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 클라우스 메켈레/시카고 심포니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4월 23일 5:00 오후

WORLD HOT U.S.A. orchestra

 

클라우스 메켈레/시카고 심포니 2.25

새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영웅’을 다룬 슈트라우스·시벨리우스의 곡으로, 뉴욕을 놀래킨 지휘 ‘영웅’의 신고식

©Todd Rosenberg

2024년 4월, 여전히 강바람이 차갑게 불던 시카고를 찾았다. 클라우스 메켈레(1996~)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이틀 뒤였다. 당시 28세였던 젊은 지휘자의 등장은 그 자체로 음악계의 화두였고, 공연장은 그 실체를 확인하려는 관객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발코니 꼭대기 층에서 공연장을 내려다보자 그의 등장을 기다리는 시선이 무대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지휘하던 그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치밀했고, 오케스트라와 주고받던 팽팽한 긴장감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지난 2월 메켈레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카네기홀 스턴 오디토리움에 등장한 밤, 공연장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했다. 객석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클라우스 메켈레에게 향했다.

1891년 창단된 시카고 심포니는 뉴욕 필하모닉·보스턴 심포니·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하는 빅 파이브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독일 후기 낭만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강한 전통을 이어온 이 악단은, 게오르그 솔티와 다니엘 바렌보임, 리카르도 무티 등의 거장 지휘자들과 함께 독특한 음향 세계를 구축해 왔다. 힘 있는 금관 악기와 정교한 앙상블은 이 오케스트라의 상징이기도 하다.

 

입체적으로 펼쳐진 두 영웅 이야기

©Todd Rosenberg

이번 카네기홀 프로그램은 R.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와 시벨리우스 ‘레민카이넨’으로 구성되었다. 두 작품 모두 ‘영웅’이라는 서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비를 이뤘다. 미국 문화 비평지 ‘더 뉴 크라이테리언’은 이 프로그램을 “두 개의 서로 다른 영웅 서사를 담은 작품의 만남”으로 설명하며, “하나는 작곡가 자신을, 다른 하나는 핀란드 신화 속 영웅을 중심에 둔 작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레민카이넨’은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에 등장하는 젊은 영웅의 모험을 그린 네 개의 교향시 모음곡이다. 사냥과 유혹, 전투,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장면들이 음악 속에서 이어진다. 시벨리우스 특유의 어두운 색채와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점진적으로 축적되는 에너지가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제2곡 ‘투오넬라의 백조’는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잔잔하게 이어지는 현악기 위로 잉글리시 호른의 선율이 덧입혀지는 순간, 어둡고 고요한 호수 위의 공간이 아름다운 빛으로 채워졌다. 제3곡 ‘투오넬라의 레민카이넨’에 이어 ‘레민카이넨의 귀향’에서는 앞선 정적을 깨뜨리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클래식 전문 매체 ‘바흐트랙’은 “메켈레가 현악기의 미묘한 트레몰로로 입체적인 음향 공간을 만든 뒤 잉글리시 호른 솔로를 자연스럽게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후반부에 연주된 R.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에서는 시카고 심포니의 전통적인 강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작품은 작곡가 자신의 삶을 영웅 서사처럼 묘사한 대규모 교향시로,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극적인 대비가 특징이다. 특히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아내, 파울린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돋보인 악장의 바이올린 솔로는 이날 공연의 또 다른 정점이었다. 악장은 변덕스럽고 날카롭다가도 때로는 한없이 감미로운 선율을 풀어내며 곡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시카고 심포니는 1900년, ‘영웅의 생애’ 일부를 미국에서 초연했던 역사적 인연이 있다. 이날 공연에서도 시카고 심포니는 관악기 음향과 치밀하게 맞물리는 앙상블을 조율하며 음향의 구조를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시작과 끝의 균형 또한 적절하게 유지되며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힘 있게 이어졌다.

 

©Todd Rosenberg

지휘자의 손길로 선명해진 악단의 색채

메켈레는 음악의 윤곽을 다루는 방식이 독보적인 지휘자다. 때로는 선을 또렷이 세워 구조를 분명히 드러내고, 또 어떤 순간에는 그 경계를 흐리며 색채와 질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드러나야 할 부분과 물러나야 할 곳을 자연스럽게 구분하면서도 전체의 균형을 섬세하게 유지한다.

그는 현재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오슬로 필하모닉과는 2026년 조기 계약 종료로 임기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동시에 2027년부터는 시카고 심포니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차기 음악감독으로도 내정되어 있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정점에 있는 세 오케스트라를 서른 살의 젊은 지휘자가 동시에 이끄는 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다.

메켈레는 이처럼 여러 유럽 악단을 오가는 지휘자이지만, 시카고 심포니와의 연주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전통적인 음향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음향의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집중했다. 악단이 지닌 특유의 밀도와 힘은 그대로 살리면서, 그 안에서 색채와 구조의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연주가 끝난 뒤 객석에서는 여러 차례 커튼콜이 이어졌고, 시벨리우스의 ‘크리스티안 2세 모음곡’ 중 ‘뮤제트’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정적 뒤에 터져 나온 환호 속에서, 시카고 심포니의 단단한 전통 위에 메켈레라는 새로운 감각이 성공적으로 덧입혀졌다는 확신 어린 박수가 울려 퍼졌다.

이번 카네기홀 공연은 메켈레가 단순히 떠오르는 젊은 지휘자가 아니라, 이미 자신만의 음악 언어로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구조를 조형하는 지휘자임을 분명하게 보여준 무대였다. 2027년부터 시카고 심포니라는 거대한 함선을 이끌어갈 젊은 선장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클라우스 메켈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양승혜(뉴욕 통신원) 사진 시카고 심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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