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4월 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탄탄한 기량, 빛을 발하다
새하얀 튀튀를 입은 32명의 여자 무용수가 무대 뒤, 상단에서 한 명씩 등장한다. 푸르른 조명 아래 나타난 망령들이다. 긴 행렬은 내리막길을 내려와 지그재그로 무대를 가로지른다. 한 다리를 뒤로 높이 들어 균형을 잡는 ‘아라베스크 팡셰(arabesque penchée)’를 46번 반복하는 이 장면에서 국립발레단은 탄탄한 기량과 환상적인 연출, 모두를 선보였다.
발레의 꽃은 단연코 남녀 주인공이 추는 파드되(2인무)다. 하지만 고전발레 작품 중 ‘라 바야데르’를 감상할 때는 늘 3막 ‘망령들의 왕국’을 집중해서 보게 된다. 고전 발레의 핵심 키워드인 정형미를 감상하면서 발레단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을 든 높이, 뒤로 젖힌 허리의 각도는 물론 시선 처리까지, 모두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군무진의 팀워크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3년 전,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의 ‘라 바야데르’를 레퍼토리로 도입한 국립발레단은 이후 꾸준하게 완성도를 높여왔는데, 특히 이번 무대의 3막은 그 결정판이었다.
‘라 바야데르’의 또 다른 매력인 ‘관능미’는 작품 전반에 걸쳐 넘쳐났다. 니키아 역의 박슬기(4월 2일 7시 공연)는 허리를 드러낸 의상 덕에 심장 깊숙한 곳의 호흡까지 보여주며 사랑의 슬픔을 표현했다. 2막 솔로 춤은 우아한 무희의 자태를 잃지 않으면서도 요염함을 듬뿍 담아냈다. 단지 독사에게 물리는 장면에서의 2퍼센트 부족한 극적 표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니키아의 적수 감자티 역의 신승원은 질투 섞인 표정으로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한낱 무희에게 사랑을 빼앗긴 것을 알고 분노하는 장면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더니, 이어 전개되는 약혼식 장면에서는 가진 자의 교만함까지 연기하며 매력을 발산했다.
일 년 만에 무대에 복귀한 이동훈(솔로르 역)은 둘 사이에서 더욱 강해진 점프 동작으로 남성미를 과시했다. 더욱이 상체에 힘을 빼고 춤을 추는 노련함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사원이 무너지는 마지막 장면을 삭제하는 등 블록버스터급이라기엔 다소 소박한 연출이 특징이지만, 대신 춤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주역과 군무의 춤은 물론 디베르티스망으로 등장하는 황금신상의 춤·북 춤이 더욱 부각된 것도 그 이유다.
2년 전 강수진 예술감독은 취임사에서 “단원들의 기량 향상에 승부를 걸겠다”고 말했다. 실력 보강은 예술단체의 수장으로서 맡은 당연한 소임이겠지만, 거창한 포부 대신 구체적인 목표를 내세운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강수진 감독은 매일 단원들과 함께 기본 훈련에 동참하고, 리허설을 빠짐없이 참관하는 등 외부 활동보다는 발레단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평가라도 받듯, 취임 후 처음 올렸던 ‘라 바야데르’를 올해 첫 레퍼토리로 다시 선보였다.
결과는 환호할 만했다. 단원 개개인의 실력은 눈에 띌 만큼 향상됐으며, 특히 섬세한 동작에서는 긴장감을 잃지 않고 음악을 충분히 즐기는 여유로움까지 보였다.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전력 완비의 첫걸음’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무대였다.
사진 국립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