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지휘자 금난새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2월 2일 9:00 오전

COVER STORY

 

지휘자·프로젝트 음악감독

금난새

날자, 함께

 

 

“관객이 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 금난새는 예술의 엄숙주의를 넘어, 음악의 의미와 재미를 버무려 전달하는 법을 설계해 온 지휘자다. 제주에서 뉴욕으로, 시장에서 궁궐로, 하수처리장에서 실내악홀로.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공동체의 기억과 만날 때, 지휘는 공연을 넘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고, 예술의 미래가 된다

총괄 유내리 기자 사진 강태욱·버드하우스

 

INTERVIEW 지휘자 금난새 _양경원

BOOK & RECORDS 금난새의 페이지들 _최성혁

 


 

INterview

미국의 투자자 로버트 기요사키의 저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1997)에는 이런 일화가 등장한다. 한 젊은 기자가 기요사키에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기요사키는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세일즈 학교에 가보라고 권한다. 기자는 얼굴을 굳히며 “내가 석사 학위를 따고 전문가가 된 것은 세일즈맨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며 마음 상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기요사키는 대답한다. 전문 기술에 더해 경영과 마케팅 방식을 잘 쓸 줄 알면, 또한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지휘자 금난새(1947~)의 행보는 이 일화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70대인 지금도 연 100회가 넘는 무대에 오르는 그는 연주자를 넘어, 스스로를 ‘기획하는 CEO’로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2017년에 출간한 ‘CEO 금난새’에서 그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과정을 하나의 ‘벤처 기업’에 비유하기도 했다. 나아가 기획력과 마케팅 능력, 공연을 위한 카피라이팅부터 성남시향의 유튜브 편집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연주를 아무리 준비한들 관객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극장에 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며 한국의 ‘예술 엄숙주의’에 여전히 도전하는 현재진행형의 꽃청춘, 금난새를 역삼동의 조용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유혹한다

여타 지휘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경영자적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음악을 바라보게 된 출발점은 어디였나요?

떠오르는 사례는 20년 전, 2005년부터 12년 동안 제주에서 이어온 실내악 페스티벌입니다. 당시 한국 음악계에서는 실내악 연주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대형 홀과 교향곡 중심으로 움직였죠. 저는 그게 일종의 편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내악은 음악의 기본이자, 작은 공간에서 관객과 가장 밀도 높게 만날 수 있는 장르니까요.

제주신라호텔의 공간에서 관광객과 도민, 기업인들이 함께한 연주가 도화선이 되어 ‘제주뮤직아일페스티벌’이 자리를 잡았어요. 점차 페스티벌은 성장했고, 여러 기업이 요일별로 후원에 나섰습니다. 그중 세 기업인 풍산, 삼양, 그리고 이건창호는 페스티벌이 열린 12년 내내 함께했지요. 그곳에서 만난 스타인웨이사의 대주주이자 삼익악기 김종섭 회장에게 제안해, 2008년에는 뉴욕 스타인웨이 홀에서도 비슷한 형식의 실내악 페스티벌을 열었어요. 풍산(회장 류진)과 고려 제강(회장 홍영철)의 후원이 뒤따랐지요. 이 과정에서 느낀 건, “내가 잘할 수 있다”라며 말로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반드시 결과를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과가 마음에 들면, 상대가 먼저 “다음 연주는 언제 할까요?”하고 되묻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유혹한다고요.’

지휘자의 영역을 넘어, 기획자에 가까운 사고와 실행력이 느껴집니다. 확연히 다른 이 시선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어릴 때부터 아이디어가 많았어요. 1964년 서울예고 재학 중에도 ‘학교 앞에 분식집만 가도 서울고나 배재고 학생들이 늘 북적이는데, 이 친구들을 우리 학교로 토요음악회를 보러 오게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죠. 당시 김남윤(1949~2023) 씨가 저보다 한 학년 아래였는데 그녀를 비롯해, 잘하는 친구들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같은 곡을 연주하게끔 토요음악회를 기획했죠.

‘제야음악회’라는 것이 성행하기 전인 1994년에 제야음악회도 기획했습니다. 지금은 보편적인 연말 풍경이 되었지만, 당시 획기적인 시도였을텐데요.

예술의전당에 제안할 때만 해도 직원들이 전부 쉬는 날이라 사장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추운 날 보신각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음악회 하면 반드시 된다”고 설득했고, 결국 한 달만에 매진됐습니다. 그날 앙코르 전, 객석에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전통은 예부터 내려오는 것이지만, 모든 전통은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객석이 크게 호응했죠.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1994), ‘금난새와 함께하는 세계음악여행’(2001~2006)은 대부분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으로부터 지금보다 훨씬 멀었던 당시에도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가 잘 되었던 것은 그 시기 청소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파악한 데에 있습니다. 무료든, 유료든 뭘 알아야 집중할 수 있잖아요. 의무로 시키면 몸은 와 앉아있지만 딴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30년 전에는 그런 공연이 많았어요. 그렇게 억지로 학생들을 오게 한 경우, 객석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것까지 봤죠. 그런 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고, 클래식 음악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아가게 한 전략이 통했던 거죠.

저 자신도 청소년 시절 레너드 번스타인이 진행하는 해설 음악회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1958~1972)를 AFKN(주한미군 산하 방송)에서 보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고요. 그래서 학생들 표값을 2천 원으로 정했어요. 무료로 하지 않은 것도 의도적이었습니다. 용돈을 모아 직접 표를 사고 공연장에 오는 경험을 주고 싶었거든요.

 

보다 다양한 무대를 향해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강렬한 순간으로 남은 시도들이 여럿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요?

동대문시장 한복판에서 했던 연주입니다. 2013년에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충무아트홀센터에서 상주단체로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인근 동대문시장이 개장 100주년을 맞아 연주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음악 단체도 100년을 이어가기 어려운데, 시장에 담긴 그 역사 자체가 의미 있다고 느꼈죠. 시장 앞 야외에 특설무대를 마련하고 상인들과 관광객들을 위해 해설과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그 바로 다음 주에 베를린 필하모니 체임버홀에서 연주(한독 수교 13주년 기념 합동음악회)가 예정돼 있었지만, 제게는 두 공연이 똑같이 소중했어요. 비가 조금 내렸는데도 관객들이 무척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공연을 계기로 명동상인협회에서도 연락이 왔고, 2014년 명동예술극장 앞 야외무대 연주로 이어졌습니다. 또 문화재청 주관으로 2016년에는 덕수궁 야외무대에서, 201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죠. 공간을 바꾸면 관객도 달라지고, 음악이 닿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걸 현장에서 체감한 경험들이었습니다.

사회적 기억과 역사 영역까지 연주가 확장되는 모습도 인상적이네요.

미래 이야기를 해볼까요? 오는 2월 27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떠있는 항공모함에서 연주할 예정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1903년, 한국인 300명이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며 번 2천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역사에서 출발했어요. 그곳에는 그들이 손수 지은 교회도 남아있고요.

본받아야 할 애국심이고 널리 알려져야 할 이야기이지요. 지난해 3월, 영사관 후원의 3.1절 기념행사로 성남시향 단원들과 그 교회를 방문해 ‘나라사랑, 평화음악회’를 열었는데, 하와이 심포니에 소속된 한국인 단원 다섯 명 또한 함께 체임버 연주를 했습니다. 제2바이올린 주자는 당시 노동자의 증손자였어요.

이 기념 있는 연주를 계기로 한미동맹협회의 후원이 이어졌고, 다시 한미동맹협회는 하와이 미국 7사단과 연결되며 이번 진주만 연주로 확장되었습니다. 아리랑TV도 동행해 이 과정을 기록할 예정이고요. 제가 독특한 곳에서 연주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음악이 어떻게 사회와 호흡할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공헌할 것이냐를 늘 고민해왔기 때문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연대하며 만드는 순간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초년 시절 기대었던 거인의 어깨

1977년 카라얀 콩쿠르. (왼쪽부터) 금난새, 발레리 게르기예프, 야체크 카스프치크

1977년 카라얀 콩쿠르 당시의 감회를 다시 한번 떠올려주세요. 1974년에 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간 후, 3년 뒤 입상했지요?

베를린에 처음 갔을 때 참 어려움이 많았어요. 한국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지휘를 배운 적도 없는데 무작정 독일에 가서 대학 입학을 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지요. 결국 독일에 머물며 재수를 한 셈이거든요. 그 시기에 제가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저를 제자로 받아주신 한스 마틴 라벤슈타인(1930~) 교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누가 너의 1974년에 관심이 있겠니?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네가 나중에 진짜 성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스물일곱 살인 넌 지금 시간이 없어. 아직 정식 학생으로 입학한 것은 아니지만, 내 지휘 수업에 들어와도 좋으니 청강을 하도록 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회가 나한테 문을 열어주는구나!’ 그렇게 수업에 들어갔고, 결국 입학을 하게 되었죠. 이후 학생으로서 다른 학생의 플루트 협연을 지휘할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 연주를 보시고는 아주 잘했다며 카라얀 콩쿠르에 나가보라고 권하셨어요.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뒤늦게 들어온 처지였는데, 대회 참가를 권해주신 것만으로도 라벤슈타인 교수가 마치 아버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는 ‘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한들 이것보다 기쁠까’싶었어요. 스승의 인정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후발주자였음에도 빨리 인정받고, 콩쿠르에서 수상까지 했네요.

낮에 수업이 없을 때는 무조건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갔어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베를린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닉까지요. 사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청강이 허락되지도 않았어요. 당시에도 ‘카라얀 아카데미’라고 학생들을 뽑아 오케스트라 경험을 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저는 그 프로그램 참여자도 아니었지만, 수위 아저씨 앞을 지날 때면 마치 ‘카라얀 아카데미’ 학생처럼 “구텐 모르겐!” 하면서 자연스럽게 들어갔어요. 합창석에 혼자 앉아서 오케스트라 연습을 지켜봤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가운데는 제가 다니던 베를린 음대 교수님들도 있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인사할 뿐 제게 뭐라고 하진 않더군요. 덕분에 로린 마젤, 아바도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베를린필과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삶의 현장, 이른바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을 속속들이 본 셈이죠. 그때 배운 것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콩쿠르에서도 저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1·2차 예선을 거쳐 3차는 하노버 라디오 오케스트라를, 마지막 라운드에서 베를린필을 지휘하게 되어 있었죠. 사실 그땐 독일어도 잘 못했지만, 그럼에도 제 음악을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해주세요”가 아니라, 정말 강하게 “그건 베토벤이 아니야!”(Das ist nicht Beethoven!) 하는 식으로요. 한국에서는 ‘안 틀리고 잘 하나’ ‘테크닉이 어떤가’를 먼저 보지만, 유럽의 관점은 ‘지휘자의 자질과 성장 가능성이 있는가’를 봅니다.

한국의 음악 교육이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것’에 과하게 집중한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렇죠. 한국에서는 ‘안 틀리면 잘하는 것’이고, ‘옆의 애보다 잘하면 되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저 역시 서울예고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동시에 문제점도 잘 알고 있어요. 2013년부터 수년간 서울예고 교장도 했으니, 더 잘 알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교장이 되고 나서 학생들에게 방학 때는 자기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에게도 가서 배워보라고 권했어요. 사실 관행은 다 알고 있잖아요. 예고 시절에도, 또 그 이전에도 몰래 다른 선생님 레슨을 받는 경우가 있었으니까요. 그걸 아예 열어놓고 이야기하자고 한 겁니다. 반응은 엇갈렸어요. ‘다양한 음악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쉬쉬하던 걸 왜 저렇게 드러내느냐’며 낯설어하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렇다면 바람직한 음악 교육의 방향은 무엇인가요?

지금도 제 생각은 같습니다. 전공을 넘나드는 배움이 필요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오보에 전공자가 성악가한테 음악의 또 다른 결을 배운다는 등. 제가 보기에, 선생님 위주로 짜인 틀이 아직도 많아요. 학교도 콕 집어서 어느 학교만 좋고, 어떠한 증서·졸업장 등등. 너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훌륭한 학교에 가는 것도 좋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를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자세도 충분히 값지지 않나요?

 

도시와 환경을 바꾸는 지휘자의 가치

수원시향(1992~1999), 경기필하모닉(2006~2010), 인천시향(2010~ 2014), 그리고 성남시향에 2015년에 취임하여 악단을 현재까지 이끌고 있습니다. 일했던 곳마다 변화를 주도하고, 그곳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부임한 후, 조직과 도시의 분위기까지 바꿔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수원시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갔나요?

부임하자마자 시청에서의 첫 시무식부터 아이디어를 냈어요. “수원시청 로비에서 시무식 음악회를 하자”고요. 그렇게 시청 직원 500명이 로비에서 음악회를 보게 됐습니다. 당시 시장이 흥분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평생 관직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행복한 날은 처음이다.” 그 이후 단원들 보너스를 올리자는 건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고요.

저는 늘 가까운 사람들부터 긍정적인 경험을 갖게 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을 택해왔습니다. 시청 직원들,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음악을 통해 좋은 기억을 쌓게 하는 거죠. 그 결과, 한 해에 10회도 채 안 되던 연주 횟수가 3년 만에 연 60회로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수원을 연고로 둔 삼성전자가 수원시향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결국 수원 야외음악당 건립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변화가 내부에서 시작해, 결국 도시 전체로 확장된 셈이죠.

현재 이끌고 있는 성남시향은 어떤가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죠. 2024년에는 정기연주회와 특별연주회가 모두 매진이었고, 2023년에도 두 공연을 제외하고는 18회 공연이 매진됐습니다. 그래서 제 입으로 “내가 잘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오케스트라라는 건 이미 증명됐으니까요. 성남시향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인데, 그 세금을 내는 시민에게 행복을 돌려드리는 것이 최우선이죠.

예산이 더 많고, 공연장이 큰 지자체도 많습니다. 대규모 예산으로 해외의 유명 협연자를 초청하는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의 지휘자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그런 기준으로 경쟁할 이유도 없고요.

저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청중이 음악과 예술을 통해 공연장으로 발걸음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미래의 청중을 키워가는 일입니다. 그게 공공 오케스트라가 해야 할 가장 옳은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2025년에 성남시 분당구에 새로 개관한 ‘성남물빛정원 뮤직홀’도 시민들의 발걸음을 늘리는 데에 보탬이 될 수 있겠네요. 더불어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의 명예예술감독으로 위촉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요. 그 일대가 원래 하수 처리장이었고, 준공 후 28년 동안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시설이었어요. 역대 시장들도 풀지 못한 숙제였는데 신상진 시장에게 음악공간을 만들면 어떠냐고 제안했죠. 여기에서도 연결점이 생기는데, 이때도 말로만 ‘음악공간 만들자’고 했으면 반신반의했을 거예요. 헌데 부산의 ‘금난새 뮤직 센터’(이하 GMC) 성공 사례가 있잖아요. GMC도 폐공장을 리모델링해서 음향이 좋은 연주홀을 만든 경우니까 비슷한 샘플이 있는 셈이죠. ‘easy to say yes’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활용된 새로운 공간에서 양질의 클래식 음악을 즐기게 되는 시민에게, 우선 큰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고요.

대규모 콘서트홀 건립과 비교했을 때, 효율적인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제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성남시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효율성은 꼭 짚고 가야 할 부분입니다. 요즘 논의되는 대도시 콘서트홀 건립 예산을 보면 1천억 원이 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은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예산으로, 시에 꼭 필요한 문화 시설을 만든 사례입니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의사와 국회의원을 거친 분이고, 행정가로서도 굉장히 꼼꼼한 분이에요. 제안의 장점과 효율성을 바로 알아보았죠. 그래서 추진 과정에서도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에서는 주로 실내악 공연이 이뤄지겠죠?

신인음악가들이 성장하며 관객에게 실력을 알릴 수 있는 ‘실내악의 메카’로 만들어보려고 해요. 이미 유명한 음악가나 교수들은 어찌 보면 내가 필요 없죠. 아직 유명하지 않지만 잘하는, 숨은 보석 같은 친구들을 발굴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기획 단계이긴 하지만 콩쿠르와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구상 중입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극장 문을 열어놓고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리허설을 하는 것처럼요.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다 듣고 즐거워하거든요. 연주자의 결과물뿐 아니라 과정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세대를 이은 ‘둥지’의 전통

금난새는 2011년부터 대학연합오케스트라와 농어촌희망재단 희망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대학연합오케스트라는 경희대·고려대·서울대·연세대·카이스트 등 25개 대학생들이 만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이고, 희망오케스트라는 농어촌 지역의 저소득층·다문화가정의 어린이를 중심으로 전국 20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두 오케스트라는 예술의전당, 천안예술의전당, 과천시민회관 등 주요 공연장에서 무대를 올리며 실질적 성과도 이뤘다.

이처럼 뜻깊은 공동체를 향한 시선과 실천은 어쩌면 집안의 내력일지도 모른다. 가곡 ‘그네’로 잘 알려진 금난새의 아버지, 작곡가 금수현(1919~1992) 역시 부산에서 젊고 재능 있는 청소년들을 돕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가족사의 맥락은 인터뷰에 동석한 GMC의 금다다 총괄 디렉터의 설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021년 부산에 개관한 GMC는 120~150석 규모로 실내악 공연과 페스티벌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금다다 GMC는 ‘둥지’를 지향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금난‘새’이기도 하니, 예술가들이 잠시 머물며 날개를 기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연주하는 젊은 연주자들은 단순히 악기를 잘 연주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무대에서의 태도와 매너, 옷차림, 마인드 컨트롤, 인사하는 법까지 금난새 선생님으로부터 음악가로서 갖춰야 할 전반적인 자세를 조언받기도 하죠.

이 공간을 구상하게 된 계기와 설립 취지는 무엇인가요?

금난새 언젠가 제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은 고려제강의 홍영철 회장이, 이후 부산의 공장 부지와 옛 공장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다가 나를 떠올려 준 것입니다. 부산이 낳은 기업인과 예술인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겠죠. 부산 출신 기업(고려제강)이 부산 시민에게 어떻게 기여하고, 어떻게 환원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다가 음악으로 보답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2021년 GMC가 문을 열었고, 현재 신인 연주자들을 발굴해 실내악 연주와 페스티벌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다행히 부산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요.

이런 ‘둥지’의 역할을 부친(작곡가 금수현)께서도 하셨다고요.

금다다 할아버지께서는 1960년대 ‘별을 돕는 모임’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셨다고 합니다. 이 모임은 부산 지역의 사람들과 지역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돕는 후원회였는데, 음악가만 돕는 게 아니라 운동선수까지 폭넓게 지원했다고 해요. 그중에는 당시 10대였던 백건우 선생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금난새 우리 아버지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었어요. 풍족하지 않았는데도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아서 백건우 씨가 우리 집에 와서 ‘헝가리 무곡’ 같은 걸 연주하고 그랬죠. 문교부 편수관으로 재직하시며 음악용어와 인명사전도 출판하셨고, 외래어 표기 표준화 같은 작업도 하셨습니다. 말년에는 평생의 꿈이던 오페라 작곡에 힘쓰셨습니다.

금다다 얼마 전 무대 뒤에서 백건우 선생님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 백 선생님이 제게 직접 “금 지휘자 아버지의 ‘별을 돕는 모임’이 생각난다”고 말씀해주셨죠. 그때 이 ‘둥지’의 전통이 세대를 넘어 이어져 왔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금 지휘자의 이러한 남다른 원동력과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저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제 위에 형이 있었어요. 서른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형이 떠난 나이보다 40년을 더 살았습니다. 장남이자 6대 장손인 형이 떠났으니, 저는 자연스레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되었어요. ‘차남이니까 독일에서 음악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이제는 집안에 책임이 있다’는 마음으로 바뀐 거죠.

형은 참 멋있는 사람,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당시 외국에 공부하러 간다며 군복무를 피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스스로 입대해서 월남전에 참전했으니…. 결국 그곳에서 사고가 있었고, 그 후유증으로 한국에 와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님이 별 말씀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첫째도 되고 둘째도 되어야겠다, 생각한 거죠. 형 몫까지 산다고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견딜 수 있습니다. 조금 촌스럽고 유치할 수도 있지만 내가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바로 그 이유 같아요.

 

2014년 성남시향 예술총감독 위촉 당시의 홍보·행정에서 사용된 캐치프레이즈 ‘금난새와 함께 비상(飛上)을 꿈꾼다’는 말처럼, 높이 날기 원하는 이들이 금난새 지휘자를 찾아 자기만의 바람을 성취해왔다. 하늘에 있는 형의 몫까지, 그리고 이 땅에서 여전히 꿈을 품은 이들의 손까지 기꺼이 잡고 날아오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지휘자. 금난새는 오늘도 당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Change The City

 

신상진 성남시장

도심의 흉물을 음악의 정원으로 바꾸다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 위치한 하수처리장은 1997년 완공되었지만, 거주민들의 반발로 정상 가동을 못하고 28년간 방치되었다. 그야말로 도심 속의 흉물이었던 셈. 성남시는 철거 대신 기존 구조물을 보존하며, 문화적 가치를 입힐 업사이클링으로 변모시킬 방향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금난새의 제안으로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을 건립하게 되며 ‘도시 재생’과 ‘문화 균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게 되었다. 150석 규모의 실내악 중심인 이 공연장은 연주자와 관객이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다. 2025년 9월 개관 이후 연중 정기적인 실내악 공연을 중심으로, 시민 대상 아카데미 등 참여형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지역 도민들의 문화 향유를 책임지게 된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의 건립 배경을 신상진 성남시장의 이야기를 통해 짚어본다.

오랫동안 활용하지 못했던 구미동 하수처리장 부지를 음악 공간으로 조성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하수처리장은 가동되지 못한 채 삼십 년을 방치되어 있었죠. 특히 문화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구미동 일대의 지역적 여건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지역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일상 속에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적 목표였습니다. 성남시의 클래식 음악 대중화를 이끌어온 금난새 지휘자의 음악적 경험과 대중성은 공간이 지닌 메시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요소였죠. 유휴 산업시설의 재생이라는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의 목표와 지금까지 금난새 지휘자가 보여준 행보가 맞닿으며, 변화와 방향성이 구체화되었습니다.

개관 이후 물빛정원 뮤직홀은 성남을 넘어 경기도 문화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운영 방향성은 무엇이었나요?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은 실내악 중심 공연장으로, 연주자와 관객이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하며 ‘관람’이 아닌 ‘함께 경험하는 시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기관광공사가 선정한 ‘경기도 재탄생 여행지 6선’에 포함되며, 경기도 전반의 문화적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죠. 이는 일회성 행사나 단발성 프로그램의 성과라기보다는 공간과 콘텐츠, 그리고 금난새 지휘자의 지속적인 기획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문화예술계는 종종 정치·행정 환경 변화에 맞물려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음악가와 정치가가 각각 어떤 역할과 책임을 나누며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요?

정치와 행정의 역할은 예술가가 자유롭게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와 행정 절차가 예술의 창작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구미동 하수처리장 부지는 30년 동안 행정이 풀지 못했던 과제였습니다. 그 공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것은 행정의 책임이었고, 그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예술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남물빛정원 뮤직홀은 정치와 예술의 역할 분담이 명확하고, 잘 작동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유내리 기자 사진 성남시청

 


 

BOOK & RECORDS

서적과 음반으로 만나는 금난새의 행보

도전의 연보, 금난새의 페이지들

 

금난새의 책과 음반을 따라가며 그가 걸어오고, 그의 음악이 만들어진 과정을 되짚어본다. 유학과 데뷔, 교육과 기획, 가족의 서사는 물론 그가 남긴 음반까지 이번 취재를 통해 한 자리에 모아보았다

최성혁 기자

 

자서전 01

{ 나는 작은새 금난새 }

1996년 | 디자인하우스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금난새의 자서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이야기, 독일 유학 생활에서의 에피소드, KBS교향악단과 수원시향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시절 등 삶에 영향을 끼친 핵심적인 기억들을 담아냈으며, 음악을 대하는 본인의 철학도 함께 드러낸다. 책머리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 이강숙의 추천사가 남아있다.

 

자서전 02

{ 마에스트로 금난새 열정과 도전 }

2007년 | 생각의나무

두 번째 자서전으로, 1977년 카라얀 콩쿠르 입상과 지휘자 데뷔 이래 30주년을 맞이하여 집필한 책이다. 지휘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국내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저변의 확장을 위해 숱한 도전을 거듭했던 순간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 베토벤과 나눈 가상의 대담과 같은 입체적인 형식들을 활용한 파트들도 돋보인다.

 

자서전 03

{ 모든 가능성을 지휘하라 }

2015년 | 예경

책은 서울예고 교장으로 임명될 당시의 시점에서 시작하며,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도전들을 다시 한 번 꺼내놓는다.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유쾌함으로 고난 속에서도 유연하게 인생을 설계해가는 인생관을 드러내며, 좌절을 겪는 청춘들에게는 일어설 힘을, 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걸음 다 나아갈 용기를 부여한다.

 

자서전 04

{ CEO 금난새 }

2017년 | 한국경제신문사

그간 집필해온 자서전에 담긴 각종 일화들이 음악인의 시선에서 쓰인 내용이라면, 여기서는 경영자의 관점으로 지난날을 반추한다. ‘신나게 즐기십시오’ ‘마음껏 상상하십시오’ ‘과감하게 도전하십시오’와 같이 진행되는 챕터는 기존의 자서전이 갖는 방향성과는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그가 지나온 행보는 ‘음악’이란 분야를 넘어서는 포괄적인 ‘확장’을 이루게 된다.

 

자서전 05

{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 }

2019년 | 다산책방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자서전으로 부친 금수현(1919~1992)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행되었다. 금수현은 성악을 전공했고, 공연 활동 외에도 문교부 편수관으로 근무하며 국내에 통용되는 음악 용어를 한글로 바꾸는데 공헌했으며, 음악저작권협회장, 한국작곡가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음악계의 전반적인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금난새는 아버지의 글 75편을 추려 다듬고,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에세이까지 총 100편의 글을 이 책에 녹여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 그리고 가족애를 엿볼 수 있으며, 책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금난새의 고백이 담겨 있다. “글을 쓰다가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제 나름대로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제가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 (중략) … 어쩌겠습니까? 이게 천성인 것을요.”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클래식 음악 입문서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

2003년 | 생각의나무

관객들에게 금난새는 지휘자임과 동시에 언제나 ‘친절한 해설가’였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수없이 많은 대중을 향해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마음가짐은 음악 입문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은 클래식 음악이 ‘어렵다’는 대중의 고정관념을 내려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진행된다. 금난새는 바흐와 헨델, 모차르트와 하이든, 베토벤과 로시니처럼 이야깃거리를 엮을 만한 두 작곡가를 묶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바로크 시대부터 낭만 시대를 다룬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말러와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와 버르토크 등 후시대의 이야기를 담았다. 2003년 책의 1·2권을 합본하여 2012년에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으로 재출간되었다.

 

{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

2008년 | 생각의나무

제목처럼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대한 개괄적 설명에 이어 하이든 교향곡 45번 ‘고별’,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등 가장 친숙하게 접할 만한 교향곡을 엄선하였다. 2012년 ‘금난새의 교향곡 여행’으로 개정되어 재출간되었다.

 

{ 금난새의 오페라 여행 }

2016년 | 아트북스

오페라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이후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비제 ‘카르멘’, 푸치니 ‘토스카’와 같은 친근한 오페라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책의 끝 부분에는 오페라 용어·구조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새긴, 음반

Best Albums

금난새의 대표 음반이라면 25장에 이르는 ‘금난새와 함께 가는 유쾌한 음악여행’ 시리즈를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곡을 소개하기 위해 금난새가 여러 음원을 수집하여 ‘엮어낸’ 모음집이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지휘한’ 음반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번 취재를 진행하며 지나간 시간에 잠들어 있는 그의 음반들의 먼지를 털어보았다.

1988년 유러피안 마스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협연 류드밀 안젤로프), 토마 프로세프 ‘빌리아나를 위한 아다지오’, 레스피기 ‘옛 아리아와 춤곡 모음곡 3번’을 수록한 음반을 녹음(1989년 출시)➊하였다.

1989년에는 셰드린 편곡의 비제 ‘카르멘 모음곡’ 음반➋, 프로코피예프 ‘피터와 늑대’와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를 담은 음반➌을 출시했다. 두 음반 모두 KBS교향악단과의 연주다.

이후 레닌그라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두 음반이 출시되었다. 한 음반에는 모차르트 교향곡 39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3번(협연 미하엘라 마틴)➍을, 다른 음반에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➎을 수록했다.

1994년에는 조수미의 첫 한국가곡 음반 ‘새야 새야’➏를, 2004년에는 한국가곡을 모은 ‘한국인의 정’➐을, 그리고 2005년 유라시안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비발디 ‘사계’➑를 녹음하였다. 2013년 재발매된 콘스탄틴 오르벨리안의 피아노 음반➒에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0번을 지휘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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