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3월 12~29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엘리엇의 황무지와 최치언의 잔인한 4월
최치언의 신작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 남산예술센터 무대 위에 오른다. 제목이 길다. 띄어쓰기도 없는 불친절한 제목이다. 최치언은 시인이다. 시인답게(?) ‘시적 허용’의 특권을 마구 남용했다. 공연은 의도적 B급 코드를 표방한다. 이름하여 ‘무협 액션 판타지 장르’. 일단 주인공의 면면이 그렇다.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홍콩 무협영화 ‘황비홍’을 합성한 주인공 황백호가 나오고, ‘변강쇠’의 옹녀와 성인 포르노물에서 금지된 욕망을 자극하는 제복 입은 여자를 연상시키는 경찰관 옹양이 등장한다. 황백호의 낡은 바바리코트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패러디한 것이며, 주윤발이 항상 입에 물고 다니는 성냥개비 대신 백치미의 여배우 장미는 핫도그를 들고 황백호를 따라다닌다. “오빤 내 핫도그야!” 핫도그는 황백호의 마초적 남성성을 상징하며, 아동용 만화영화 같은 유치함으로 최치언식 B급 코드를 완성한다.
“이번 공연은 기존의 연극처럼 억지로 주제의식 막 우겨넣고 뭔가 있는 척하는 그런 연극이 아닙니다. 골 비어 보여도 좋으니까, 그냥 재밌게만 하세요. 재미가 주젭니다!” 극 중 공연감독의 말이다. 공연은 전국적으로 소뿔이 잘려나가는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급파된 형사들의 이야기가 삼중의 극중극 장치로 전개된다. 하지만 극 중 황백호가 용의자를 취조하면서 “대한민국 민주경찰은 사람 안 때린다. 말로 때린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용의자가 무대 위 사각 링 안에 갇혀 이리저리 쓰러지고 나뒹굴듯 이 극의 주제가 ‘재미’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속지 마라. 속이는 놈은 항상 처음부터 속인다.” 두 번째 극중극에 등장하는 수사관 K가 친절하게 힌트를 준다. 그런가 하면, 남산예술센터 밖에는 노란 폴리스 라인이 칭칭 감겨 있다. ‘골 빈 놈’처럼 재미나 던져주면 받아먹는 곳이 극장이냐는 최치언식 독설이 곳곳에서 강펀치처럼 날아온다. 삼중의 극중극 장치는 결국 현실에 대한 강력한 소환이 목적인 것이다.
제목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에서 알 수 있듯, 원래 이 공연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촛불집회 당시 쓰여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뒤늦게 공연이 올라가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이 작품의 운명인 걸까? 어느 5월 누군가의 죽음 이후 수사관들이 ‘논두렁’ 시인이 되고,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삼류 소설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극 중에서 공연감독은 말한다. “이 시대는 기자가 작가다!” 세 번째 극중극에 등장하는 진짜 수사관 A도 말한다. “국민 모두가 작가고 기자다!” 황백호의 스승 나진팔도 환영처럼 말한다. “죽을 수 있을 때 죽어라. 그것이 비참해지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죽을 수 있을 때 죽지 마라. 그것이 비극이 되지 않는 길이다.” 절벽 위 누군가의 죽음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황백호는 “이제 나는 사랑 대신 정이다!”라며 자조한다. 이제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꿈꾸는 대신 세속적인 치정만으로 이 세상을 견뎌야 하는 걸까? 핫도그 하나 달랑 들고?
“그대 위선적인 민중이여! 나의 동포여! 나의 형제여!” 황백호의 이 대사는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나오는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의 형제여!’를 변형한 것이다. ‘황무지’는 황백호가 등장하면서 들고 나온 시집이자, 진짜 수사관 A가 집어던지는 시집이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단테의 ‘신곡’ 속 지옥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최치언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엘리엇의 ‘황무지’, 곧 단테의 지옥의 묵시록으로 압축하고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세월호의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4월의 이야기를 갖게 됐다. 또다시 4월이 지나간다. 극장 밖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가? 밥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의 라이브 밴드 음악과 함께 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황백호는 다시 위대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사진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