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12월 13일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
백조와 흑조, 저주받은 공주와 작가
‘백조의 호수’는 박근형의 신작이다. ‘백조의 호수’는 동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로 백조·흑조·청조·홍조·타조·불사조에 이르기까지 온갖 조류가 나온다. 개화기 ‘금수회의록’처럼 격변기마다 동물 우화가 인기다. 그런가 하면 공연 시작 전 하우스 음악으로 온갖 군가가 나온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우리는 무적의 향토예비군!” 군가 메들리와 함께 극이 시작된다. “모든 아버지들은 불쌍하다” “모든 아들들은 불쌍하다” 대사도 나온다. 검열 논란의 바로 그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박근형 스스로 패러디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러니다. 아무도 볼 수 없었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제목만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동화에 의하면 백조는 저주받은 공주다. 공연은 1945년 시점에서 시작한다. “1945년 내 조국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공연은 저주받은 공주 백조와 그녀의 남동생 청조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기고 반란군을 피해 도망가는 공주의 이야기는 ‘만주전선 2’와 같이 가상의 역사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쫓기는 공주 일행을 돕는 노인은 붉은 조끼를 입었고, 식인 상어 떼가 출몰하는 무서운 바다를 건너 도착한 섬의 망명객들은 신분증으로 붉은 완장을 찼다. 동시에 이들은 모두 노랑머리에 카우보이 조끼와 나팔바지 차림이다. 이들은 암살을 모의하며 도시락 폭탄을 준비한다. 비장하게 단지(斷指) 의식을 치르고 검은 일장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단지 의식의 기념 일자는 1945년 10월 26일이다.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식민 잔재와 미국의 신질서와 군사정권의 현대사를 과감하게 한데 섞어 몽타주로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엔 시침 뚝 떼고 말한다. “이 모든 일이 1945년 그 해에 다 일어났다.”
‘백조의 호수’ 동화를 웃음기 하나 없는 비장한 코미디로 완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박근형의 배우들’ 덕이다. 그날의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 등에 ‘배신’의 두 글자를 칼로 깊숙이 새겨 넣는 백조 강지은, “깨깨깨깨” 비명을 지르며 극장의 벽에 온몸을 부딪치는 타조 김동원, ‘환상의 밀가루’와 사랑에 취해가는 청조 이원재와 홍조 조지승, 흑조 장군 이승훈, 불사조 계미경, 모든 배우가 자기 색깔이 분명하고 박근형 연극의 색깔을 제대로 내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서정적 광기와 연민과 울분이 묘하게 뒤섞이는 장면들은 엄청난 질량으로 공간에 구멍을 내버리는 블랙홀처럼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빨간 다라이’ 하나를 배라고 우기고, 십자가 돛대 하나 달고 식인 상어 떼의 무서운 바다를 건너는 처참한 공포를 함께 느끼게 하는 극단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이 모든 일이 1945년 그 해에 다 일어났다.” 이 우격다짐이 곧이곧대로 들리는 것도 이러한 광기와 연극성 덕에 가능한 일이다. 이 공연을 통해 박근형은 대한민국의 현재 시간이 1945년에 멈춰 있다는 메타적 시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박근형이 동시대 작가로 관객과 함께 현재진행형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한계가 느껴진다. 박근형의 시계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작가로서 분명히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계가 아무리 열심히 돌아도 1부터 12까지의 숫자에 갇혀 있다면, 마치 백조와 청조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1945년 일 년 12개월 안에 갇혀 있듯이.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미래라는 출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전의 박근형이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청춘예찬’처럼 교과서식 동화를 생짜의 현실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잔혹동화식 현실도 아닌 생짜의 현실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박근형은 현실을 자꾸만 동화로 보여준다. 박근형은 저주받은 시대의 저주받은 작가로만 남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 시대의 작가를 마녀의 저주로 잃고 싶지 않다.
사진 극단 골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