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니 콩쿠르 우승 후 6년, 피아니스트 문지영이 음악과 소통하는 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10월 18일 9:00 오전

피아니스트 문지영

쇼팽과 문지영의 작곡가들

문지영이 쇼팽과 만났다. 지난 8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쇼팽 협회가 주최하는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Chopin and his Europe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데뷔 무대를 가진 것이다. 슈만에게 순정을 바친 문지영은 이제 드뷔시·라벨·브람스·슈베르트로 탐구 대상을 넓히고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동양인 최초 부소니 콩쿠르 우승 소식 이후 6년, 그 소란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문지영과 그의 음악은 어떻게 변했을까?

글 박서정 기자 사진 보이치에흐 그제진스키(Wojciech Grzędziński)·더브릿지컴퍼니

INTERVIEW

피아니스트 문지영

쇼팽 협회 대표 아르투 슈클레네 &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 예술감독 스타니스와프 레쉬진스키

 

REVIEW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 – 문지영 피아노 독주회

 

REPORT

부소니 콩쿠르 더 알아보기

INTERVIEW

나의 음악은 사색과 침묵으로부터

피아니스트 문지영

부소니 콩쿠르 우승 후 6년, 문지영이 음악과 소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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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영(1995~)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수학했다. 제8회 폴란드 루빈스타인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공동 1위(2009), 독일 에틀링겐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1위 및 바렌레이터 음악상(2012), 제69회 스위스 제네바 콩쿠르 1위 및 청중상·특별상(2014), 제60회 이탈리아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 1위(2015)를 석권했다.

 

 

 

 

 

 

 

 

 

 

 

 

 

 

 

 

 

 

 

 

 

 

 

 

“원래 연주할 때 긴장하는 편이지만, 이날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어요. 아무래도 폴란드 관중 앞에서 쇼팽을 연주하는 게 편한 일은 아니니까요.”

지난 8월 30일, 문지영(1995~)은 쇼팽 협회의 초청으로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Chopin and his Europe International Music Festival)’(8.13~31) 데뷔 무대를 치렀다. 올해로 17회째를 맞은 축제는 쇼팽을 주축으로 쇼팽과 관련된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음악을 선보인다. 쇼팽이 음악적 자양분을 얻고, 쇼팽의 심장이 묻힌 땅, 바르샤바에서 매년 8월 개최된다. 거리 곳곳이 쇼팽으로 가득한 이 도시 어딘가에서는 날마다 쇼팽이 연주된다. 인터뷰는 공연이 끝나고 며칠 뒤 전화로 이뤄졌다.

누군가에겐 의아한 소식일 테다. 특히 문지영의 쇼팽을 들어보지 못한 이라면. 그에게 초청장을 보내온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 겸 쇼팽 협회 부대표 스타니스와프 레쉬진스키는 그 궁금증을 단번에 해결해준다. “연주자 섭외 기준은 단순하다. 쇼팽 콩쿠르 입상자이건 아니건, 쇼팽의 곡을 잘 이해하고 연주하는 최고의 음악가여야 한다.” 올해 페스티벌 무대에는 한국의 문지영(피아노)과 김봄소리(바이올린)를 비롯해 바로크 음악에 탁월한 파비오 비온디/에우로파 갈란테, 필립 헤레베헤/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그리고 쇼팽 해석으로 정평이 난 넬슨 괴르네(피아노)와 쇼팽 콩쿠르 우승자 라파우 블레하치(피아노) 같은 쟁쟁한 연주자들이 올랐다.

 

다시 만난 쇼팽

쇼팽과 문지영은 이어질 듯 이어지지 못한 사이다. 2015년 부소니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 본선에 동시 진출한 문지영은 한 달 먼저 열렸던 부소니 콩쿠르 결선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해 우승을 거뒀다. 이후 쇼팽 콩쿠르 본선에서는 기권했다. 부소니 콩쿠르 측의 요청이었다. 쇼팽의 곡으로 우승해, 그를 기념하는 콩쿠르에 오르지 못한 아이러니. 당시 한 인터뷰에서 아쉽지 않냐는 물음에 “쇼팽의 음악은 유독 건드리기 어렵고 불편한 대상”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던 그이지만, 선배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우승 후보로 조성진과 함께 문지영을 꼽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겸양의 발언은 아니었다. 특히 쇼팽 24개의 프렐류드 Op.28에 관한 한. 이 곡은 작곡가가 20대의 나이에 작곡했지만 쇼팽의 모든 것이 이토록 잘 녹아난 작품이 없을 만큼 혁신적이다. 문지영은 쇼팽 콩쿠르에 지원할 때도, 부소니 콩쿠르 부상으로 주어진 리사이틀에서도 쇼팽 24개의 프렐류드를 연주했다. 그러나 매번 자신의 연주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이 곡 때문에 한동안은 쇼팽을 멀리하기도 했다.

이번 페스티벌 무대를 앞두고 쇼팽 협회에서 내세운 조건은 딱 하나. ‘쇼팽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포함할 것’. 사실 10분 내외의 짧은 곡을 넣어도 무방하지만, 문지영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쇼팽 마주르카 Op.56으로 시작해 40여 분에 달하는 24개의 프렐류드 Op.28로 끝나는 1부 프로그램은 문지영과 쇼팽의 본격적인 만남을 예고하는 듯하다. 쇼팽 음악의 정수와도 같은 두 작품은 바르샤바에서 여는 문지영의 첫 독주회 레퍼토리로도 용감한 선택이다. 그는 쇼팽 앞에서 유독 냉철해지던 폴란드 관중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2014년 폴란드의 작은 지방, 두슈니키에서 열린 세계 최고(最古)의 쇼팽 페스티벌에 초청됐어요. 연주를 끝내고 관객석에 앉아 있는데, 다른 작곡가와 달리 쇼팽의 음악을 들을 때 청중의 반응이 굉장히 차갑더라고요. 제가 폴란드 사람이 아니라서 쇼팽이 그들에게 지니는 위상을 감히 단정할 순 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그날 분명히 느꼈죠.”

독주회 2부의 프로그램은 드뷔시 ‘영상’ 1·2집과 스크랴빈 소나타 4번. 문지영은 프로그래밍에 유난히 공을 들이는 연주자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흐름에 강박적이리만큼 신경 쓴다. 여러 작곡가의 곡을 하나의 프로그램에 넣을 때는 조성, 분위기, 작곡가의 성향까지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어내야만 안심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연습할 때도 정신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고, 연주를 듣는 이도 그러하리라 생각해서다. 이번 연결고리는 단연 쇼팽.

“드뷔시와 스크랴빈 둘 다 쇼팽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곡가예요. 특히 피아노의 음색을 표현하는 방식이 쇼팽의 언어와 비슷하죠.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틀을 잡는 건 혼자서 하고, 어느 정도 마음이 정해지면 가까운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요. 다른 누가 아닌 제가 칠 곡이니까요. 최종 제출일을 미루면서까지 프로그램을 고심했는데, 다행히 쇼팽 협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죠.”

이날의 연주는 드뷔시 ‘달빛’ 앙코르로 마무리되었다. 폴란드 청중은 문지영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폴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평론가 다리우스 마르치니센(문지영 피아노 독주회에 대한 다리우스 마르치니센의 리뷰는 70쪽으로)은 문지영의 연주를 올해 페스티벌 최고의 연주로 꼽기도 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연주자들이 유난히 많은 건, 쇼팽만큼 연주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작곡가도 없기 때문이다. 문지영에게 쇼팽은 어떻게 다가올까.

“너무 섬세해서 살짝만 틀어져도 깨져버릴 것 같아요. 미묘한 차이로 오늘 조금 알 것 같다가도, 내일은 다시 그전만도 못해지죠. 독일 작곡가의 곡을 접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이해가 쇼팽에서는 없어요. 좋고 싫고의 문제는 아니에요. 쇼팽의 언어가 아직 제 안에 없기 때문이에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운명의 수첩 속 작곡가들

작가에게 떠오르는 글감을 적어두는 수첩이 있다면, 문지영에겐 언젠가 연주할 레퍼토리를 적어두는 수첩이 있다. 오랜 시간 묵혀두었다가 프로그램을 골라야 할 때가 오면, 이 수첩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럼 적어둔 목록 중 반드시 지금 운명처럼 다가오는 음악이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드뷔시와 스크랴빈도 한참 전부터 이 목록에 이름을 올려두었다.

어느 정도 후보가 추려지고 나면, 잘할 수 있다는 확신보다 곡에 대한 애착이 레퍼토리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반복적인 연습 과정을 버텨내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2020년, 영재원 시절부터 몸담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문지영은 새로운 조건에서 자신에게 맞는 연습 방법을 찾는 중이다.

지금 애용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공연을 일주일 정도 앞둔 시점에서 녹음기를 켠다. 그리고 공연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주한다. 듣는다. 1차 충격을 받는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소리와 실제로 연주한 결과물이 너무 달라서”다. 이 차이가 없어질 때까지 조율의 과정을 거친다.

“연주하고, 녹음본을 듣고, 악보에 표시하기를 반복해요. 제 귀와 마음에 의존해서 스스로가 선생님이 된 기분으로 하나씩 다듬고 고쳐나가죠. 마음이 가는 곡이라면 연습할수록 곡에 대한 애착은 더욱더 커집니다. 연주는 치밀하게 준비하되, 무대에서는 모든 것을 다 벗어 내려놓고 처음 치듯이 임하려고 해요.”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에서도 독주회 당일까지 매일 6시간씩 연습했다. 그 바람에 바르샤바에서 고작 46km 떨어진 쇼팽 생가를 가는 것도 다음으로 기약해야 했다. 원체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굵직한 쇼팽의 작품과 연주회에서 처음 시도하는 드뷔시 ‘영상’, 스크랴빈 소나타 4번이 그에게는 도전적인 레퍼토리였기 때문.

문지영에게 편안한 레퍼토리는 차라리 독일 낭만주의 쪽이다. 특히 슈만에 대한 애정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곡을 슈만으로 구성한 독주회를 여러 번 열었고, 2017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데뷔 앨범에도 오직 슈만만을 담았다(DG 4816322).

“오랜 기간 슈만을 연주해왔어요. 슈만은 제가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려움 없이 본성대로 연주하게 되는,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예요. 연주하다 보면 슈만이 피아노를 굉장히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껴요. 무엇보다 연주할 때 손이 편안하거든요.”

그렇다면 드뷔시는 어떨까. 그동안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드뷔시의 음악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비로소 선명해졌다.

“드뷔시의 음악적 스타일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배웠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비하면, 정말 하나도 몰랐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번 여름에 드뷔시의 삶에 관한 책을 두어 권 사서 읽어봤어요. 드뷔시는 아주 기이한 사람이었고, 완벽주의자였어요. 당대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귀로 듣는 음악이 눈앞에 그려지도록 작곡하겠다는 신념 아래, 악보에 의미 없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완벽을 추구했죠.”

이처럼 문지영의 최근 행보를 살펴보면, 자신의 반경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년, 매 분기 관객들에게 문지영의 새로운 작곡가들을 소개한다. 재작년엔 라벨, 작년에는 브람스, 지난봄에는 슈베르트. 2020년 발매한 두 번째 앨범에서는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을 스승 김대진과 함께 녹음했다(Universalmusic DU42210). 앞으로 프랑스 레퍼토리를 꾸준히 넓혀가고 싶은 욕심도 있다.

“당분간은 한 작곡가에 정착하지 않으려 한다”는 그는 남은 20대 시절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며 많이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슈만을 멀리한 것 같다. 다시 슈만을 할 때”라는 말로 여전한 애정을 표했다. 아마 다음 레퍼토리는 그의 수첩만이 알고 있으리라.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피아니스트

어느덧 6년 전이다. 스무 살의 앳된 피아니스트가 제네바 콩쿠르에 이어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을 석권하며 대서특필된 일이. 부소니 콩쿠르가 15년 만에 허락한 1위 수상자이자, 콩쿠르가 창설된 1949년 이래 처음으로 배출한 아시아인 우승자.

그의 성취를 두고 일부 언론은 기업의 메세나 활동과 국가의 영재 정책에 공을 돌렸다. ‘어려운 형편에도 기업과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탄생했다’는 ‘인생역전 스토리’는 극적이어야 했다. 그렇게 말은 과장되고 와전됐다.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라는 한동안 문지영을 대표했던 이 수식어는, 틀린 말이다.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그랜드 피아노가 아니었을 뿐,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사준 업라이트 피아노로 꿈을 키웠다. 그러나 정정 보도를 요청하는 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연주자는 음악으로 소통한다고 믿는 쪽이에요. 그래도 될 만큼 한국도 유럽도 클래식 음악 공연을 찾는 관객들은 높은 음악적 이해도를 갖고 있고요.”

상의 권위와 세간의 기대를 덜어낸 문지영의 기억 속 부소니 콩쿠르는 ‘결과’라기보다 ‘과정’이다. 여러 콩쿠르를 동시에 준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체력적 부담은 있었지만, 단점을 보완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심적 부담은 없었다. “제일 어린 참가자 중 한 명이니 부담감 가지지 말라”던 스승 김대진의 조언도 한몫했다. 콩쿠르 우승 이후에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사는 법을 배웠다. 주최 측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레퍼토리, 연이은 연주 일정을 소화하는 노하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인드 컨트롤.

“부소니 콩쿠르가 끝나고 갑자기 밀려드는 연주에 당황했어요. 첫 리사이틀 투어를 하면서는 ‘왜 날마다 똑같은 에너지를 불러내지 못할까’ 혼란스럽기도 했죠. 2~3년은 방황했던 것 같아요. 콩쿠르를 위해서는 몇 개월간 정해진 프로그램에만 전념할 수 있는데 콘서트는 다르잖아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거죠. 여러 경험을 통해 연주를 대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아갔어요.”

마침 인터뷰 다음 날엔 제63회 부소니 콩쿠르 결선이 열렸다. 독일에 있던 문지영은 친분이 있는 피아니스트 김도현과 박재홍을 응원할 겸 이탈리아 볼차노로 간다고 했다. 특히 박재홍과는 같은 클래스에서 동문수학한 사이. 며칠 뒤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올해 부소니 콩쿠르에서 박재홍이 1위, 김도훈이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린 것이다(부소니 콩쿠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71쪽으로).

보통 다음 우승자가 나오면 열기가 식기 마련인데 문지영의 부소니 콩쿠르 연주는 꾸준히 사랑받는다. 부소니 콩쿠르 공식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보면, 인기순으로 1·2·3위 모두 문지영의 콩쿠르 연주 실황 영상이다. 댓글란도 여전히 뜨겁다. 그의 연주에 보내는 찬사와 함께, 뜻밖에도 국내 언론이 뭇매를 맞고 있다. 이렇게 실력 있는 연주자가 더 알려지지 않은 건 언론의 직무유기란 이야기.

스스로 “미디어에 무신경하다”는 문지영은 알까. 자신을 향한 응원과 더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들을. 넌지시 본인의 과거 연주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는지 물었다. 전화 너머로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아연실색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당장 어제 한 연주도 못 들어주겠는데, 6년 전 연주를 찾아 들을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에 대한 반응들은 일부러라도 안 보려고 해요. 애초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휘둘리기 싫은 것도 맞고요. 안 보는 편이 저한테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 유튜브를 잘 이용하지 않아서 계정조차 없다는 부연 설명이 이어지자, 어쩐지 전화 너머 그와의 거리감이 한국과 독일 사이보다 더 아득해진다.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유튜브로 음악을 공부하고 유튜버 출신 스타 연주자도 탄생하는 요즘이다. 그러나 문지영은 지나간 시절의 여느 피아니스트처럼, 여전히 음반을 꺼내어 틀고 음악을 다룬 책을 펼쳐 읽는다.

“요즘 부쩍 느끼는 건 공연 주최 측에서 홍보 영상 촬영을 부탁해오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거예요.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 아날로그적인 걸 좋아하는 제 자신이 구식이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할 수 있는 부분까지 최대한 타협하려고 하지만, 제가 정작 신경 쓰고 노력해야 할 부분은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만 집중하기도 버겁고요. 연주회도 기획의 요소가 두드러지는 것보다는 정통적인 걸 선호해요. 연주자와 관객의 입장일 때 모두요.”

2015년 당시 부소니 콩쿠르 심사위원장이었던 외르크 데무스가 문지영에게서 발견했다는 “이 시대에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음악성의 자연스러움”은 이렇게 독야청청 이어지고 있다.

 

사색의 침묵 속에 은둔할 수 있는 가능성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실컷 나눈 뒤, 그가 맞이한 새로운 생활, 그곳에서의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해 편히 말을 주고받았다. 해외 유학 경험 없이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이어오던 문지영은 2020년 학교를 졸업하면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터전을 옮겼다. 한평생 머물렀던 안락한 세계를 떠난 것이다. 그와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본다.

 

첫 자취 생활은 어떤가요?

가족과 살다가 처음 내 집에서 혼자 살아보니, 저에게 어마어마한 결벽증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웃음)

궁금해요, 왜 오스트리아에요?

원래는 여행하면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을 찾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로 여행을 할 수 없게 됐잖아요.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라, 익숙한 곳을 찾아서 일단 잘츠부르크로 온 거예요. 스무 살 이후 매년 여름을 여기서 보냈거든요. 열두세 살 무렵 처음으로 와본 유럽 도시이기도 하고, 그리 크지도 않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친숙해요.

살아보니 잘츠부르크는 어때요?

올해 한국에서 연주가 있어서 자가격리를 3번이나 했어요. 이곳에서 살 시간을 쪼개서 쓴 거죠. 그래서 아직은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다고 말하긴 짧은 기간이지만, 작은 도시인데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는 곳이에요. 평화롭고 살기에 좋아요. 음악에 집중하기에도 좋죠.

바르샤바가 쇼팽의 도시라면,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죠!

작곡가가 걸었던 산책로가 남아있고, 그런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음악가에게 특권인 것 같아요. 여행을 많이 다녔어도 사는 건 또 다르니까 꼭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순 없어도, 이렇게 보고들은 게 제 안에 남아서 음악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이번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를 즐겼어요. 엄청난 음악가들과 오케스트라가 이 도시를 다녀갔죠.

문지영에게 잘츠부르크는 ‘작곡가의 자취가 남아있는 도시’이자, ‘작고 평화로운 도시’군요.

날씨가 좋으면 강가의 잔디밭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요. 비가 오더라도 절대 하루종일 내리지 않고,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맑게 개어서 풍경이 참 예뻐요. 너무 아름다워서 날마다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죠. 거리를 걷고, 노을을 보고. 자연이 가까이에 있는 도시라서 좋아요. 사실 서울에 살 때는 너무 대도시라 버거웠거든요(문지영은 전남 여수 태생이다).

누군가는 2015년 부소니 콩쿠르 직후 해외로 갔으면,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지 않았겠냐고 이야기해요. 좀 더 일찍 한국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김대진 선생님과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죠. 전 세계를 통틀어 저희 선생님만큼 제자 한 명 한 명에게 모든 걸 쏟아붓는 분을 본 적이 없어요. 막상 졸업하고 나서는 실감이 안 났는데, 이젠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네요.

엄청난 애서가잖아요.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전자책을 읽을 것 같진 않은데(웃음) 한국어책은 어떻게 구해요?

한국에서 가져온 책으로 버티다가 요즘은 아마존(Amazon)에서 읽을 책을 검색하고 주문하는 게 일상이에요. 한국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지치고 피곤할 때 서점에 가서 한 번에 대여섯 권씩 사 오곤 했어요.

주로 어떤 책을 읽어요?

장르를 가리지 않아요. 책장 앞에 서서 쭉 살펴보다가 마음에 들어오는 책을 골라요. 그런 책은 그 시기의 저에게 필요한 말을 꼭 해주더라고요. 누구라도 이런 경험을 하는 걸까요? 음악이 저에게 다가오는 것과 비슷하게 책도 그래요. 정말 우주의 힘 같은 게 있다고 느껴요.

지금은 어떤 학교에 입학한 상황은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유럽에서 학위를 이어갈 계획은 없나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냥 살고 있어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겠다 확신할 만한 아이디어가 없어요. 저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잘 세우지 않아요. 당장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죠. 어떻게 보면 자유롭고, 또 어떻게 보면 게으른 것 같아요.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요, 지영 씨의 장기적인 목표는 뭐예요?

죽기 직전까지 전성기가 없는 것? 평생 끊임없이 노력해서 발전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음악은 깊이도, 너비도 끝이 없는 미지의 세계니까요.

대중과 평단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럼 무얼 성장의 지표로 삼나요?

나의 연주를 비난할 거리가 있다는 것,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게 발전의 가능성 아닐까요? 저는 제 음반도 잘 못 듣겠어요. 곡에 대한 생각과 해석이 자꾸 달라져서요. 이게 제가 음악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이길 바라요.

 

결코 말수가 없는 편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는 성격이지만, 이 젊은 음악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가 점점 더 안으로 침잠하고, 점점 더 멀리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색의 침묵 속에 은둔할 수 있는 가능성’

한 노장 지휘자가 본인의 회고록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가치를, 스물일곱의 문지영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색과 침묵의 세계에서 그를 구속하는 것은 오직 음악뿐이리. 글 박서정 기자 사진 더브릿지컴퍼니

 

음악은 깊이도, 너비도 끝이 없는 미지의 세계

유리 바슈메트/모스크바 솔로이스츠 협연 문지영 10월 5일 남한산성아트홀 대극장 10월 7일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10월 8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외 김대진·문지영 듀오 리사이틀 10월 17일 티엘아이 아트센터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론도 A장조 D951 외 정치용/부산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협연 문지영 10월 21일 부산시민회관 슈만 피아노 협주곡 Op.54 문지영 피아노 독주회 12월 1일 경남문화예술회관 12월 2일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12월 9일 군포문화예술회관 라모 ‘새로운 클라브생 모음곡집’ 외

INTERVIEW

역사에 남은 쇼팽, 역사에 남길 쇼팽

문지영을 초청한 쇼팽 협회 대표 아르투 슈클레네 &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 예술감독 스타니스와프 레쉬진스키

과거를 연구하고 현재를 기록해 미래로 전하다

2015년 조성진의 우승 소식으로 국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쇼팽 콩쿠르는 폴란드의 쇼팽 협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쇼팽 협회는 2001년 설립 이래 쇼팽 관련 콩쿠르와 축제 및 기획연주회 개최, 쇼팽 박물관 운영, 쇼팽에 관한 학술연구와 출판 사업을 활발히 진행해오고 있다. 2005년부터 매년 8월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Chopin and his Europe International Music Festival)은 쇼팽과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폴란드 작곡가를 조명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8월 30일 문지영도 바르샤바 내셔널 필하모닉 챔버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바르샤바에서 아르투 슈클레네(쇼팽 협회 대표)와 스타니스와프 레쉬진스키(쇼팽 협회 부대표·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를 만나 쇼팽 협회와 페스티벌의 운영 방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한 사람의 음악가를 쇼팽 협회만큼 집중력 있게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진 인물인가?

슈클레네 쇼팽은 폴란드의 상징이자, 폴란드보다 세계에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일례로 중국국가박물관에서 열린 폴란드 예술을 다룬 전시의 제목은 ‘쇼팽의 나라에서 온 보물’(2015.2.6~5.10)이었다. 피아니스트이자 폴란드의 수상이었던 파데레프스키(1860~1941)는 공식 석상에서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쇼팽의 음악과 연관 지어 연설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들어선 공산정권은 국가행사에 쇼팽의 음악을 자주 사용했다. 당시 라디오에서 쇼팽의 소나타 3번 Op.35가 나오면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인물이 서거했는지 서로 물어보았다. 2001년에는 쇼팽의 유산을 지키는 특별 법안이 폴란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우리에게 쇼팽이 국가적 재산인 것은 명확하다.

레쉬진스키 어떤 나라에서는 쇼팽의 곡이 그저 춤곡이나 듣기 쉬운 음악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쇼팽의 음악에는 인간과 인간의 정신, 인간의 감정, 삶에 대한 고뇌 등이 담겨있다. 예술은 장식이 아니다. 예술은 ‘인생의 의미’다.

쇼팽 협회와 주요 사업을 소개해달라.

슈클레네 쇼팽 협회는 작은 규모로 출범했다. 주로 연구 활동에 집중했고, 이후 다른 활동을 더해갔다. 특히 박물관 운영은 교육 분야와 연결되기에 중요하다. 우리가 운영하는 쇼팽 박물관은 두 곳이 있는데, 바르샤바에 있는 프레데릭 쇼팽 박물관과 젤라조바볼라의 쇼팽 생가 건물이다. 폴란드의 부모들은 박물관에 자녀들을 데려온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관객이 될 아이들을 위해 박물관에서 레슨 프로그램과 특별 연주회를 연다. 같은 이유에서 웹으로 우리의 연구 결과를 배포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가상공간의 관객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도 우리의 관심사다. 2015년 쇼팽 콩쿠르 결과 발표 이후 조성진(피아노)의 마지막 협연 무대는 단 24시간 만에 한국에서만 백만 회의 재생횟수를 기록했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잠시나마 ‘쇼핑(Shopping)’보다 ‘쇼팽(Chopin)’이 구글에서 더 많이 검색되기도 했다(웃음).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쇼팽이 쇼핑을 이겼다(Chopin beats shopping)”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았을 때 쇼팽의 음악은 단지 폴란드를 대표하는 예술이 아니라, 순수예술 그 자체의 전도사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순수예술은 연령대와 인종, 지역을 초월하여 모두를 하나로 엮을 수 있다.

쇼팽 협회의 활동을 보면 연구·출판·공연·전시가 서로 연계되어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구조는 어떻게 설계됐나?

슈클레네 전문가로 구성된 협회 내 구성원들이 긴밀히 협력한다. 예를 들어, 페스티벌을 기획할 때는 항상 주제와 기획전시를 함께 생각하고, 출판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레쉬진스키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의 모든 공연은 녹음되며, TV·라디오·인터넷으로 중계된다. 특별히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공연은 추후 음반·DVD로 발매된다. 이처럼 우리는 협회의 다양한 활동을 통합해 하나의 결과물로 내고자 한다. 연주자들은 협회에서 보유한 시대악기를 직접 골라서 연주할 수 있고, 협회의 연구·출판팀은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쇼팽 악보 사본의 세부 요소까지 연구해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슈클레네 이렇게 나온 출판물과 음반·영상물을 여러 방면에서 쓰일 수 있도록 웹사이트에 공유한다. 우리 협회에서 개발한 웹사이트 ‘폴스키에 뮤직 포탈’(portalmuzykipolskiej.pl)은 폴란드 작곡가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인물 프로필·연혁·작품에 대한 설명은 물론 작품을 연주한 오디오나 비디오 자료도 제공한다. 현재 30여 명의 작곡가를 다루고 있으며, 계속해서 작곡가의 수와 자료의 양을 늘려갈 예정이다.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이 올해로 17회를 맞았다. 코로나의 여파를 어떻게 극복했나?

레쉬진스키 락다운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관객들이 많이 찾아왔다. 여행사에서 우리와 연계하여 폴란드의 교외 관광과 문화예술을 경험하는 여행 상품을 개발한 바 있다. 최근 2년간의 프로그램은 주로 독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오케스트라 수도 줄여야 했고 프로그램도 많이 바뀌었다. 올해는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기는 했으나 오페라 프로덕션도 올릴 수 있었다(축제 개막작이 스타니스와프 모니우슈코의 ‘Verbum nobile(귀족의 말)’이었다). 모니우슈코(1819~1872)는 폴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며, 쇼팽이 피아노 음악을 대표한다면 모니우슈코는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2년 전 모니우슈코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였으며, 내년에는 그의 서거 150주년 기념을 준비하고 있다.

축제를 지속하기 위해 고심하는 점이 있다면?

레쉬진스키 우리 축제는 바르샤바 시민은 물론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다. 매번 축제를 찾아오는 관객들이 이제는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로 팝을 위시한 대중문화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라 불리는 이것은 너무도 강력하고 거대해서 클래식 음악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이끄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워졌다. 장기적인 교육 외에 당장은 유명한 연주자를 초청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다. 가장 유명한 이름은 역시 쇼팽이다. 그래서 우리는 쇼팽의 음악을 주로 프로그래밍한다. 쇼팽의 동료 중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작곡가의 작품은 유명한 연주자가 연주하게 한다. 예를 들어, 율리우시 자레프스키(1854~1885)의 숨은 걸작, 피아노 5중주는 아르헤리치(피아노)가 연주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만약 아르헤리치가 연주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의 곡을 들었겠는가. 그리고 이 곡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아르헤리치가 녹음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음악사 책에서만 보던 제수알도의 ‘마드리갈’ 실연을 이번 축제에서 필립 헤레베헤/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연주로 처음 접했다. 축제 프로그래밍과 연주자 섭외 기준이 궁금하다.

레쉬진스키 모든 것은 예술감독인 내가 결정한다. 기준은 단순하다. 무조건 ‘예술적’이어야 한다. 이 방법이 민주적이지는 않다. 운영 기금을 지원하는 정부 관계자와 관객의 신뢰 덕에 유지될 수 있었다. 축제에는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최고 수준의 연주자를 초청한다. 예를 들어 요스 반 이메르세일(포르테피아노)은 이보 포고렐리치(피아노)와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시대악기를 연주한다. 넬슨 괴르너·율리아나 아브디예바·라파우 블레하치(피아노) 등 콩쿠르 출신도 초청한다. 물론 협회 내 다른 부서의 제안이나 관객의 선호를 반영하기도 한다. 비록 테크닉만 뛰어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연주자라 해도 그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피아노 버전을 막힘없이 쳐낸다면 나는 초청할 것이다. 관객에게 이러한 어려운 곡도 존재하고, 연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이것은 나의 의무이다.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은 나 혼자만의 축제가 아니고, 쇼팽 협회는 나 혼자만의 협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무가 아니라면 매번 아르헤리치만 초대할 것이다(웃음).

한국에서도 쇼팽에 관한 관심이 높다. 한국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부탁한다.

슈클레네 먼저, 조성진이 한국을 대표하여 지난 콩쿠르에서 우승해서 기쁘다. 그는 이미 쇼팽의 음악뿐 아니라 유럽의 클래식 음악을 세계로 알리는 문화대사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륙에 살고 있지만, 음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쇼팽 콩쿠르와 쇼팽과 그의 유럽 페스티벌은 쇼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벤트다. 여러분 모두를 바르샤바로 초대하고 싶다.

인터뷰 윤동진(더브릿지컴퍼니 대표) 정리 박서정 기자

※기사 전문은 객석 11월호(Vol.451) 또는 공식홈페이지(auditorium.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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