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에게 홀렸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요즘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유령’ 돌풍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게다가 초연된 지 25년이나 지난 이 뮤지컬이 2013년 대한민국이라는 시대적 공간에서 다시 써 내려가고 있는 새로운 신화가 마냥 신기하고 흥미로울 뿐이다. 3월 24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글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교수) 사진 설앤컴퍼니
이번 무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물론 ‘오리지널’이라 불리는 내한 공연이라는 점이다. 고가의 명품을 좋아하고 진짜·가짜에 유난히 집착하는 우리나라 관객 취향 덕분에 탄생된 용어지만 엄밀히 보자면 국적 불명의 한국식 조어다. 왜냐하면 뮤지컬에서 ‘오리지널’이라는 용어는 오리지널 캐스트, 즉 해당 공연의 첫 무대를 장식한 배우들에게 붙여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불명확한 개념은 영어로 번안된 프랑스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내한 공연을 오리지널이라는 마케팅 수사로 장식하는 대담성마저 낳았다. 그러나 정확히 구분하자면 요즘 우리나라에서 막을 올리고 있는 버전은 여러 국가를 순회하며 무대를 꾸미는 인터내셔널 투어 프로덕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그렇다고 ‘명품’이 아니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매번 무대를 다시 꾸미는 재연의 예술인 뮤지컬은 어떤 배우가 참여하느냐 여부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투어냐 오리지널이냐에 따라 작품의 품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번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지는 재미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2013년 서울을 강타하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은 확실히 흥행이 될 수밖에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 국내에서 특히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배우 브래드 리틀이 메인 롤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 중 2005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봤던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리바리한 모범생 이미지의 라울, 어리숙한 크리스틴임에도 불구하고 커튼콜이면 어김없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관객의 박수 속에는, 홍보 문구로도 쓰이는 것처럼 예전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겨줬던 ‘첫사랑’ 유령과의 재회라는 반가움이 묻어 있는 인상이다.
브래드 리틀의 유령이 특별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극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풍부한 성량, 크리스틴에게 때로는 아버지처럼 기대고 싶은 존재로, 때로는 주저 없는 난폭함에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외형적 모습은 빼놓을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것은 영민함이다. 브래드 리틀이 재현해내는 유령에는 완급의 묘미가 담겨 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리스틴에게 기어가는 유령의 아픈 마음은 엇박자의 움직임으로 입체감을 더하고, 노를 저어 강을 지나는 조각배의 움직임에는 지렛대를 회전축 삼아 방향을 바꾸는 노련함을 담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세계 각국에서 수십 차례 다른 유령들을 만나봤지만 그만큼 노련하게 캐릭터의 디테일을 구현해내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지칠 만큼 무대에 등장했겠지만 여전히 2막 마지막의 삼중창이 시작되면 침 삼키는 소리만 들리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번 내한 무대의 진짜 매력이다.
보다 친절해진 자막도 좋다. ‘프랑크푸르트’ 대신 ‘강남’을 등장시킨 위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막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노래하는 크리스틴의 노랫말은 모호했던 예전에 비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져 한층 좋아졌고, 크리스틴을 떠나보내는 유령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노래의 해석으로 ‘안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오랜 잔상을 남긴다. 여기에 아직 동참하지 못했다면 어떻게든 티켓을 구해보라는 ‘무책임한’ 조언이라도 드리고 싶다. 혹시 어렵게 구한 입장권이 더 큰 감동을 자아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 티켓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