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선은 애절한 소리에 장면을 표출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녀는 일찍부터 소리를 연기라고 생각했다. 약간 탁한 음색으로 곰삭은 느낌을 주는 그녀의 소리는 관객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고 만다.
일절통곡 애원성에
2005년, 판소리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이른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던 때의 일이다. 문화재청에서는 판소리를 잠시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 그 감동이 일 년도 가지 못했다. 판소리 평론가로 행세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판소리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가 우선으로 생각한 것은 판소리 공연장의 어제와 오늘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죽어가는 판소리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살아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떤 공연장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오늘의 관객에게 가장 판소리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고 했다. ‘평론가 선정 판소리 완창축제’는 그렇게 생겨난 공연이었다.
두 번째 축제에서 우리는 옛 판소리 공연의 조건에 적당할 법한 공간을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전통사회는 마이크가 없었다. 많아야 백 명 정도의 청중이 모이는 마당이거나 사랑방 같은 공연장이 소리판이었다. 천장이 얕고 마루가 깔려 관객이 방석을 깔고 앉아 소리를 감상한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는 추임새가 제격이다. 관객은 소리꾼의 침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앉아서 듣는다. 숙명여대에 마루가 깔린 공간을 찾았다. 청중은 마룻바닥에 앉고, 소리꾼이 서는 무대는 객석보다 15센티미터쯤 높았다. 앉아 있다 힘들면 다리를 펼 수도 있고, 그것도 힘들면 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어떤 아이는 공연을 보다가 엄마 무릎을 베고 잠이 들기도 했다.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명창들이 이 자리에 와서 함께 노래하며 판소리를 생각했다.
공연은 이틀 동안 진행됐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열 시간의 장정이었다. 첫날 공연은 중견 명창인 조주선의 ‘춘향가’로 시작됐다. 조 명창은 두 시간에 걸쳐 ‘사랑가’에 이어 ‘이별가’를 불렀다. ‘이별가’는 언제 들어도 슬픈 대목으로, 적어도 이별을 해본 사람이라면 노래의 정황과 자기설움이 맞아떨어져서 막막한 심사가 아주 서럽게 다가오는 노래다. 처음 소리판에 왔던 이들도 마루에 앉아 이 소리를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춘향이처럼 모진 이별을 경험하지 않고서야 그 정서 속에 그렇게 쉽게 끌려들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일절통곡 애원성에 단장곡(斷腸曲)을 섞어 운다. 둘이 서로 마주 앉아, 보낼 일을 생각허고 떠날 일을 생각허니, 어안이 벙벙 흉중이 답답하여 하염없는 설움이 간장으로 솟아난다. 경경열열(??咽咽)허여 크게 울든 못 허고 속으로 느끼난디, “아이고, 여보 도련님 참으로 가실라요. 나를 어쩌고 가실라요. 날 볼 날이 몇 날이며, 날 볼 밤이 몇 밤이오. 도련님은 올라가면, 명문귀족 재상가의 요조숙녀 정실 얻고, 소년 급제 입신양명 청운에 높이 올라 주야 호강 지내실 적, 천리 남원 천첩이야 요만큼이나 생각허리. 아이고, 내 신세야, 내 팔자야. 이팔청춘 젊은 년이 낭군 이별이 웬일인고. 아이고 여보, 도련님. 인제 가면 언제 와요. 올 날이나 일러주오. 금강산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랴오. 동서남북 너른 바다 육지가 되거든 오시랴오. 마두각(馬頭角) 하거든 오시랴오. 오두백(烏頭白) 허거든 오시랴오. 운종룡(雲從龍) 풍종호(風從虎)라. 용가는 데 구름 가고, 범가는 데 바람이 가니, 금일송군(今日送君) 님 가신 곳에 백년소첩 나도 가지.”
이도령과 이별을 앞둔 춘향이, 그와 마주하여 한바탕 통곡을 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는 자리니 통곡하는 것이야 어찌 흠이 될 것인가. 슬프고 원망스러워서 애간장이 끊어지듯 슬픈 소리로 통곡하듯 노래한다. 춘향은 어안이 벙벙하고 가슴이 답답해 하염없는 설움이 간장에서부터 솟아난다. 진정한 눈물은 간장이 썩어서 나오는 것이다. 슬퍼서 목이 메어 흐느끼듯 운다. 슬픔이 지나쳐 한바탕 정신없이 울게 되면 혼백이 사라져 넋 나간 사람의 모습을 띠게 된다. “도련님이 서울로 올라가면 바로 명문가의 요조숙녀와 혼인을 하겠죠? 이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하면서 밤낮으로 호강하며 지내시겠군요. 그렇게 즐겁게 사실테니 도련님과 천 리만큼 떨어진 남원 땅에 있는 천한 첩 춘향이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겠습니까? 도련님과 제가 다시 만나는 것은 바다가 육지가 되는 것, 금강산이 평지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겠지요?” 춘향의 이별 노래는 춘향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조주선은 스스로 춘향이가 되어 이 절망적인 이별을 그림 그리듯 보여주고 있었다. 관객들이 흐느끼는 이유는 그 슬픈 이별에 동화된 것도 있지만 조주선의 노래하는 장면이 너무 슬퍼 그랬을 것이다. 조주선은 애절한 소리에 춘향의 표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녀는 일찍부터 소리를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한 커트마다 하나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판소리의 이면을 그려내기 위해 자연스레 목소리는 드라마틱해지고, 거기에 따라 이면에 맞게 동작이며 발림이 연기로 승화된다. 이 점이 조주선의 강점이다. 그녀는 소리판에서 ‘일절통곡’을 하며 퍼더버리고 운다.
조주선의 소리내력
조주선은 예향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도시 전남 목포 태생이다. 어려서부터 한국 무용을 전공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는 가야금을 배웠는데, 솜씨가 빼어나 춤과 가야금으로 인근의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상을 많이 받았다. 목포여중 1학년 무렵, 주선은 판소리로 영역을 넓혔다. 목포에는 선배인 정미정과 오정해 등이 이미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 조금 늦게 소리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주선은 김흥남 명창에게 처음 판소리를 배웠다. 목포는 숨겨진 소리꾼이 많은 소리의 고장으로, 기량이 뛰어나지만 지역에 머물면서 후학을 길러내는 명창이 많았다. 김흥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조주선은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인자한 이, 김흥남 선생으로부터 ‘심청가’와 ‘춘향가’의 토막소리를 배워 익혔다. 소녀 주선은 소리가 좋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소리를 배웠다. 스승은 그러한 주선을 격려하며 가르쳤다. 그런데 선생은 주선이 목이 약해서 소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느 날 주선의 엄마에게 소리를 그만두게 하라고 전한 것이다. 엄마가 대뜸 소리를 그만두라고 하니, 주선은 영문도 모른 채 다그치는 엄마에게 한없이 섭섭하여 울며 대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꿋꿋이 주선은 스승에게 소리를 일 년 동안 배웠다.
김흥남 선생은 주선이 중학교 때 작고했다. 이후 조주선은 바로 당대의 명창 성창순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성창순 선생에게 소리 공부를 시작한 이듬해 주선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해 서울로 상경했다.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며 수양딸처럼 생각하고 소리를 가르친 성 명창은 막내 제자를 진심으로 아껴 한복까지 만들어 입히면서 부모의 마음으로 기르고, 소리 공부에 있어서는 엄격했다고 했다. 조주선은 그녀의 문하에서 김세종제 ‘춘향가’와 박유전제 ‘심청가’를 배워 전수 장학생, 이수자의 과정을 거치면서 ‘심청가’의 이수자가 되었다. 그후 주선주선은 남원 판소리명창 경연대회에서 ‘심청가’로 일반부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조주선은 한양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해 오정숙 명창과 안숙선 명창을 만난다. 오정숙 명창에게서 특히 드라마틱한 발림과 표정연기를 배웠다. 그리고 안숙선 명창에게는 ‘수궁가’를 배워 익혔다. 두 선생은 주선이 지금까지 배워온 소리의 바탕과는 다른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대학생인 주선에게도 커다란 가르침이 됐다. 2001년, 주선은 국립국악원에서 ‘심청가’ 첫 완창무대를 열었다. 그 후 김수연 명창에게 ‘흥부가’를 배웠다. 2005년에는 앞서 소개한 판소리 ‘춘향가’의 무대를 가졌으며 2008년, 문화체육부로부터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조주선은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국악원에서 7년을 근무했다. 이때 판소리나 민요로 많은 무대를 가진다. 그 후 조주선은 모교인 한양대 국악과에 판소리 전공 교수로 부임했다. 판소리를 전공으로 정식 교수가 된 것은 아마도 처음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후로도 김일구 명창에게서 ‘적벽가’를 배웠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와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음악과를 수료하고 이제 박사학위 논문만 남겨두고 있다. 배움의 길이란 이토록 길고 모진 것이다.
국악 전도사라는 별명
조주선의 소리는 약간 탁한 음색으로 곰삭은 느낌을 준다. 적당히 쉰 목소리가 관객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녀는 여러 차례 무대를 경험하면서, 지금 부르고 있는 대목에 담긴 상황과 정황을 명확히 알아야 그 정서가 관객에게 분명하고 의미 있게 다가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발림의 방법과 성음을 제대로 구사하는 것이고, 일단 소리를 배우고 나면 자기화하는 데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리꾼들은 스승에게 소리를 배운 다음, 홀로 독공이라는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자신과 겨루는 외로운 싸움이다. 처음에는 스승을 모방하되, 독공을 통해 자기 나름의 이해와 표현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1997년, 유미리·최진숙·강경아 등과 함께 낸 ‘젊은산조3 창’은 스물일곱 조주선의 소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필자는 이 음반의 해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최상급의 명창에게 소리 공부를 했기 때문에 기초가 탄탄하고 감각이 뛰어나며, 오랜 학습기간에서 배어나는 소리 공력도 탄탄한, 녹록지 않은 이력의 소유자들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의 국악과나 한국음악학과에서 판소리를 전공으로 한 정규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실력자다. 이들보다 조금 앞선 소리꾼들은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규 교육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엄청나게 피해를 입은 세대라 한 편에는 늘 그늘이 있어온 데 비하여, 이들 젊은 소리꾼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고 늘 당당한 기세가 있다. 이들 젊은 소리꾼들은 대체로 사설을 또렷하고 명료하게 발음한다. 그리고 정확한 음정과 확실한 시김새를 구사한다. 구전심수된 판소리와 악보화된 판소리를 동시에 수용한 세대이기 때문에 이들은 판소리 한마당을 터득하는 데 예전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대개 몇 개의 작품을 완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대에 서면 자신만만하게 노래 할 수 있다.”
조주선을 가리키는 중요한 별명으로 ‘국악전도사’가 있다. 그녀는 판소리 명창이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목소리를 통해 국악가요를 부르면서 대중을 껴안으려는 노력을 누구보다 열심히 한 사람이다. 이제는 소리꾼이 서양악기와 함께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인 활동이 되었지만, 그러한 음악이 일상화한 데는 조주선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처음 조주선이 국악가요를 부를 때만 해도, 그녀의 행보를 인기를 의식한 ‘튀는 행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주선은 화석화된 국악을 오늘의 정서에 맞게 다듬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졌다. 국악이 오래된 벽장 속 장식품이 아니라, 우리시대에도 당연히 제 역할과 기능을 하는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주선은 국악 시장이 같은 직종에 있거나 극소수의 애호가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언제 그 생명력이 끊어질지 모르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는 ‘우리시대의 청중’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통 판소리와, 일반 대중이 좋아할 만한 만나는 지점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것이 국악가요 운동이다. 아마도 그녀가 처음 겪었던 외로운 투쟁이 오늘날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길을 만들어주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조주선은 일본대사에게 직접 판소리를 가르쳐, 외국인을 판소리에 빠져들게 만들기도 하면서 한국의 전통예술을 소개하는 전령사가 된 것이 아주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추억한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중적인 무대에 서는 기회가 다소 줄어들었다. 대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산공부를 하고 있는 중에 조주선과 통화를 했다. 판소리라는 열정이 어디까지 사람을 단련시키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글 유영대(고려대 교수) 사진 노승환(www.rohsh.com)
▲ 젊은산조3 ‘창’
유미리·조주선·박선미·최진숙·강경아 젊은 소리꾼 다섯 사람이 부른 판소리 모음집이다. 조주선은 ‘심청가’ 가운데 ‘심봉사 물에 빠지는 대목’을 불렀다. 고수 김청만.
(삼성뮤직,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