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까지 나온씨어터
작가들이 귀환하고 있다. 작가들의 열전(熱戰)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김재엽의 ‘알리바이 연대기’와 이윤택의 ‘혜경궁 홍씨’에 이어 2014년 2월 박근형의 ‘동백아저씨’와 김태웅의 ‘헤르메스’가 나란히 올라갔다. ‘동백아저씨’는 ‘개구리’ 이후 처음으로 무대에서 입을 여는 박근형의 신작이고, ‘헤르메스’는 오랜만에 만나는 김태웅의 신작이다. 두 작품 모두 대학로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 선돌극장과 나온씨어터에서 올라갔다.
대신 대학로 중심가의 가로등 전봇대마다 붙어 있는 김태웅의 ‘헤르메스’ 포스터는 온통 벌겋다. 대놓고 ‘벗는 연극’을 표방하고 있다. 김태웅의 신작이 올라가고 있다는 말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 작품이 김태웅의 것이었냐 되묻는다. 내용이 자본주의가 낳은 똥에 대한 이야기, 자본으로 점점 더러워지는 자기 혐오감에 자기 몸에 똥을 싸달라고 요구하는 변태적 성인연극 제작자에 관한 이야기인 걸 알면 더더욱 발걸음을 주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이름은 남건이다. ‘남로당 건설 담당’의 줄임말이란다. 남건은 성인연극 제작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는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여배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철저히 묵살한다. “노동운동도 했다는 사람이 노동자 입장은 전혀 고려 안 한다”라는 항변에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다. 너는 내가 고용한 노동자다”라는 답이 던져진다. 남건은 위악적인 캐릭터다. 입이 독하다. 시쳇말로 ‘갑질’이 대단하시다.
남건과 에로 여배우, 남건과 여자 맹인 안마사, 남건과 해고 노동자 선배, 남건과 콜걸… 공연은 극 중반에 이를 때까지 배우 둘만 나오는 2인극 형식으로 진행된다.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벗는 연극’을 표방하고 있지만 자본의 논리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김태웅식 블랙 유머다. 철저히 착취하다가 쓸모없으면 담뱃재처럼 떨어 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난무한다.
남건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곳은 호텔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촛불 집회가 열리는,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이다. 남건은 두껍게 커튼을 내리고 광장을 외면한다. 광장에는 분식집 아저씨·파출부 아줌마·청소부 아저씨·편의점 알바생·술집 언니들·외국인 노동자·목사님·신부님·스님·대학생·탤런트·개그맨·농부들까지 매일매일 사람들이 가득하다. 맹인 안마사가 촛불 집회가 보고 싶다고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면 광장의 함성이 밀려들어온다. 촛불 집회 광장에선 또다시 해고 노동자가 분신자살하고, 남건에게 해고된 여배우도 극장에서 홀로 목을 맨다.
그런데도 남건은 시니컬하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20년 걸렸다” “왜 죽고들 지랄이야!” 악을 쓴다. “갑질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 발악을 한다. 같이 일하던 동료 여배우의 죽음에도 “너의 연기는 천박해. 죽음도”라며 위악적으로 반응한다. 남건은 스스로에게 가장 위악적으로 독기를 내뿜는다. 자신이 만드는 연극에 대해 “이 작품은 누가 해도 천해. 쓰레기야”라고 이야기한다.
김태웅의 극단 이름은 우인, 곧 광대다. 김태웅 자신이 천상 광대다. 광대란 무릇 철저히 희극 배우이어야 하는데, 김태웅 본인은 불에 덴 화상 환자처럼 몸부림치고 있다. 희극 배우가 우리 시대의 비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분신자살의 불과 라이터 불의 모티브는 이미 김태웅의 초기작 ‘불티나’(2001)에서도 나왔던 것이다. ‘헤르메스’에는 촛불 광장의 촛불 100만 개와 해고 노동자의 분신자살의 불이 있다. 10년, 20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여전히 죽고 있다. “왜 죽고들 지랄이야! 그만들 좀 죽어!” 김태웅의 마지막 발악에서 정신이 확 든다. 박근형의 ‘동백아저씨’의 마지막 장면도 불이다. 누군가의 몸에 붙은 불로 얼굴이 뜨겁고 드디어 발기되는 남자 주인공처럼 생각들이 송곳처럼 일어선다. 김태웅도, 박근형도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이 있어 우리는 외롭지 않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극단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