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4일~2016년 1월 1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그들의 권리를 향한 시선
‘검열’로 논란이 된 2015년 연극 창작산실 선정작들이 드디어 첫 작품 ‘하나코’의 공연으로 관객들과 만났다. 실체가 없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 제작 거부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던 제작진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잘 만든 작품으로 행동하겠다는 의지로 준비한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 첫 테이프인 ‘하나코’(대본 김민정, 연출 한태숙)는 공교롭게도 위안부를 소재로 삼고 있다. 정말 공교롭다. 작품의 공연 시기와 한·일 협정이 맺어진 날짜가 겹치기 때문이다. 작가나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이 작품은 그 시의성 때문에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실 위안부는 소재 자체가 자폐아나 민족적 영웅만큼 견고하다. 여기서 견고하다는 것은 작가의 창작적 상상이 발휘될 여지가 적다는 소리다. 그렇다 보니 익숙하고 뻔한, 그래서 진부한 소재를 어떻게 다르게 변주할 것인가가 연극 ‘하나코’의 중요 숙제인데,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비교적 위안부를 형상화하는 익숙한 패턴을 벗어났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부가 수면으로 떠오른 후 다양한 연극 작품이 무대에 올랐는데, 그 처참한 실상을 보고하고 재현하는 내용에서 여성과 인권의 문제로 주제가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극악한 폭력에 의한 ‘피해자’라는 시선이었다. ‘하나코’는 그러한 시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위안부에 대한 우리의 다양한 입장들을 건조하게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위안부에 대한 관심에 대한 각자의 이기적 속성에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이다. 위안부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여성학자 서인경, 그리고 그 연구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는 PD 홍창현, 캄보디아의 렌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소개한 약재상 박재삼 등 위안부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행위가 개인의 이기적 욕망이 배제된 진정성의 발로인가를 묻는 태도는 위안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게 한다. 명분과 당위, 개인적 이익을 떠나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건의 구체성에 접근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이자 중요한 출발점이다. 따라서 기획자 김지현의 표현대로, 위안부는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라는 전환적 시선이 필요하고 이 작품은 그것을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감상과 비극적 정서에서 벗어나고자 한 제작진의 의도는 무대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로시니엄 무대보다 관객들이 무대를 둘러싼 구조를 선호하는 한태숙은 이번에도 객석을 극장의 두 면에 위치시켰다. 소실점이 된 무대의 한쪽 구석은 투명 아크릴판을 사용하여 공간을 구분했고 관객들은 그 안쪽과 바깥을 통합적으로 관찰하는 입장이 되었다. 한분이 할머니가 죽은 동생 금아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말할 때 투명판 안에서는 위안부 한분이를 관리하던 오또상이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오열한다. 관객의 눈에 동시에 들어오는 이 장면은 한분이의 “미안합니다”가 복합적 의미임을 직접 보여주는데, 투명판 안의 오또상과 결합한 “미안합니다”는 사죄와 반성의 진정성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반성과 사죄는 이런 것임을 한분이 할머니의 “미안합니다”와 오또상의 행위로 관객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다만, 무대 구조로 생겨난 사각(死角) 때문에 사죄와 반성의 진정성과 그 울림이 객석 곳곳에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배우 예수정은 한분이 할머니의 입으로 담담하게 일본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참 당연한 이야기다. 너무나 당연해 잊고 있었다. 할머니들 모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짓밟을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할머니들의 지극히 당연한 권리를 지켜주지 못했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은 그 역사를 반성하고 권리를 회복하는 것일 터,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사진 아르코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