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27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절제된 연출 속에 빛나는 휴머니즘적 통찰
일단 이 작품을 둘러싼 모든 논란과 사건을 접어두고 공연만 놓고 보자.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작가로서 박근형이 보여주는 성찰의 깊이와 연출가로서 박근형이 보여주는 절제미와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먼저 작가 박근형. 그동안 그의 작품들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밑바닥 인생의 일상이 전제되고 그것을 견뎌내는 독특한 캐릭터가 중심이었다. 즉, 보편성에 대한 특수성이 강조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으로 접근 방향을 바꾸었다. 전쟁과 군인이라는 소재 자체가 지닌 특성에 힘입은 바도 크겠지만 구체성과 개별성을 넘어선 근원과 근본에 대한 작가로서 고민이 심화된 부분이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 역사와 기억, 사건에 대한 근원과 근본에 대한 탐색은 시대적 특수성, 상황적 특수성을 넘어 이제 보편의 문제로 확장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는 주목받는 특별한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교차되는 네 개의 사건에 등장하는 ‘모든 군인’이 주인공이고, 그래서 그들이 마주한 각각의 죽음이 중심 사건이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군인들의 보편적 정서로 인해 모든 군인은 불쌍하고, 나아가 모든 인간이 불쌍하다. 작가 박근형은 개별과 특수를 넘어 보편을 지향함으로써 그것에 내재한 근원-사회구조적 시스템에 대한 통찰이 깊어졌음을 이 작품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는 연출가 박근형. 지금까지 그가 창작과 연출을 겸한 무대는 대체로 성글고 거칠었다. 무대 디자이너 박상봉은 그것에 변화를 꾀했다. 무대 위에는 1미터 정도의 단을 만들었고 무대 정면 앞부분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처리했다.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허공에 뜬 것 같은 무대. 박근형 연출은 이 무대와 남산예술센터의 극장 구조를 적극 활용하여 네 개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도록 배우들의 동선을 다양하게 구성했다. 여배우들은 무대 후면 2층 난간에서 합창을 하고, 객석의 계단은 집이 되기도 하고 군인들이 구보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주요 사건들이 전개되는 단은 몸싸움 끝에 배우가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일명 ‘후지산 폭격’으로 명명되는 얼차려를 통해 항상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군인들의 불안한 삶을 전달한다. 애잔히 부르는 노리코의 엔카, 오프닝곡으로 사용한 송창식의 ‘병사의 향수’가 전해주는 처연한 정서는 이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들려주었다. 거기에 21명의 배우가 고르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덕에 이 작품은 어떤 것도 과잉되지 않은 절제된 무대가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군인,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배가시켰다.
이제 논란으로 돌아가 보자. 이 작품은 작년 연극계를 휩쓴 검열 사태의 태풍의 눈이었다. 2015년 창작산실 지원 공연의 선정작이었으나 담당 직원의 압력으로 박근형이 자진 철회하면서 지원 작품의 명단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논쟁과 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어떤 것도 선명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데 실상 공연된 작품을 보면 전쟁과 군인이라는 보편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이 왜 문제가 된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관객들과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이 작품의 공연 제작에 힘을 쓴 서울문화재단과 남산예술센터 관계자들에게 관객 입장에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작품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모든 군인은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과오와 그것에 대한 심판이 희석되면 안 된다. 모든 군인을 불쌍하게 만든 사회 시스템과 전쟁의 폭력,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의 욕망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지만, 그 군인들로 인한 피해자들은 더더욱 불쌍하기 때문이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