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선 손가락은 마치 사람처럼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한다.
연출가 자코 판 도마엘은 “정말 작은 것들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영원하다.
‘키스 앤 크라이(Kiss&Cry)’는 한 여인이 평생에 걸쳐 사랑했던 다섯 명의 연인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독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토토의 천국’ ‘제8요일’ ‘미스터 노바디’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이름을 알려온 벨기에 출신의 영화감독 자코 판 도마엘이 연출을, 그의 아내 미셸 안 드 메이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촬영·조명·미술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을 통해 영화·연극·무용이 결합된 형태로 이색적인 무대를 선사한다.
영화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무대 위에는 다양하게 설치된 카메라와 함께 여러 스태프들이 자리 잡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두 명의 무용수가 몸이 아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한 편의 무용극을 선보인다. 카메라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조그마한 장난감과 기차역을 비추고, 푸른 수조 안에 흩어지는 잉크는 스크린을 한가득 채운다. 카메라는 모든 움직임을 빠짐없이 담아 스크린에 투사한다. 관객은 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감상하는 것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목격하게 된다. 상징과 비유가 반복되는 장면들 사이로 더해지는 음악과 내레이션 또한 인상적인데. 벨기에 공연에서는 자코 판 도마엘이 직접 내레이터로 나섰고,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배우 유지태가 우리말 내레이션을 맡았다.
‘키스 앤 크라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손가락의 움직임이다. 무용수 미셸 안 드 메이와 그레고리 그로장은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가지고 춤과 연기를 선보인다. 한 쌍의 손은 누군가 갈망하고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다가온 상황 앞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다.
3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키스 앤 크라이’ 공연을 앞두고, 연출가 자코 판 도마엘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키스 앤 크라이’는 어떤 발상에서 시작된 작품인가. 실제 무대에 올리기까지 어떤 과정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낸, 정말 작고 사소한 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10년 전, 작은 탁자 위에서 춤추는 두 손을 카메라에 담게 됐는데 그것이 지금 공연의 오프닝 장면이 됐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사고를 확장해 이야기가 있는 1시간 20분짜리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처음엔 내러티브를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이야기든 그냥 촬영했다. 구성원은 세 명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여섯 명까지 늘어 함께 모일 때마다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장면을 생각해 만들었다. 그때 내러티브가 없는 많은 장면을 만들었는데 대부분 남성의 손 하나와 여성의 손 하나가 등장했고, 그 모습에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됐다. 이후 친구인 단편작가 토마스 휜지흐가 함께 참여하게 됐다. 그는 한두 문장씩 글을 써내려갔고, 때로는 그가 쓴 짧은 에피소드에 우리가 다른 대사나 이야기를 더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 이런 공동 작업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영화의 경우, 하나의 시나리오를 6년에서 길게는 10년에 걸쳐 써왔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대본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키스 앤 크라이’의 경우, 10년 전 즉흥적으로 만든 한 장면에서 시작해 2011년 공연을 올리기로 결심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영화 한 편을 만들기까지 6년에서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4개월 만에 공연 전체 이야기를 구상하고 대본을 썼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공동 작업을 통해 완성됐다. 각각의 짧은 장면들 모두 즉흥적으로 만들어졌기에 사전에 짜인 이야기를 만들거나 프로덕션 전체를 완벽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었다. 혼자 하는 작업에 비해 속도가 상당히 빨라서 이런 협업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는데, 그러면 제작비가 엄청 비싸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 작품 속에 영상·연극·무용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되어 있다. 이런 방식을 시도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이 공연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을 모으는 것은 필수였다. 나는 영화 만드는 것에, 미셸은 춤에 재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연극·조명·촬영·무대 디자인에 관한 전문가들이다. 각자의 재능을 모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우리는 협업을 하는 가운데 늘 다양한 것들을 혼합하는 시도를 한다.
무대에는 스크린을 통해 한 편의 영화 같은 영상이 나오고, 그와 동시에 각 장면을 만드는 과정이 그대로 노출된다. 관객이 두 가지 액션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게 의도적으로 설정했는데.
영화도, 무용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모든 것이 혼재된 무대 말이다.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과 무대 위에서 이뤄지는 공연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카메라는 관객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작은 것들을 보여주고, 카메라가 보지 못한 것을 관객이 직접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정과 결과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이전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이다. 또 미리 만들어둔 영상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매 공연마다 무언가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살아있는 예술만이 가진 마법이라고 할까. 그 지점에서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사전에 영화 작업을 하는 것과 관객 앞에서 바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당신 앞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곧장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벨기에 공연에선 본인이 직접 내레이션 녹음을 했다. 연출가가 내레이터로 나서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처음에는 배우를 무대에 세우려고 했는데 전체 제작비를 생각하니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 결국 내레이터를 자청하게 됐다. 프랑스 공연에서는 직접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서서 내레이션을 했고. 그 이후 목소리를 따로 녹음했는데 그땐 지금처럼 다양한 언어로 공연하게 될 줄 상상조차 못했다. 어디에서 공연하든 자막은 피하고, 그 나라의 언어로 내레이션을 녹음한다. 관객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목소리로 내레이션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번 한국 공연을 위해 배우 유지태의 목소리를 녹음하게 된 건 정말 행운이었다. 화상통화로 녹음 과정을 지켜봤는데, 내가 이틀 동안 녹음했던 내레이션을 그는 두 시간 만에 끝내더라.
유지태의 목소리에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
그는 정말 멋진 목소리를 가졌다! 굉장히 따뜻하고 나지막하면서 미묘한,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다. 굉장히 달콤한 톤으로 슬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목소리를 찾고 있었는데, 거기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작품을 위해 왜 다른 신체 부위가 아닌 손을 택했는가.
처음에는 정말 작은 것들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다 의도치 않게 움직이는 손을 촬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작품 속에서 손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사람이나 동물이 되기도 한다. 손이 손으로 보이는 건 잠시뿐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람의 몸으로 보이는 걸 알고서는 우리도 깜짝 놀랐다. 게다가 살갗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손은 상당히 관능적이다. 그래서 혹시 손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그렇게 느낄 수 있게 작품을 만들었다.
오직 손으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가장 어려운 점은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손의 한계다. 그럼에도 그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작게 만든 것이 가능성을 크게 열어주었고, 크게 만든 것은 현실이 됐다. 설령 세트가 진짜처럼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히려 관객이 받은 인상과 상상력이 그 자신을 더 먼 곳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인상적이다. 어떤 기준으로 구성했나.
우리 모두 각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골랐다. 누구는 바로크 음악을, 또 취향에 따라 오페라나 샹송, 10대 청소년들이 듣는 음악을 택했다. 각기 다른 음악들이 섞인 셈이다. 한편으론 감정적인 이야기와 대비를 이루는 음악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장난감·모래로 만든 사막과의 대비도 고려했다. 그것들은 가짜인 것 같지만 매우 감성적인 음악과 함께 보고 있으면 진짜처럼 보인다.
‘사람’ 그리고 ‘사랑’이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손으로 사람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독특한 경험이다. 작은 장난감과 인형을 가지고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과거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모두는 인형을 갖고 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놀았다. 그 유년 시절의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자 어른을 위한 이야기이다.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