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올해로 46세 노장 발레리나 강수진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잠시 후 사뿐히 땅 위에 착지한 후에도 그녀의 긴 팔은 여전히 공중에서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인스브루크 무용단의 ‘나비부인’은 우아함과 처절함을 동시에 담아낸 여주인공 초초의 독주였다.
강수진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엔리케 가사 발가의 안무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무엇보다 ‘나비부인’의 주제와 줄거리를 전개하는 구성, 연출의 핵심 콘셉트가 부재했다. 그러니 그 위에 얹어진 음악과 무용이 하나의 맥을 가질 수 없었다. 무대의 한 부분처럼 차지하고 있는 두 대의 일본 대북 연주와 그 외의 음악들은 같은 뉘앙스를 품어내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과 스윙이 물과 기름처럼 겉돈 것은 각각 대조를 이루며 분위기를 전환하지 못하고 서로의 흐름을 끊어놓는 역할에 그쳤기 때문이다.
흑인 무용수를 ‘음’으로, 백인 무용수를 ‘양’으로 설정해 두 여성 무용수는 시종일관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핑커톤과 초초, 동과 서, 생과 사 등의 소재를 음양 철학으로 풀어보겠다는 안무가의 의지가 엿보이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초초와 함께 한 3인무 외에 ‘음’과 ‘양’은 전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전체적인 연출에서 아쉬움이 남을지라도 멋진 파드되를 만나는 순간에는 너그러이 안무가의 역량을 인정하게 된다. 이번 공연에서 핑커톤과 초초의 파드되를 기대했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막 사랑의 파드되와 2막 슬픔의 파드되에서 기술적으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고, 고전발레의 기술을 넘어선 세련된 이미지를 잡아내기 힘들었다. 핑커톤 역을 맡은 라미레스의 연기는 크게 부족했으며 강수진의 절절한 표정이 그나마 상반된 감정을 대변할 뿐이었다. 초초가 할복하는 마지막 장면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벚꽃 속에 흩뿌리는 붉은 피가 강한 인상을 남겼으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람에 여운을 남기지 못했다.
우리는 동양 문화, 특히 일본 문화에 심취한 안무가들이 만든 작품을 많이 봐왔다. 특히 베자르·킬리안과 같은 거장들은 일본인들조차 감탄할 정도로 오랜 연구를 밑천 삼아 일본의 색을 과감하게 춤췄다. 그런 깊이를 기대했던 때문일까. 일본의 색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올해 초, 강수진은 국립발레단 수장직을 맡고도 무용수로서 은퇴하지 않았다. 예술감독직에 전념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얻는 이점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외적으로 비칠 발레단의 위상은 물론, 무용수들과의 교감을 비롯해 발레단 내부에서 얻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그래서 비록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무용수로서 건재한 강수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뻤다.
그러나 저조한 작품성의 ‘나비부인’을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로 들여오겠다는 발표는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러시아와 사이가 나쁘다고 ‘오네긴’을 공연하지 않지 않느냐”라는 강수진의 말처럼 일본 게이샤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해서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50년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립발레단이 세계무대에 내로라하는 한국 소재의 레퍼토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잘 만든 나비부인’이 아니라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국립발레단에 걸맞고 세계적인 감각에 뒤떨어지지 않는 한국 소재의 레퍼토리가 강수진 단장 재임 중에 만들어질 것을 고대한다.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