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객석’ 기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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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9월 2일 9:03 오전

다음 세대를 위하여!

‘투란도트’

가족오페라 ‘투란도트’

8월 8~18일 |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함께 이 분야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에 대한 중요성도 높아졌다. 이는 무대 위의 뛰어난 연주자를 발굴 및 육성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이들과 함께 공연장을 채워나갈 다음 세대의 관객을 키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첫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도 첫인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듯, 언제 어디서 어떤 음악을 누구의 연주로 듣느냐도 앞으로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여기에서 지속적인 관객으로 남을 것인지, 일회성 관람으로 그칠 것인지가 결정된다.

2001년부터 19년간 이어진 가족오페라 시리즈는 청소년과 오페라 초심자에게 흥미를 끌고 오페라의 문턱을 낮추고자 기획되었다. 연극 연출가에게 연출을 맡기고, 극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일부 출연자로 뮤지컬 배우와 연기자를 기용하며, 오디션을 통해 젊고 재능 있는 성악가들을 발굴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더해졌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은 실력 있는 연출진과 출연진, 그리고 높은 수준의 음악을 구현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올해 예술의전당이 선보인 프로그램은 푸치니 ‘투란도트’. 연출은 표현진이 맡았고, 지휘자 최희준이 이끄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공연장은 가족오페라다운 모습을 보였다. 방학을 맞아 엄마 손을 잡고 온 어린 학생부터 커플, 2세대 이상의 대가족까지 저마다 들뜬 모습으로 자리를 채웠다. 전 3막 5장의 ‘투란도트’는 약 2시간 동안 원어(이탈리아어)로 펼쳐졌다. 스토리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자막에 의지해 공연을 봐야 하니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관람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음악이 그 자체로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어린 관객들의 집중도는 꽤 높았다. 핑, 팡, 퐁이 등장해 익살스런 표정과 제스처로 노래할 때는 웃음이 터졌고, 칼라프 왕자가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맞추어갈 때 흐르는 긴장된 음악은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웅장한 합창과 오케스트라 사운드 또한 귀를 사로잡았다. 연주는 물론 무대와 의상까지 흔히 공연 타이틀에서 ‘어린이’ 혹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기대하게 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무대였다.

‘투란도트’

혹자는 말한다. 가족오페라가 너무 어려운 것 아니냐고. 그러나 아주 친절하게 느껴지진 않아도 원작이 가진 아름다움에 조금씩 물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다음 세대의 관객을 구축해 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날 어린 관객들이 보여준 관람 분위기가 그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이미라

 

무대 위에서 그치지 않는 질주

뮤지컬 ‘벤허’ 7월 30일~10월 13일 |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벤허’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일수록 대중적이기는 쉽지 않다. 뮤지컬 ‘벤허’에서 신의 존재가 전면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대중성을 고려한 장치라고 자칫 생각하기 쉽다. 1막에서 지쳐 쓰러진 유대인 벤허에게 물을 주는 행인으로, 2막 절정의 넘버 ‘골고다’에서는 가냘픈 모습으로 벤허에게 깨달음을 주는 인물로 잠시 등장할 뿐, 크레딧 어디에도 예수 역을 연기했던 사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생각보다 강렬하여, 벤허 역을 연기한 배우들은 예수가 주요 배역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보다 이 작품이 훨씬 종교적이라고 말한다. 실제 원작자인 소설가 루 월러스는 누구도 예수를 실제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20세기 영화·연극 연출가들은 이러한 원작자의 뜻을 존중하여 스토리상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예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뮤지컬 ‘벤허’ 역시 그러한 뜻을 따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예수의 강한 존재감에도 뮤지컬 ‘벤허’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2017년 초연 당시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앙상블상, 제2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무대예술상 등을 휩쓴 이유는 1959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에서 등장한 스펙터클한 전차 경주 장면을 무대 위에서 색다른 방법으로 구현해낸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실제 크기의 말이 살아 움직이듯이 구현한 무대 기술은 그 어떤 라이선스 뮤지컬에서도 본 적 없는 장면으로, 한국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란 듯이 증명해냈다. 해당 장면에 대한 입소문으로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데서 그쳤다면 오히려 관객의 실망감만을 자아냈을 것이다. 뮤지컬 ‘벤허’는 서사·무대·넘버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을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었다.

뮤지컬 ‘벤허’에서 놀라운 무대 장면은 전차 신만이 아니다. 해상 전투 중 물에 빠진 로마 장수 퀀터스를 벤허가 구해내는 장면은 무대 전체 높이를 사용해 심해를 표현했고, 그 위를 떠다니는 배우들의 몸동작을 와이어를 통해 구현했다. 대극장 뮤지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스펙터클을 구현해낸다고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무대 구성을 찾아볼 수 없었고, 앙상블들의 완벽한 합은 무대를 빈틈없이 채웠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모차르트!’ ‘삼총사’ 등에서 활약한 음악감독 이성준의 음악은 솔로곡과 합창, 비장함과 서정성을 효과적으로 넘나들었다. 역동적인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고음과 파워풀함이 필요한 넘버를 흔들리지 않고 내지르는 주역 배우들의 가창력 역시 묵은 체증을 씻어냈다.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간혹 서사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나,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등장인물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서사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넘버에서 폭발하는 인물의 감정을 통해 서사의 부족함은 말끔히 사라졌다. 오랜만에 단순히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신선한 충격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작품이었고, 그 작품이 라이선스 뮤지컬이 아닌 국내 창작 뮤지컬이란 점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전 세계 어느 곳보다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해외 관계자들의 말이 신빙성 있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권하영

 

더 무모하게, 더 불온하게

음악극 ‘낭랑긔생’

7월 6일~8월 18일 | 정동극장

‘낭랑긔생’

지난해 겨울 떠난 스페인 여행 중, 카탈루냐 음악당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을, 그라나다의 작은 선술집에서는 플라멩코 공연을 봤다. 공연장은 스페인 전통 무용을 보기 위해 모여든 전 세계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문득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은 관광자원으로 충분히 활용되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 서울 중심에 위치한 정동극장이 떠올랐다. 1995년 개관 이래 ‘전통예술무대’(2000) ‘미소’(2008) 등 상설공연을 기획해온 정동극장은 한국을 찾은 관광객에게 전통예술의 볼거리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서 정동극장을 찾은 내국인들에게는 이방인의 시선에서 새롭고 이색적으로 느껴질 법한 요소들이 빛을 바랬다. 고전에 기반을 둔 스토리 라인은 때로 진부하게 다가왔고,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고려한 전통예술의 요소는 원본과 비교해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듯 정동극장은 2017년 ‘창작ing’이라는 제작 지원 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도전적인 창작진을 발굴해 전통예술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였다.

음악극 ‘낭랑긔생’은 2019년 ‘창작ing’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1920년대를 살았던 실존인물 강향란을 모티브로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대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 신문 기사는 강향란을 ‘머리깍고 남복한 녀학생’으로 묘사했다. 사연인즉 머리를 깎은 여자는 다닐 수 없다며 배화학교에서 퇴학 처분된 기생 출신 강향란이 남장을 하고 강습소에 통학했다는 것이었다. 강향란은 매우 개인적이지만 반사회적인 의사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던 ‘단발’을 하여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매력적인 소재다. ‘탈코르셋’을 선언해야 했던 한국 여성들의 현재와도 통하기 때문이다.

‘낭랑긔생’은 과거의 인물이 지닌 서사적 공감의 요소 외에 전통음악을 재료로 만든 노래와 한국무용에서 따온 안무로 전통과 현재를 잇는다. 작곡을 맡은 음악감독 류찬은 당대 최고의 전통음악을 구사하던 기생들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던 때라는 시대적 배경을 들어 ‘퓨전국악’으로 통칭될 사운드트랙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곡이 국악을 베이스로 하나, 퓨전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릴 정도로 각각의 곡에서 동요·디즈니 음악·북한 가요·찬송가·왈츠 등 다양한 분위기가 연상됐다. 기생들의 단체 안무는 율동처럼 단순했는데, 한 손을 올린 채 제자리를 도는 원무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여자들은 현모양처가 되기보다는 불온하더라도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강향란의 외침은 100분 공연 중 마지막 15분만을 남겨놓고서야 시작됐다. 그전까지는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팔려가서, 기생은 물건 취급받는 것이 당연한 사회라서, 여성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라는, 여성들이 저항해도 ‘괜찮은’ 이유에 대한 길고 긴 설명이다. 사회적 억압에 맞선 여성이 어떻게 무모해지는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과 관습을 더 무모하고 불온하게 비튼, 발칙한 여성 서사를 기대해본다. 박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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