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음악에 새겨진 고뇌와 쉼의 흔적
2021년 바흐와 함께 했던 그가 시마노프스키·베베른·베토벤으로 돌아왔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1969~)가 오는 2월 내한을 예고했다. 지난 2005년 첫 내한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한 안데르제프스키는 한국 관객에 대해 “따뜻하고 열정적”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특히 젊은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우는 모습이 희망적으로 느껴집니다”라며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지난해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의 12곡을 안고 내한했던 그는 올해 바흐로 시작해 낭만주의 작곡가인 시마노프스키(1882~1937)와 베베른(1883~1945)을 거쳐 베토벤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이번에 연주할 바흐와 베토벤 곡은 구조와 다성음악에 관한 것”이라며 전체 프로그램 구성의 짜임새에 대해 설명했다.
자유를 찾아 떠난 바르샤바의 피아니스트
안데르제프스키는 폴란드에서 쇼팽의 후예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쇼팽 콩쿠르 결선 진출’만을 바라보는 바르샤바의 분위기에 압박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유명세를 탄 것은 조국의 쇼팽 콩쿠르가 아닌 영국의 리즈 콩쿠르였다. 콩쿠르에서 그의 존재감이 부각된 이유는 뛰어난 연주실력이나 우승 때문이 아니었다. 준결승 무대에서 그는 베베른 변주곡 연주 도중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연주를 멈추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당시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리즈 콩쿠르 당시 레퍼토리 선정에 엄청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저를 전문 피아니스트의 길로 접어들게 했습니다.” 그는 콩쿠르 무대 위에서 이미 자유로움을 얻은 피아니스트였다. 리즈 콩쿠르 이후, 미국에서 레온 플라이셔(1928~2020)·푸총(1934~2020)·머리 퍼라이어(1947~)를 사사했다. 안데르제프스키는 “당시보다 지금 이 곡을 연주할 때 더 자유롭고 덜 독단적인 느낌이 듭니다”라며 이번 내한에서도 베베른 변주곡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물론 고향 바르샤바에 정서적으로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믿기 힘든 비극을 겪은 도시에서 오늘날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집니다”라고 말한다. 2016년에는 바르샤바의 참상으로 인한 고통을 담은 ‘바르샤바는 나의 이름(Warsaw is My Name)’이라는 영상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그에게 일종의 ‘치유’를 위한 작품인 셈이었다.
리즈 콩쿠르가 그에게 정체성으로부터의 독립을 안겨주었다면, 음악적 자유를 안겨준 건 베토벤이었다. 베토벤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01년 5월,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을 담은 데뷔 음반으로 디아파종상, 르 몽드 드 라 뮈지크 쇼크상 등을 수상했다. ‘1990년 리즈 콩쿠르 퇴장 사건’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 곡으로 자신의 연주에 붙은 모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았다. 2004년에는 프랑스 감독 브뤼노 몽생종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디아벨리 변주곡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꾸준히 베토벤 후기 작품들의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그는 이번 내한 공연에서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걸어온 시간을 건반 위에 풀어내며
지난 2015년 바흐 영국 모음곡 1·3·5번으로 그라모폰상 기악곡 부문을 수상한 바 있는 안데르제프스키는 최근 발매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의 발췌 음반으로 ‘그라모폰’이 선정한 올해의 피아노 음반상을 수상하며 바흐 레퍼토리 해석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도 바흐 프랑스풍의 서곡 BWV831로 문을 연다. 지난 1999년 음반 발매 이후, 최근까지 독주회 레퍼토리로 선보이고 있는 곡이다. 그는 바흐 연주에 대해 “곡에 맞는 연주 방향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다른 연주 방법이 가능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연 레퍼토리를 정하는 안데르제프스키의 고민은 시마노프스키의 ‘마주르카’ 선곡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총 20곡으로 구성된 마주르카 중 네 곡을 골라 3·7·5·4번의 순서로 연주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연주하면 하나의 작은 춤 모음이 됩니다”라고 답했다. 그가 이 곡을 연주할 때 무대 위에 작은 무도회가 펼쳐질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에는 그만의 확고한 가치관과 연주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다. 녹차를 좋아하는 그는 지난 2010년 런던 바비칸홀 무대에서 차 한 잔을 들고 책을 읽은 적도 있다. 그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지난날 자신의 손길이 닿았던 곡들을 차분히 복기하고 있었다. 겨울의 마지막 날 무대에 오르는 그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있을까. 따뜻한 차 한 잔 혹은 책 한 권. 빈손이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고뇌의 흔적이 담긴 음악이 그의 손끝에서 함께한다는 것이다.
글 홍예원 수습기자 사진 인아츠프로덕션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1969~) 바르샤바 음악원·프랑스 리옹 국립 고등음악원·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으로 데뷔 음반을 발매했으며, 2011년 발매한 슈만 독주곡집은 에코 클라식상, BBC뮤직 매거진상을 수상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피아노 독주회
2월 28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바흐 프랑스풍의 서곡 BWV831, 시마노프스키 ‘마주르카’(3·7·5·4번),
베베른 변주곡,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