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영국 로열 발레의 일본 투어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역 연기를 마친 최유희를 만났을 때다. 그녀는 2013/2014 시즌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 바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고 했다. 새 시즌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주역 오로라 공주에 캐스팅된 기쁨과 기대가 표정에 가득했다. 그동안 최유희는 애슈턴·도웰·휠던의 재안무가 버무려진 2006년 개정판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조역인 크리스털 샘물의 요정이나 플로린 공주 역할을 소화해왔다. 특히 플로린 공주는 로열 발레 입단 2년차인 2004년, 나탈리야 마카로바의 추천으로 캐스팅을 따냈고, 도쿄 아오야마 극장에서 열리는 ‘로잔 콩쿠르 입상자 갈라’에서 자주 선보일 만큼 특별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케빈 오헤어로 단장이 바뀐 뒤 한동안 그녀가 애착을 갖고 있는 애슈턴·맥밀런의 작품에서 주요 배역을 놓치는 감이 있었는데, 지난 2월 26일 드디어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료이치 히라노를 파트너로 오로라 공주 데뷔 무대를 가졌다.
알리나 코조카루가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로 이적하면서 명실상부한 로열 발레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한 나탈리야 오시포바가 코번트 가든에 오르기로 한 3월 27일, 공연을 불과 6시간 앞두고 캐스팅 변경 공지가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오시포바의 갑작스런 등 부상으로 이날 오로라는 최유희가 대신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는지 당일 저녁에 배포된 캐스팅 안내에는 여전히 최유희가 크리스털 샘물의 요정을 맡는다고 적혀 있었다. 공연 전 무대로 나온 오헤어는 오시포바의 부상으로 인해 최유희가 오로라 공주를 대신한다는 내용을 관객에게 전했다. 한쪽에서 “환불은 어떻게 할 거냐”라는 비아냥이 나오자 “유희가 어때서”라고 다른 관객이 받아쳤다.
최유희의 파트너는 매슈 골딩이었다. 워싱턴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 출신의 골딩은 2002년 로잔 콩쿠르에 최유희와 함께 출전했다. 2009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이적한 그는 2012~2013년 연속으로 브누아 드 라 당스(‘춤의 영예’라는 뜻으로, 1991년 국제무용협회 러시아 본부에서 제정한 무용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2월 로열 발레로 이적한 골딩은 현재
수석무용수다.
오시포바와 리허설을 마쳤던 골딩은 공연 당일에서야 최유희와 잠깐 호흡을 맞췄다. 골딩은 ‘가디언’ 지의 지적처럼 파트너십이 절실한 부분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느낌을 전달할 여유가 없었다. 최유희 역시 자신의 신체적 장점을 살려 작품이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끌고 가는 데 전력했다. 비교적 작은 키에도 움직임의 범위가 큰 그녀는 클래식 발레의 깔끔한 기교가 돋보였다.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장미 아다지오’에서는 날카로운 균형감과 섬세한 포르 드 브라(팔의 연결적인 움직임)로 관객을 압도했다.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음악을 즐기는 맵시는 그녀가 작품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해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녀를 입단 때부터 개인 지도했던 로열 발레의 레슬리 콜리어가 연상됐다. 1970~1980년대 맥밀런·애슈턴과 교류한 콜리어는 당시 로열 발레에서 어떤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지 최유희에게 전수해왔다. 목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꼿꼿한 자태에 위트를 몸으로 녹여내는 노련미에는 로열 발레의 향취와 함께 영국식 발레의 유머가 담겨 있었다. 평소 최유희는 지휘자에게 무용수에 맞춰 템포를 조절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데, 이로 인해 지휘자의 음악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가디언’ 지는 최유희의 무대에 별점 네 개를 부여하며 “어떤 상황에도 무대를 끌고 나갈 능력으로 발레리나를 평가한다면 최유희는 지금 바로 수석무용수로 승급되어야 한다”라고 평했다. 최유희는 4월 5일과 9일에도 오시포바를 대신해 오로라 공주를 열연했다.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사진 Dave Mor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