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 U.S.A. orchestra
만프레드 호네크/피츠버그 심포니(협연 조성진) 2025.12.3
지휘자의 내공, 협연자의 개성이 맞물리다
130년 전통의 교향악단과 조성진이 함께 그린 뉴욕 속의 러시아

©Chris Lee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PSO)는 미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로, 130년의 역사와 음반, 그리고 악단을 거쳐 간 지휘자 라인업에서 상당한 위상을 가진다. 산업도시였던 피츠버그가 문화도시로 이미지 전환을 하는 과정에 상징적인 역할을 한 단체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부터 음악감독 프리츠 라이너·윌리엄 스타인버그·앙드레 프레빈·로린 마젤과 수석객원지휘자 마리스 얀손스 등이 PSO를 거쳤고, 2008년에 취임한 만프레드 호네크(1958~)가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을 “정교함과 단단한 품격을 갖춘 사운드”라고 평해 왔고, 미국 음악계에서 꾸준히 신뢰를 쌓아온 단체다.
이번 공연은 카네기홀의 ‘위대한 미국의 오케스트라’ 시리즈의 개막 공연으로 이뤄졌다. 아우어바흐의 작품(뉴욕 초연)을 비롯 라흐마니노프·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한 무대에 선보인, 러시아 레퍼토리 중심의 공연이었다. 카네기홀의 ‘위대한 미국의 오케스트라’ 시리즈인 이번 공연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20), 시카고 심포니(2.25), 보스턴 심포니(4.10)로 이어질 예정이다.
음악의 개념을 실현한 현장

피츠버그 심포니는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작품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첫 곡으로 러시아 레라 아우어바흐(1973~)의 ‘얼어붙은 꿈(Frozen Dreams)’은 마치 우주공간의 울림이 멀리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듯한, 거의 무음에 가까운 지점에서 조용하고 신비롭게 시작되었다. 확정된 선율이나 구조적 발전보다는 서로 다른 속도의 음색이 겹치며 표면을 이루는 방식이 중심이 되었다. 음향은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채 흐름과 정지의 경계를 오갔다.
작곡가는 프로그램 노트에서 “음악은 얼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흐르는 존재”라고 적었는데, 이날의 실연은 그 문장이 담고 있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했다. 마지막은 분명한 결말 없이 미세한 잔향만을 남기고 사라졌고, PSO는 이 작품을 과장 없이 섬세하게 구현하며 음과 음 사이의 긴장과 여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라흐마니노프의 후기 작품 가운데서도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를 기반으로 24개의 변주를 구성했으며, 작곡가는 고대 성가 ‘디에스 이레’를 곳곳에 배치해 파가니니를 둘러싼 악마적 이미지와 죽음의 상징을 교차시켰다. 반면 작품 중반부를 지나며 등장하는 18번 변주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서정성이 펼쳐지며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부분이다.
조성진은 화려한 기교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작품의 호흡과 결을 이끄는 방식에 집중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초반 오케스트라는 다소 성급한 템포로 출발해 피아노와의 호흡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는 중심을 잃지 않고 음악의 흐름을 부드럽게 조율해 나갔다. 특히 여린 음형을 다루는 순간에서 그의 성숙한 감각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음을 놓는 방식의 섬세한 조정에서도 해석의 깊이가 전해졌다. 변주들은 분절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한 흐름으로 이어졌고, 감정의 확장성과 구조적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18번 변주에서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확실히 맞물리며 작품의 중심이 떠올랐고, 이후에는 두 앙상블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견고한 구조로 지은 쇼스타코비치 음향

후반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서는 PSO의 성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호네크는 감정의 과잉보다는 작품의 구조를 견고하게 세우는 방법을 택했다. 1악장에서 현악기군은 단단한 리듬으로 기초를 놓았고 금관 파트는 절정의 순간에도 전체 음향의 균형을 지탱했다. 현악기의 섬세함이 돋보였던 3악장은 전체 작품에서 깊은 서정성이 가장 주목받는 장송곡이다.
호네크의 지휘는 현의 울림을 잘 끌어내며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절제된 정서와 긴장을 드러냈다. 15분에 이르는 무거운 느린 3악장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등장하는 팀파니와 금관의 강직한 리듬의 거대 행진곡이 이어졌다. 4악장의 도입부는 현악기가 주도했던 1악장의 시작점과 큰 대조를 이뤘다. 격렬하고 공격적이던 금관의 추진력이 잦아들면서 현악기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긴장을 달랬다. 재현부에 도달하며 다시 음악적 갈등이 고조되었고 금관파트의 날카로운 울림이 다시 부각되었다. ‘빠른 시작, 느린 중간, 빠른 종결’이라는 전통적인 대조 구조를 따르는 4악장은 장대한 환희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승리와 영광을 향하는 여정처럼 보이지만, 내면적 긴장과 불안이 남으며 완전한 해소를 주지 못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소련 당국이 요구했던 ‘영웅적인 결말’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성의 미묘한 일탈과 경직된 리듬의 반복된 사용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준다.
‘파가니니 랩소디’의 피아노 협연에서 펼쳐진 절제된 해석은 공연 전체의 흐름을 바꿔 쇼스타코비치의 혼란하고 복잡한 서사 위로 겹겹이 쌓여 새로운 결을 만들어냈다. 세 작곡가의 개성이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무대에서는 충돌이 아닌 연결로 작용했다. 아우어바흐가 남긴 ‘여백’, 조성진의 깊어진 ‘시선’,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구조적 ‘긴장’이 한 흐름 안에서 독특한 긴장감을 이루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들이 포개진 이 밤은 뉴욕의 차갑던 겨울 공기를 따뜻하게 바꿔 놓았다.
글 양승혜(뉴욕 통신원) 사진 카네기홀
Info
피아니스트 조성진, 2026년 상반기 일정은?
조성진의 신년은 만프레드 호네크와의 협업을 이어가며 시작하는 모양새다. 1월에는 그와 함께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협업하며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넬손스/보스턴 심포니와도 같은 작품을 연주한다. 2월에는 ‘아티스트 포트레이트’로 있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다수 갖는다. 오케스트라의 영국·스페인 투어에 동행하여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며, 2월 13일에는 런던심포니와 신동훈의 ‘그림자’ 등을 포함한 실내악 공연, 김선욱과의 듀오 공연도 펼친다.
한편 상반기 조성진의 독주회 레퍼토리는 바흐 파르티타 1번, 쇤베르크 피아노 모음곡 Op.25, 슈만 ‘빈 사육제’, 쇼팽 왈츠 중 14곡이다. 해당 프로그램으로 독일·네덜란드·이탈리아·벨기에·미국·일본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 4월에는 베토벤 협주곡 1번으로 라하브 샤니/뮌헨 필하모닉과 호흡을 맞추며 독일·대만 등에서 연주를 갖고, 5월에는 이들과 함께 한국을 찾는다.
여름에는 흥미로운 실내악 공연들이 보인다. 무엇보다 조성진이 바이올리니스트와 긴밀히 협업하는 특별한 해가 될 듯하다. 파트너로 나선 것은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7월 독일에서 브람스·야나체크·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에이미 비치의 바이올린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다.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이한 롯데콘서트홀은 ‘인 하우스 아티스트’로 조성진을 선정, 이로 인해 7월에 두 번의 공연을 갖는다. 14일에는 다이신 카시모토를 필두로 박경민(비올라), 벤젤 푹스(클라리넷), 슈테판 도르(호른)로 구성된 베를린 실내악 어벤져스에, 첼리스트 기안 솔타니까지 더해 화려한 라인업의 실내악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19일에는 앞서 언급한 상반기 주요 독주회 레퍼토리로 한국의 관객을 찾는다.
정리 허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