누구보다 놀란 건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수상 후, 가장 설렜던 것은 부상으로 주어지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죠. 당시 저의 스승이셨던 마틴 캐닌(1930~2019) 선생님과 협연 곡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정하고, 바로 맹연습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덧 연주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을 위해 세브란스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안내받은 대기실은 1946년부터 1970년까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지휘자 조지 셀(1897~1970)의 ‘마에스트로 룸’이었습니다. 방 안에는 그의 업적과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사진과 그의 필기도구 및 안경, 지휘봉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연습과 함께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제 인생의 가장 큰 전율의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오케스트라 전주가 끝나고 제 연주를 시작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죠.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망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이때 느꼈던 감정 역시, 지금까지 연주 생활을 하며 느낀 공포 중 가장 큰 공포였습니다.

연주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한, 잊을 수 없는 곡이 되었습니다. 이 곡은 베토벤이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음악으로 진입하던 시기에 작곡한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곡입니다.

그날 이후, 이 곡의 연주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기억이 손상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일기 때문이죠. 이 곡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곡일 뿐 아니라, 여전히 제 마음속에서 연주가 계속되고 있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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