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배길, 음악이라는 액자에 담은, 가장 자유로운 선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4월 24일 10:00 오전

WELCOME 3

내한하는 연주자들 인터뷰

 

피아니스트 배길

음악이라는 액자에 담은, 가장 자유로운 선율

 

5월, 한국 데뷔 무대를 앞둔 바흐 스페셜리스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c) Marco Borggreve

예술은 과거의 유산을 현재의 시선으로 재해석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의 예술적 토양에서 성장한 피아니스트 배길은 확고한 음악적 주관과 정교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유럽 무대에서 거장들의 가르침을 흡수하며 성장한 그는, 콩쿠르라는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음악의 본질적인 구조와 그 이면에 숨겨진 자유를 탐구하는 데 몰두한다.

지난 몇 년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2020)과 건반 협주곡 BWV1052~1056 음반(2024, 루이지 피오바노/아르키 디 산타 체칠리아)을 잇달아 선보이며 독보적인 바흐 해석을 증명해온 배길의 음악적 뿌리는 단연 바흐에 닿아 있다.

바흐를 모든 음악의 시작이자 정점으로 정의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결코 고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부터 자동차를 향한 열정까지, 동시대의 감각을 음악 안으로 유연하게 끌어들이며 클래식 음악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고 있다. 5월, 금호아트홀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로 한국 관객과 첫 인사를 나누는 배길을 미리 만났다.

 

전통의 기초 위에 세운 예술적 직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서로 다른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두 문화의 결합이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네덜란드에서는 음악의 가장 밑바닥이 되는 기초를 배웠다. 악기를 대하는 태도부터 정밀한 연습 체계를 세우는 법에 대한 훈련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내 음악에 영혼을 불어넣어 준 곳이다. 이탈리아 특유의 예술적 스타일은 내가 음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완성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네덜란드의 탄탄한 기본기 위에 이탈리아의 자유로운 해석이 더해진 셈인데, 이 조합 덕분에 스승 없이 홀로 연습하면서도 나만의 음악적 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음악을 접한 ‘모태 음악가’다. 다른 길을 꿈꾼 적은 없었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연습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에 음악은 선택이 아닌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연주를 강요하지 않고 음악을 ‘해야 할 일’이 아닌 ‘즐기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해주셨다. 사실 다른 길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아노는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내밀한 언어다.

한국은 콩쿠르에 대한 관심이 매우 뜨겁다. 일찍이 콩쿠르 무대를 떠나 독자적인 행보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콩쿠르는 마치 경주마들이 달리는 경기와 같다. 테크닉의 우위는 가려낼 수 있겠지만, 주관적인 음악성까지 심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열 명의 심사위원이 있다면 열 개의 취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콩쿠르가 기회의 문을 여는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전부는 아니다. 나는 15살 때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연주자는 콩쿠르 결과에 매몰되기보다 하이든부터 베토벤까지 음악적 양식이 변해가는 단계를 온전히 밟아가는 과정에서 더 큰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길이 연주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Fonè Records sacd 223

바흐, 삶을 지탱하는 가장 완벽한 구조

한국 데뷔 무대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보인다. 바흐는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가?

나에게 바흐는 음악의 정점이다. 기독교인에게 성경이 있고 시인에게 단테가 있듯이, 피아니스트에게는 바흐가 있다. 어린 시절, 매일 아침 바흐 인벤션을 외워 연주하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는데, 이는 단순히 손을 푸는 워밍업이 아니라 뇌를 활성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바흐의 복잡한 다성음악 구조를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과정은 연주자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지적 유희이기도 하다.

이미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자신만의 색깔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음악은 회화와 같은 원리를 공유한다.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상과 구조라는 ‘액자(Frame)’는 반드시 견고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일단 액자가 튼튼하게 세워지면 그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떤 색을 쓰든, 어떤 질감으로 그리든 그것은 연주자의 온전한 자유다. 요즘 많은 연주자가 이 액자의 존재를 잊거나, 혹은 액자 안에 갇혀버리곤 한다. 나는 그 적절한 경계에서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음악’은 테크닉의 완벽함과 무엇이 다른가?

실수 없는 연주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예술의 본질은 인간의 호흡과 그 사이를 파고드는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숨결, 그리고 실시간으로 청중과 주고받는 에너지가 무대의 핵심이다. 관객들이 내 연주에서 기계적인 완벽함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와 환희를 느끼길 바란다.

브랜드 협업 등 음악 외적인 행보도 눈에 띈다. 이러한 활동이 연주에도 영향을 미치나?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연주할 때 가장 편하고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찾다 보니 장인의 수트(루비나치)를 입게 되었고, 그러한 개인적 취향이 자연스럽게 브랜드와의 작업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예술가가 동시대의 라이프스타일과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장인이 만든 수트를 입고, 운전대를 잡을 때 느껴지는 리듬과 구조 역시 내 음악적 영감의 일부가 된다.

한국에서의 첫 연주를 앞두고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단순히 음정을 틀리지 않는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예술가로 기억되고자 한다. “음악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구나”라는 발견의 기쁨을 드리고 싶다. 이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 무대에서 더 깊고 넓은 음악적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

홍예원 기자 사진 AVECS IMGA

 

배길(1994~) 한국계 네덜란드 피아니스트로, 헤이그 왕립음악원과 이탈리아 이몰라 피아노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Fonè Records)과 ‘건반 협주곡’(Arcana) 음반을 발매하며 ‘바흐 스페셜리스트’로서 입지를 다졌고, 지난 2월에는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와 협연 무대를 선보였다. 파비오 루이지·다니엘레 가티와 협연하고, 하이엔드 브랜드와 협업하는 등 클래식 음악과 현대적 감각을 잇는 독창적인 작업을 지속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배길 피아노 독주회

5월 8일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

5월 11일 오후 8시 대학로 예술가의집 3층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정명훈/아시아 필하모닉(협연 배길)

7월 6·8일 부산콘서트홀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