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바비컨센터는 아트센터의 다양한 인프라를 이용해 예술가의 음악 세계를 조명하는 ‘아티스트 스포트라이트’(Artist Spotlight)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2014/2015 시즌, 미국의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가 같은 기획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2015/2016 시즌은 미국 태생의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Renée Fleming)이 주인공으로 정해졌다. 플레밍은 2016년 2월과 4월, 런던을 방문해 협연과 리사이틀, 마스터 클래스와 토론회, 영화 상영회를 주재한다. 플레밍 관련 행사는 2015년 바비컨센터 후원회에 합류한 크레디트 스위스 런던 본부의 운영감독 존 머리의 재정 지원으로 성사됐다. 오랫동안 ‘인디펜던트’지와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서 활동한 존 머리는 2010년부터 푸르덴셜의 홍보 감독을 역임하면서 기금 조성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50대에 접어든 르네 플레밍(1959년생)의 인기는 2010년대 들어서면서 극장 밖에서 더욱 거세지고 있다. 1991년 ‘피가로의 결혼’으로 메트 오페라에 데뷔한 이래 헨델과 모차르트, 슈트라우스로 이어지는 정통 오페라에 능하던 그녀는 2014년 슈퍼볼에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부르면서 미국 내 대중 인지도를 급상승시켰다. 최근에는 메트 오페라 ‘라이브 인 HD’와 ‘링컨 센터 라이브’의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백스테이지를 자연스럽게 중계하는 능숙한 진행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런던 바비컨센터의 이번 르네 플레밍 프로그램은 지난 2월 3일 다큐멘터리 ‘미국의 목소리들’(American Voices) 상영으로 시작됐다. 2013년 11월 미국 PBS가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동명의 페스티벌을 스케치한 이 영화에서, 플레밍은 저명 코치들과 신예 가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클래식 음악과 가스펠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미국 성악의 저력을 규명하려 했다. 다가올 4월 5일에는 바비컨센터 내 영화관에서 플레밍이 출연한 2008년 메트 오페라 개막 갈라가 상영된다.
플레밍은 2월 5일 자신을 위해 쓰인 두 곡을 사카리 오라모/BBC 심포니와 협연했다. 안데르스 힐보리의 ‘스트랜드의 시에 붙여(Strand Settings)’, 로빈 홀로웨이가 편곡한 드뷔시 ‘황홀경(C′est L′extase)’ 모두 영국 초연 곡으로 ‘파이낸셜타임즈’지는 “모험적 시도”로 평가했다. 바비컨센터의 어쿠스틱 특성상 가수의 저음역이 홀 안으로 퍼지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희귀 레퍼토리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위그모어홀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플레밍은 성량이 아니라 단아한 성악적 리리시즘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미국인이 감미로운 프랑스어 딕션으로 영국 관객을 파고드는 장면은 1990년대 후반 키리 테 카나와를 연상케 했다. 성공한 가수가 전성기를 고급스럽게 마무리하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4월 6일에는 같은 곳에서 피아니스트 하르트무트 횔의 반주로 슈만과 슈트라우스 리트 독창회가 열린다.
지난해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컨설턴트로 활약하는 플레밍의 교육자·오페라 리더로서 역량은 2월 4일 ‘21세기 성악가’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빛을 발했다. 토론회에는 플레밍을 발굴한 폴 모슬리 데카 레이블 사장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고, 존 루빈 왕립 이비인후과 병원 교수는 가수 재활 프로토콜의 보강을 주장했다. 패널들이 오페라 스타 부재에 시달리는 영국 성악계 현실이 도제식 교육의 전근대성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도출하자, 플레밍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한 학생들이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