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매리너(1924~)와 함께 90대 현역 지휘자로 꼽히는 스타니스와프 스크로바체프스키(1923~)가 지난 3월 14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위해 로열 페스티벌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2년 10월 런던 필과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한 이후로 2년 만의 런던 행차였다. 런던 필은 2012년 실황을 LPO 레이블로 발매한 데 이어 이날 역시 실황 녹음을 준비했다. 무대에는 제1바이올린에 이지현, 제2바이올린에 김정민이 앉아있어 친근함을 주었다.
지난해 10월, 90세 생일을 맞이한 스크로바체프스키는 2013/2014 시즌에도 세계 도처에서 황혼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과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을 시작으로 11월 도이치 라디오 필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연말에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을 함께 했다. 올 2월엔 그가 20년간(1960~1979)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던 미네소타 오케스트라가 열어준 90세 기념 공연에서 1960년 자신이 감독 자격으로 악단을 처음 지휘했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주하면서 현지 올드팬의 향수를 자극했다. 페스티벌 홀에도 1962년 런던에 데뷔한 이래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노장의 현재를 확인하려는 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미국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벤저민 베일먼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에 이어 이날의 메인 프로그램은 역시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이었다. 2011년 5월, 급환으로 공연을 취소한 오자와 세이지의 대역으로 25년 만에 베를린 필에 오를 때도 연주했던 곡이다. 1990년대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현 도이치 라디오 필)과의 브루크너 전집 앨범에선 세세한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어 구조를 형성하는 노장 특유의 유장한 흐름이 도드라졌던 곡이다. 작곡가이기도 한 스크로바체프스키는 창작자의 시점에서 악보를 읽으며 부족함이 있다고 느낄 땐 수정을 가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는 노바크 에디션(1889)을 기본으로 하면서 하스 에디션과 개정판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날은 노바크 에디션을 썼다.
귀에는 소형 보청기를 차고 구부정한 어깨에 느린 걸음으로 무대 중앙에 들어선 지휘자가 1악장부터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려 분투했다. 음반에서 스크로바체프스키의 브루크너는 뛰어난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악보 위의 모든 음을 낭비하지 않고 소리로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뢴트겐의 X선” 같다는 평도 들었다. 그러나 런던 필과의 실연은 균형감과 스케일이 상충할 때 노지휘자가 어떤 선택을 갖고 가는지를 명확히 보여줬다. 그가 우선한 가치는 스케일보다 균형감이었다. 리허설부터 악기별로 속도·강약·주법의 제시가 잘게 지시되었고, 총주와 섹션의 거듭된 연습이 치밀하게 이뤄졌다. 악기군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바톤의 사용은 2000년대 후반 자신이 감독으로 재직한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 시절보다는 덜했지만 엄격함의 기조는 그대로였다. 1·2·3주제가 금관과 현악으로 나뉘어 제시될 때마다 미니시리즈의 각 에피소드가 꼬리를 물 듯, 개별 파트가 그 국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흡사 미니어처로 감상하는 듯한 브루크너의 느낌은 2악장과 3악장을 거치면서 점차 강도가 세졌다. 슈만을 떠올리게 하는 서정적인 2악장에선 논비브라토로 선율의 방향을 잡아간 반면, 격렬한 스케르초의 3악장은 추진력을 만드는 장면마다 강력한 비브라토가 진행됐다. 악장의 특징을 소리로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론 세미나로도 충분한 해석이었다. 4악장에서는 평소 그가 인터뷰에서 강조하던 연주의 목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작곡가는 악보에 쓸데없는 소리를 쓰지 않는다. 악보에 적힌 이상 모든 소리를 청중에게 들리게 하는 것이 나의 목표”라는 신조처럼 스트링의 빠른 움직임과 팡파르의 코랄 사이에 그동안 잘 들을 수 없던 자잘한 음형의 조각들이 부서졌다. 서 있기만 해도 숭고해보이는 90대 거장. 원숙기를 지나 완숙기에 접어든 미스터 에스(Mr. S)가 그렇게 서 있었다.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사진 Toshiyuki Ur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