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MUSIC SCENE 26
세계의 공연기획자를 만나다
피아니스트의 영혼을 담은 피아노
스타인웨이 피아노사의 기업 정신과 끝없는 악기 혁신에 관한 이야기
스타인웨이 앤 선즈 대표 벤 스타이너
벤 스타이너(Ben Steiner) 프리스턴 대학에서 공공정책을,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경영학을 전공했다. 2016년부터 스타인웨이의 재무담당(CFO)로 재직했고, 2021년부터 대표직을 맡고 있다. 스타인웨이 인수 당시의 헤지펀드사 폴슨앤코에서 근무했다.
2019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영화 ‘그린 북’에는, 피아니스트들이 스타인웨이 앤 선즈 피아노(이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담겨 있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미국 연주 투어를 나선 아프리카계 피아니스트 ‘셜리’는, 오로지 스타인웨이만을 고집한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나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직접 가지고 다니며 연주할 정도로 이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절대적이었다.
지금도 많은 피아니스트가 세계 투어를 위한 계약서에 ‘반드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준비할 것’을 명시한다. 그만큼 연주자의 정신을 온전히 반영한다는 믿음이다. 전 세계 공연장 95%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다.
스타인웨이는 1853년, 독일 출신의 헨리 스타인웨이(1797~ 1871)가 설립한 이래 139건 이상의 특허를 확보하며 피아노 제조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기에, 각 피아노는 미묘하게 다른 개성을 가진다. 약 12,000개의 부품이 정교하게 맞물려야 한 대의 피아노가 탄생한다. 목재는 평균 2년에 걸쳐 건조되고, 조립까지는 약 1년이 걸린다.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 기술을 적극 도입하며,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벤 스타이너 스타인웨이 대표를 화상으로 만났다. 뉴욕의 아침, 화면 속 그의 창문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에게 스타인웨이의 숨은 비밀을 들을 시간이었다.
헤지펀드 매니저에서 음악의 세계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공정책을,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경영학을 전공했다. 음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분야인데, 어떻게 스타인웨이에서 일하게 되었나?
인생이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 불가인 것 같다.(웃음) 학업을 마친 후, ‘폴슨앤코(Paulson & Co.)’라는 세계적인 헤지 펀드 회사에서 일했다. 입사한 지 2년 후인 2013년, 폴슨앤코가 스타인웨이를 인수했다. 이를 계기로 관련 업무를 하다가, 스타인웨이로 자리를 옮겼다.
폴슨앤코가 스타인웨이를 인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수 합병 과정을 알고 싶다. 당시 스타인웨이가 다른 사모펀드에 의해 저평가된 가격으로 인수 합병될 상황이었다. 존 폴슨(폴슨앤코 대표)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 인식했고, 이익 창출보다는 가치와 전통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기업을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인수 합병 마감일까지 실사 시간이 60일밖에 되지 않아 준비하기에 촉박한 상태였다. 이 경쟁에 한국의 삼익피아노도 뛰어들었다. 콜버트사, 폴슨앤코, 삼익 피아노가 아주 근소한 차이의 구매 금액을 제시했고, 폴슨앤코가 아슬아슬하게 이겨 인수할 수 있었다.
스타인웨이에서는 2016년부터 CFO(재무담당 책임자)로 일했다. 유명 헤지펀드 회사에서 스타인웨이로 옮긴 이유는 무엇이었나?
헤지 펀드에서의 일도 재미있었지만, 일의 특성상 인수 합병이 끝나면 더 이상 그 기업 운영을 못 맡는다. 인수한 회사를 어떤 방향으로 경영할지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인수 합병을 위해 스타인웨이에 관해 공부하면서, 이 특별한 브랜드와 사랑에 푹 빠진 것 같다. 그래서 퇴사를 결심하고, 스타인웨이로 자리를 옮겼다.
특별히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
171년이라는 전통을 꼽고 싶다. 한 기업이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스타인웨이가 추구하는 ‘완벽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 대의 피아노는, 1년간 250여 명의 전문 기술자의 손을 통해 제작된다. 무엇보다 음악이 가진 특별함에 매료되었다.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고, 그 음악이 스타인웨이의 소리로 표현된다.
CEO로서, 스타인웨이의 오랜 역사를 현대적 경영에 어떻게 계승하고 있나?
창업자인 헨리 스타인웨이의 ‘최상의 피아노를 만든다’는 비전을, 우리 기업의 핵심 신념으로 삼고 있다. 전해 내려온 제조 기술을 소중히 여기며, 이를 유지·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기술적으로는 새로운 것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제조 기술 발전으로 과거에 실현할 수 없었던 것들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154kg짜리 사운드보드(피아노 내부의 넓고 얇은 나무판. 피아노 소리를 증폭하는 역할)를 단 몇 초 만에 들어 올릴 수 있는 전기 크레인, 사운드보드를 케이스 안에 딱 맞추어 넣는 기계 등이다. 또한 인터넷 덕분에 홍보 방법과 의사소통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조직 운영·홍보 등은 현대적 경영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정신과 지향은 전통을 바탕으로, 운영과 혁신은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다.
장인 정신과 혁신의 공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는 숙련된 제조 장인들이다. 스타인웨이에 입사하면, 함부르크 공장에서 3년, 뉴욕 공장에서 2년간 오로지 악기 제조 기술을 배운다. 피아노 제작 학교에 입학하는 셈이다. 이 과정을 마친 후 비로소 피아노를 만들 수 있는데, 대부분 입사 후 은퇴할 때까지 일하며 대를 이어 일하는 경우도 많다. 둘째는 엄선된 자재다. 알래스카의 싯카(Sitka) 섬에서 햇빛을 거의 받지 않고 자라 나이테의 간격이 좁은 목재를 활용한다. 이마저도 나이테의 기울기가 일정한 것만을 사용한다. 싯카 섬의 나무는 상·중·하, 그리고 스타인웨이 등급을 따로 매긴다. 마지막은 피아노 디자인이다. 창립자가 하프 구조를 기반으로 설계한 이 디자인은, 현재도 세계 피아노 구조의 기준이 되고 있다.
현재 뉴욕과 함부르크 두 곳에서 피아노를 제작한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비슷한 디자인의 피아노를 제작하지만, 각 지역의 제작 역사와 설계 개발 과정의 차이로 인해 약간의 음색 차이가 있다. 일례로, 두 곳의 피아노는 해머와 사운드보드의 차이가 미세하게 다르다. 마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비교하는 것 같아 설명하기 다소 어렵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뉴욕 제작 피아노는 편안하고 힘 있는 음색, 다이내믹 범위가 넓은 반면, 함부르크 제작 피아노는 정밀한 음색을 표현한다.
전세계 유명 피아니스트는 물론 백건우·조성진·김선욱 등 한국 음악가들이 스타인웨이의 아티스트다. ‘스타인웨이 아티스트’ 선정 기준과 혜택은 무엇인가?
유명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들이나 훌륭한 연주력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의 지원을 받아 여러 번의 회의 끝에 선정된다. 이들은 전 세계 어디서든 최고의 스타인웨이를 무료로 제공받아 연주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린다. 전제 조건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연장 외에 특별한 장소로 피아노를 운송한 적도 있나?
알래스카 빙하 위,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 두바이의 빌딩 꼭대기 선착장에 옮긴 적이 있다. 이런 곳은 운송할 때 헬리콥터를 주로 사용한다. 운송 시 상당한 비용이 들어서, 철저히 계획해 최상의 상태로 스타인웨이를 제공한다.
새로 제작해 판매하는 피아노 중 역사상 가장 비싼 피아노는 무엇인가?
60만 번째 피아노 제작을 기념해 만든 ‘피보나치 피아노’는 6대만 제작됐고, 판매가는 약 3백만 달러(한화 약 42억 원)에 달한다. 희소성과 미적 가치를 알아본 한 구매자는, 피아노를 실제로 연주하기보다는 예술 작품으로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AI의 기술력과 피아노의 감성이 만난, 스피리오
스타인웨이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녹음·편집·재생이 가능한 기술이 탑재된 스피리오를 개발한 것이다. 현재 스타인웨이 판매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구매 고객의 3분의 2 정도가 피아노 애호가이거나, 피아노를 배우려는 아동부터 성인까지의 아마추어라는 점이 독특하다.
스피리오에 포함된 전자 장치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준다면?
스피리오 캐스트로 연주하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 연주하더라도 눈앞에 놓인 건반에서 그 움직임이 그대로 재현된다. 이를테면, 연주자가 미국에서 연주할 때 동시에 한국에서도 그 연주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이원 방송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델은 최근 아시아 시장에도 선보였으니, 한국 독자들도 이 피아노를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스피리오가 언제든 유명 아티스트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그 연주자의 실황을 들으러 공연장을 갈 일이 없어질 수도 있을까?
축음기가 발명되었을 때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집에서 음반으로 들을 수 있으니, 굳이 공연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직접 연주를 듣는 것과 녹음을 듣는 것은 다르다. 공연장에서 연주자와 한 공간에 있는 감동은 그 어느 첨단 기술로도 대체 불가하다. 스피리오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매일 거실에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아름다운 연주를 접하다 보면, 사람들은 오히려 공연장을 찾고 싶어질 것이다. 스피리오와 피아노 연주자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성장하는 음악 생태계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스피리오 외에 주목할 만한 기술적 성과가 있다면?
최근 사운드보드와 림(피아노의 옆면과 뒷면을 둘러싼 두꺼운 목재 부분)을 완벽하게 맞추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전에는 기계와 수작업을 병행해, 사운드보드를 깎아 림에 맞췄다. 이제는 컴퓨터를 이용해 0.1mm 오차 이내로 사운드보드를 림에 맞춰 자를 수 있다.
AI 기술이 피아노와 어떤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타인웨이는 이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사실 AI는 스피리오를 제작할 때 이미 활용됐다. AI를 통해 연주 편집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였는데, AI 머신 러닝을 통해 편집 기술을 학습하고 1차 편집을 수행한 후 사람이 마무리함으로써 작업 시간을 크게 줄였다. 앞으로는 AI가 피아노 교육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교사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일례로 주 1회 교사가 가르친다면, 나머지 날은 AI가 연습을 도울 수 있다. 선율은 연주하면, 그 스타일에 맞춰 AI가 반주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스타인웨이의 대표로서,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스타인웨이는 항상 완벽한 피아노를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해왔다. 기술을 적극 활용해 사람들이 음악을 더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모든 이들이 음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스타인웨이가 이렇게 섬세한 악기를 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장인들이 영혼을 바쳐 헌신하기 때문이다. 대를 잇기도 해, 아버지가 제작한 피아노를 아들이 다시 손보기도 한단다. 호로비츠의 전속 조율사였던 이의 아들은, 현재 스타인웨이 관객 개발 부서의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러한 완벽성을 통해 만드는 피아노는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 간혹 공연장에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피아노를 볼 때 안타깝다. 연주자의 음악 세계는 결국 악기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정성스러운 악기 관리가 꼭 필요하다. 싯카 섬의 잘 자란 나무와 최고의 장인, 열정을 바치는 연주자를 위해. 그리고 그 연주 속에서 감동을 만날 관객을 위해.
글 박선민(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스타인웨이 앤 선즈
BOOK
제임스 배런 저 | 이석호 역 | 프란츠
‘스타인웨이 만들기’
‘뉴욕 타임스’ 기자인 저자가, 11개월간 한 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제작 과정을 따라가며 써 내려간 책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벤 스타이너 대표가 말한 장인의 이야기다. 마치 독자가 피아노 제작 공장 한가운데 서서, 그들의 생활을 보고 듣는 듯하다. 복잡한 피아노 속 수많은 부품이 등장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장인들의 마음이 덧붙여 있으니 흥미롭게 읽힌다.
… 수많은 직원들이 그랬듯이 캠벨 역시 공책을 꺼내 K0862의 일련번호를 기입해 넣는다. “혹시라도 ‘이 피아노에 문제가 있다’며 누가 꾸지람이라도 할까 싶어 적어두는 거예요. 최소한 내가 작업을 한 놈인지 아닌지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러면서 첨언한다. “아직 누구한테도 그런 힐책을 들은 적은 없지만요.”(p.345) …
이외에도 책에는 스타인웨이가 거쳐 왔기에 기록할 수 있는 피아노 산업의 경쟁과 음악계의 변화도 곁들어져 있다. 더불어 ‘피아노 제작으로 천금을 움켜쥔 19세기 이민자’의 이야기이기도, ‘유럽과 중앙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시간급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아노 한 대를 둘러싼 거대한 역사와 산업의 다큐멘터리다. 허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