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홀 대표 클라이브 길린슨, 최고만을 추구하는 상징적 공연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6월 29일 9:05 오후

BEHIND THE MUSIC SCENE 29

세계의 예술경영인을 만나다

 

최고만을 추구하는 상징적 공연장

 

카네기홀 대표 클라이브 길린슨

130년의 역사로 음악을 품다

 

 

클라이브 길린슨(1946~) 런던대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이후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다. 1970년부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76년부터 행정직으로 전환, 1984년부터 대표직을 수행했다. 2005년부터 카네기홀을 책임지고 있다.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 남단에서 10분 남짓 걸어가면 브로드웨이와 57번가가 만나는 곳에 카네기홀이 있다. 필자가 뉴욕 필하모닉 공연 스태프로 일할 당시, 카네기홀 직원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카네기홀에는 음악가들의 혼령이 떠돈다.”

그들이 남긴 음악과 숨결이 무대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전설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었다.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의 피아노 선율, 아이작 스턴의 바이올린 연주, 말러가 직접 지휘했던 교향곡이 공간을 채우던 그 시대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 비틀스와 듀크 엘링턴, 파바로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무대, 랑랑과 키신의 현란한 테크닉이 공기를 가르고, 그리고 1980년 조용필의 한국어 가사가 전해졌던 기억을 머금은 공연장, 카네기홀. 이제는 한국의 피아니스트들이 전설적인 공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철강 재벌 앤드루 카네기(1835~1919)의 기부로 1891년에 설립되어 1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대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온 카네기홀은 미국의 국가문화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도 지정되어 있다. 카네기홀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여전히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 안에는 대가와 신인, 동양과 서양, 고전과 대중이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음악인이 여전히 이 무대를 꿈꾸고 있다.

카네기홀 대표 클라이브 길린슨과의 인터뷰 동안 느껴지는 그의 강렬한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세월의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수많은 아티스트의 기쁨과 절망, 무대의 시작과 끝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세월을 품은 공연장의 오늘과 내일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무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시선으로.

 

런던에서 뉴욕으로, 카네기홀과의 인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 활동하던 중 오케스트라의 매니저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70년대 초부터 런던 심포니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매니저는 이사회의 계획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새로운 매니저를 고용하려 했지만 마땅한 인재를 찾지 못했고, 결국 내부 단원 중에서 매니저를 선발하기로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무국에서는 내게 행정 업무를 제안했지만 나 자신도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년 동안만 행정 업무를 맡겠다. 대신 그동안 오케스트라의 내 첼로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 달라.” 그렇게 1976년 재무팀장으로 임명되었고, 1984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대표가 되었다.

음악가에서 행정가로 업무를 바꾸면서 변화가 컸을 것 같다.

이 시기에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질문이 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낯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일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좋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해결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당시 오케스트라 운영 체계는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했다. 회계 시스템은 너무 부실해서 자금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다행히 첼로를 공부하기 전에 런던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것이 바탕이 되어 데이터 기반의 재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2005년부터 카네기홀의 예술감독이자 총괄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변화를 이끌어왔나?

카네기홀 부임 이후, 대규모 테마형 페스티벌을 만들었다. 국내외 다양한 문화와 이슈를 아우르며 음악뿐 아니라 연극·문학·영화 등 여러 예술 장르에 스토리텔링을 결합했다. 이를 위해 메트로폴리탄박물관·뉴욕 역사박물관·아시아소사이어티·현대미술관(MoMA)·아폴로 극장·할렘 극장 등 뉴욕의 주요 문화예술 기관들과 긴밀히 협업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남미·일본·중국 문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흑인 문화 등 다양한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음악이라는 언어로 풀어낸 이야기들로 만나게 되었다. 내년에는 미국 독립 250주년을 기념해 영화 음악과 브로드웨이·재즈·힙합·가스펠 등 미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무대를 선보일 계획이다.

교육 부문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교육 부서를 전면 재정비해 청소년과 사회적 약자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확대·개편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국의 ‘국립청소년오케스트라(NYO-USA)’와 ‘국립청소년재즈오케스트라(NYO Jazz)’가 있다. 이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 사절단으로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활동하고 있다. 더불어, ‘카네기홀+’라는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하며, 카네기홀이 자체 콘텐츠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성공적인 음악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드는 문화

브랜드 프로그램 기획에서 각 공연들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의도는 무엇인가?

각각의 공연이 독립성을 갖췄지만, 배면에 흐르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술과 연결될 수 있게 돕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관객은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며 새로운 분야를 접하고, 자신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예술을 경험하게 된다. 카네기홀은 그런 ‘예상 밖의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어야 한다.

카네기홀에서는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재즈·월드뮤직·현대음악 등 다양한 공연이 있다. 이러한 구성엔 어떤 철학이 담겨 있나?

카네기홀은 특정 장르를 위한 공연장이 아니다. 다양한 음악을 최고 수준으로 선보이는 것이 우리 목표다. 특정 장르에 우선순위를 두고, 나머지를 그다음으로 두는 방식은 우리의 철학과 맞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뛰어난 공연으로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들이고, 이들이 이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장르를 경험하도록 안내하고자 한다.

여러 장르 공연을 모두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이 있나?

답은 단순하다. 가장 뛰어나다고 확신하는 프로그램만 기획해야 한다. 공연을 위한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괜찮다’ 정도의 수준이라면, 차라리 공연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공연을 위한 열 개의 아이디어 중, 하나 정도만이 살아남는다. 그만큼 공연 기획은 단순한 발상이 아닌, 철저하게 정제된 결과물이어야 한다. 기획자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냉정한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괜찮다’는 수준은 사실상 게으른 기획이다. 아직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더 나은 아이디어를 발굴한 여지가 남아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가치를 담는 경영 전략

카네기홀 이사회는 각계의 쟁쟁한 리더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 사안 결정 시, 이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방향성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르다면, 어떤 조직이든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이사회는 각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리더들이 모였지만, 예술의 공공 가치를 믿는다는 공통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비전을 공유하는 이사회라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설득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다. 모두가 진심으로 고민하면 자연스럽게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설득이란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많은 공연장이 기부금 모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카네기홀만의 방식은 무엇인가?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 나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었다. 하나는 연설을 하지 않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모금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오히려 모금 활동을 즐긴다. 기부를 요청하는 일은 단순히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비전을 사람들과 나누고, 공감과 신뢰를 통해 관계를 쌓는 과정이다. 결국 이는 소통이며, 공공의 가치에 대한 설득이다. 설득할 수 있다면, 모금도 성공한다. 진정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일이 왜 중요한가’를 먼저 함께 나누는 일이다.

한 시즌의 운영 예산은 어느 정도이며, 기부금과 티켓 수입의 비율은 어떤가?

2024년 회계연도의 운영 예산은 약 1억 1,700만 달러(약 1,700억)이다. 이중 기부금 수익은 전체 수입의 약 절반 정도이며, 티켓 수익이 14%, 대관 수익이 15% 정도 차지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과 사람

예술가들과의 협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다. 뛰어난 예술가가 없이는 뛰어난 프로그램도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가 평범하다면 아무리 정교하게 기획해도 그 프로그램은 특별해질 수 없다. 그래서 예술가와의 협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객은 공연을 기획한 행정가의 취향에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이다. 기획자의 역할은 예술가가 자신의 메시지를 잘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예술가의 비전을 실현할 무대를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술 기획의 본질이다.

앞으로 10년간, 예술 프로그램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하는 데 있다. 이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동기가 된다. 미디어와 기술은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겠지만, 이는 도구일 뿐 예술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술은 시대를 초월하며,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길린슨은 인터뷰 내내 ‘질문이 답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질문은 단지 경영 전략의 출발점만이 아니라, 카네기홀에 담는 예술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음악계에는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우리 음악 기관에는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을 던질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용기가 다음 세대가 만들 예술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박선민(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카네기홀

 


 

REVIEW  카네기홀에서 만난 한국 연주자

 

선우예권 피아노 독주회

5월 2일 카네기홀 젠켈홀

 

선우예권이 16년 만에,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올랐다. 한국메세나협회가 국내 여러 기업(노루홀딩스·설원량문화재단·벽산엔지니어링·아모레퍼시픽재단·동성케미컬·CJ문화재단·디엑스체인지) 및 미국의 코리아 뮤직 파운데이션과 기획한 ‘카네기홀 데뷔 콘서트 지원 프로젝트’ 공연으로, 이 프로젝트는 우수한 한국 클래식 인재의 국제 무대 진출을 돕고 있다. 지난해 첼리스트 최하영에 이어, 선우예권이 그 두 번째다.

선우예권은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쇼팽과 라흐마니노프까지 다양한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 선보였다.

첫 곡 로베르트 슈만의 환상곡 C장조는 시적인 서정성과 감정의 고조가 융합된 작품이었는데, 선우예권은 이를 부드럽지만 강인하게, 완급 조절 하며 자신만의 해석으로 자연스러운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그의 손과 눈동자가 고뇌했을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어진 작품은 쇼팽의 ‘뱃노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왼손의 분산화음, 오른손의 긴 선율이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그는 내면의 속삭임을 부드럽게 건네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주 후에 만난 선우예권은 “쇼팽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언급했다.

클라라 슈만의 ‘로베르트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 이어, 마지막은 여섯 개의 곡으로 구성된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이었다. 2023년 그의 음반에 수록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는 격정적이면서도 애잔했고, 그러나 살며시 바람이 나부끼는 따뜻함이 묻어있었다. 다양한 작풍의 여섯 곡을 거치며 하나의 큰 서사를 완성해 냈다. 안개처럼 쌓인 모든 의혹을 걷어내고, 마침내 다다른 곳에서는 해답과 명쾌한 수긍을 끌어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선우예권만의 매력이었다. 충만하게 채워진 관객의 박수에 화답하며, 그는 녹음이 짙어지는 오솔길에서 리스트가 편곡한 슈만의 ‘헌정’과 드뷔시의 ‘달빛’을 앙코르로 선물했다. 마법 같은 순간으로 가득 찬 홀에 울려 퍼지는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밤을 풍족하게 수놓았다.

양승혜(뉴욕 통신원) 사진 카네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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