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인천시립교향악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10월 1일 9:59 오후

COVER STORY

 

창단 60주년

인천시립교향악단

역사를 쌓고, 미래를 준비하며

개항 이후 항구 도시 인천의 급격한 발전과 더불어 인천시향도 파도를 따라 끝없는 성장을 이어왔다.
한 갑자를 돌아온 인천시향에게 지난 60년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 그려나갈 미래는어떤 모습일까?
지난 9월, 60주년 기념공연의 거사를 완수한 인천시향의 과거와 미래를 살펴본다

총괄 최성혁 기자 사진 박진호·인천시향

HISTORY
인천시립교향악단의 60년을 돌아보다

INTERVIEW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최수열
수석부지휘자 정한결
악장 정하나
단무장 김세연
인천시장 박찬대

 


 

HISTORY

인천시립교향악단의 60년을 돌아보다

개항 이후 발전의 물살을 탄 도시를 따라 함께 태동하고 성장해 간 관현악단의 역사

#1 휴전 직전 인천 거주 음악인들이 결성한 육군정훈관현악단(1953)

2026년, 인천시립교향악단은 창단 60주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따지면 이제 육십갑자를 채우고 회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창설 이후 지금까지 악단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에 적당한 때다. 그런데 인천시향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간략하게나마 인천이라는 도시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이 한국 근현대사와 서양 문화의 유입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6.25 전쟁 전후에 펼쳐졌던 음악 활동이 인천시향의 창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천은 매소홀, 미추홀, 인주라는 지명으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종종 역사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도시는 사실상 1883년 개항 이후 근대화를 거치며 급속하게 형성되었고 발전했다. 일제의 강요로 이루어진 불평등한 개항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인천은 서양 문화가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수도 서울의 외항이자 배후지로서 서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기회인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다. 서울과 너무 가깝다 보니 문화적인 종속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항 이후에 새롭게 형성되고 6.25 전쟁 이후 수도권 산업의 중심지로서 급속하게 발전한 임해공업도시라는 특성으로 인해 토박이보다 외지 출신 이주민이 많고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런 정체성은 문화예술에서 일정 부분 제약이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국제적인 시각과 지역 중심적인 시각을 통합적으로 엮어내는 ‘글로컬리즘’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인천시향의 60년은 갑작스러운 서구 문명과의 만남으로 도입되고, 급속하게 팽창하는 도시를 뒤쫓으며 성장했으며, 어느덧 국제적 문화 도시를 이끌게 된 한국 관현악단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 1966 » 1983 —

인천 음악의 토대에서 시립교향악단 창단

제물포항(1904)

우리나라의 서양음악은 개항 후 서양 여러 나라와의 접촉, 그리고 기독교 선교사들의 유입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천은 개항도시라는 지리·역사적 특성상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다.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여러 한국인 음악가가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인천악우회’라는 일종의 동호회가 결성되었고, 1938년에는 전문 음악가들의 모임인 ‘음악애호회’가 설립되었다.

인천의 음악 문화는 광복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말에 피아니스트 최성진의 주도로 인천 음악가들이 인천음악협회를 결성했고, 1947년 12월에는 스물세 명의 연주자가 모여 인천관현악단을 창설해서 6.25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활동했다. 서울의 고려교향악단(1945년 창설)에 이어 광복 이후 두 번째로 만들어진 관현악단이었다. 그 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인 1953년 6월에는 인천에서 활동하는 음악가 스물여섯 명이 모여 경인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1을 창설했다. 정훈관현악단이 해체된 후인 1957년 11월에 인천음악애호가협회 교향악단이 창단되었는데, ‘그리운 금강산’으로 알려진 작곡가 최영섭(1929~2026)이 지휘를 맡았다. 인천음악애호가협회 교향악단은 1960년에 해산했지만, 단원 대부분은 1964년 11월에 음악협회 경기도지부 산하의 인천필하모니 관현악단#2이 창단되면서(단장 홍훈표·지휘 김중석·악장 손관수) 흡수되었다. 그리고 인천필하모니 관현악단이 9회의 연주회와 5회의 임시 연주회를 가진 후에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1966년 6월 1일에 새롭게 창단된 단체가 바로 인천시립교향악단이다.

인천시향은 1966년 5월 설치 조례가 승인됐고, ‘제2회 인천시민의 날’이었던 1966년 6월 1일 인천시민관(현 인성여중고 다목적관)에서 창단 공연 #3을 가졌다. 악장은 손관수, 단원은 총 40명이었고, 서울·부산·대구에 이은 국내 네 번째 시립교향악단 #4이었다. 이미 인천필하모니라는 기반이 갖추어진 상황이었기에 조례 승인 후 신속한 창단이 가능했다. 악단 창설을 주도하고 초대와 제3대 상임지휘자를 맡았던 김중석(1940~2022)은 창단 당시 26세의 고등학교 음악 교사였으며, 청주대학교를 거쳐 단국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재임했다.

#2 인천필하모니 시절(1965)

#3 창단 공연(1966.6.1)

#4 제5회 정기연주회(1968.1.12)

 

 

 

 

 

“졸업 후 5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오케스트라 연주 활동을 했다. 지금의 신포동 주민센터 건너편 인천시 공보관을 빌려 주머니를 털어가며 열심히 연주 준비를 했다. 연습이 끝나면 신포주점에서 평론가가 되었다가 연주가도 되었다가 하면서 열변을 토하곤 했다. 인천에는 1950년 6.25 전쟁 때 창단한 육군정훈악대 덕분에 앙상블 경험이 있는 연주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는 돌아가며 했는데 누군가의 권유로 결국 (내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중략)…1965년 초에 인천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선배님들과 함께 신포동 인천시 공보관에서 창단하게 되었다. 그 후 윤갑노 시장 때인 1966년 6월 1일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창단했는데 바로 지금의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인 ‘제1시민관’에서였다. 그랜드피아노가 없어 인천여고에서 빌려다 무대 위에 올려놓았는데 온 단원이 동원되었다. 손이 까지고 피가 났다.”(김중석, ‘굿모닝 인천’ 2020년 3월호 발췌)

김중석은 창단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사실상 지휘를 도맡았다. 1970년대까지 인천시향의 레퍼토리는 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초기 작품 등 빈 고전파 음악과 초기 낭만주의 음악이 대부분이었고, 정기연주회는 1년에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였다.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같은 특정 작품을 되풀이해서 많이 연주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아마도 당시 악단 규모와 편성의 한계, 부족한 예산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김중석의 회고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창단 당시 인천시의 지원 예산이 15만 원이었고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 약 3백만 원이었으니 충분하지는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경제적 발전에 따른 청중의 문화적 욕구가 높아졌고, 교향악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며 강릉·울산·춘천·포항 등에 연달아 지방 교향악단이 창설되었다. 한편, 인천은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도시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했다. 독립적인 행정과 재정을 갖춘 직할시 승격은 인천시향에도 발전#5의 큰 계기가 되었다. 그보다 약간 앞선 1980년 4월, 인천시향은 76명의 단원이 모두 월급을 받는 상임 단원으로 임명되면서 김중석의 표현에 따르면 ‘본격적인 프로 오케스트라로 거듭났다.’ 1982년에 최용호가 부지휘자에 임명되고 박은성·원용성 등의 객원 지휘자들을 초청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악단은 특별음악회를 포함해서 연간 열 번이 넘는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1970년대보다 뚜렷하게 활발한 모습을 보였고, 차이콥스키 교향곡 5·6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 등 그 이전까지 연주하지 않았던 레퍼토리도 연주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 1천여 석 규모의 인천시민관, 올림포스 호텔, 인천여상, 동산고등학교, 가톨릭회관 등 이런저런 공간을 전전했던 인천시향은 1974년 주안에 1,350석의 인천시민회관#6이 개관하면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고, 1994년에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할 때까지 이곳을 근거로 활동하며 170여 회에 달하는 연주회를 했다. 오랫동안 인천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공연을 진행할 수 있는 문화 인프라의 핵심이자 인천 시민의 추억이 서린 장소인 인천시민회관은 노후화로 1997년 4월부터 사용이 전면 중단된 후 2000년 9월에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틈 문화창작지대와 도심 소공원이 들어서 있다.

#5 ‘인천직할시’ 시절의 프로그램북(1981)

#6 인천시향의 첫 보금자리, 인천시민회관

 

 

 

 

 

 

 

— 1984 » 1993 —

임원식 시대, 프로 악단의 틀을 세우다

1984년 김중석이 사임하면서 인천시향은 잠시 주춤했지만, 같은 해 11월 임원식(1919~2002)이 제2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임원식은 명실공히 국내 지휘자 1세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광복 후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고 KBS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또 일본과 대만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 독일에서도 객원 지휘를 하는 등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지휘자였다.

“시민들에게 단계적으로 교향악과 가까워질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 새로운 음악 인구 저변 확대에 힘쓰겠습니다. 아울러 이 같은 발전을 위해서는 단원들의 복지 향상과 관계 기관, 국내외 음악 단체의 초청 연주 등 교류에도 치중해 명실공히 우수한 지방 교향악단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입니다. 인천시향도 특성이 있는 지방 교향악단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임원식, 경인일보 1984년 11월 28일호 발췌)

임원식의 주도로 인천시향은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확충해서 80명이 넘는 단원에 3관 편성을 갖추는 등 규모가 커졌으며, 평균 연령 30대 초반의 젊은 악단이 되었다. 단원들의 처우도 개선되었다. 여전히 KBS교향악단이나 서울시향과는 격차가 있었지만, 1986년 전국의 12개 지방 교향악단 중 부산·인천·수원시향만이 대졸 초임 20만 원을 넘었고 부산·인천·대구시향만 3관 편성을 갖추었다. 매년 7~8회의 안정적인 정기연주회를 열었고, 서울에서도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오페라에도 참가했다. 그런가 하면 1987년에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로 이어지는 동남아 순회 연주, 1988년에는 미국 순회 연주,#7 1990년에는 국내 교향악단으로서는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등 동구권 순회 연주를 갖는 등 해외 무대에도 진출했다.

#7 미국 순회 연주(1988)

 

 

 

 

 

 

“처음에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요. 오케스트라는 단기간에 발전하기 힘들고, 예산의 뒷받침이라든가 오케스트라에 대한 인식, 시민의 관심도 전반적으로 부족했으니까요. 임원식 선생님이 부임하시면서 그분의 경륜과 명망이 악단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음악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시의 지원이나 시민의 관심을 얻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하셨어요. 회원제를 처음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고, 처음으로 해외 연주를 하면서 단원들도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신동환 전 인천시향 단무장)

그전까지는 주로 학생이 많았던 협연자의 수준도 높아져서 피아니스트 이경숙,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김남윤 등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이 등장#8했고, 첼리스트 필리프 뮐러(1946~), 홍콩 필하모닉과 홍콩 신포니에타 지휘자를 역임한 입윙시(1960~),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원장을 역임한 조르조 캄비사(1921~1998), 작곡가로도 유명한 바실 카잔지에프(1934~2026) 등 저명한 외국 음악가들#9도 인천시향 무대에 섰다.

#8 피아니스트 이경숙

#8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9 지휘자 조르조 캄비사

#9 지휘자 입윙시

#9 첼리스트 필리프 뮐러

 

 

 

 

 

 

악단 규모가 커지고 연주력이 좋아지면서 레퍼토리도 크게 확대되었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이나 프로코피예프·버르토크·코플런드·브리튼과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도 소개했다. 이런 성과는 음악계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 무렵부터 중앙언론에서도 인천시향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는데, 1986년 100회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부산시향·대구시향 등과 함께 지방악단 중 선두 그룹을 이루는 인천시향은 탈 지방, 중앙의 수준에 진입할 전환점에 와있다”라는 평을 받았으며, 음악학자 민경찬은 1988년에 인천시향의 연주를 듣고 “음악적 틀에 비해 내용이 있는 연주”라고 평했다. 인천 지역의 원로 음악인들도 임원식 부임 이후 인천시향의 연주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증언한다. 1988년에 김덕기(1953~)가 부지휘자에 임명되면서 베르디 오페라 ‘포스카리가의 비극’, 스트라빈스키 ‘불새’, 발레극 형식의 비제 ‘카르멘’ 등을 연주#10하며 프로그램이 다채로워졌다.

#10 공연포스터
베르디 ‘포스카리가의 비극’(1989), 비제 ‘카르멘’(1991)

 

 

 

 

 

 

 

 

1990년 12월 임원식은 상임지휘자 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초대 지휘자 김중석을 다시 상임지휘자로 선임하려는 시와 이에 반대하는 단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논란 끝에 1992년 1월에 김중석이 제3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지만, 단원들의 반발로 그해 교향악축제에 불참했고, 1993년 5월에는 협연자 선정 문제로 단원들이 연주회 보이콧 직전까지 가는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김중석은 1993년 12월에 물러났다. 사실 이는 관이 주도하는 시립교향악단이 1987년 이후 민주화, 자유화를 맞이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교향악단이 직면했던 고민이었고, 실제로 여러 단체가 이 시기를 전후해서 크고 작은 내홍을 겪었다.

— 1994 » 2004 —

‘지방 시대’를 맞은 악단의 도약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면서 이른바 지방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에 앞서 1995년 1월 인천직할시는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바뀌었고, 3월에는 강화군·옹진군과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6월 첫 전국동시지방선거를 거쳐 민선 자치단체장이 등장하면서 지방자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면서 행정은 물론 문화 분야에서도 ‘지역 특성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여전히 문화예술 관련 인프라와 인력은 서울 의존적이었지만, 이를 지역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보다 약간 앞선 1994년 4월에는 구월동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2017년에 인천문화예술회관으로 명칭 변경)이 개관했다. 1,524석의 대공연장(2009년 1차 리모델링 후 1,332석)과 524석의 소공연장(2017년 객석 교체 후 486석)을 갖춘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면서 드디어 인천도 3대 도시에 걸맞은 규모의 공연장을 갖추게 됐다.

#11 인천시향 30주년 기념만찬

#11 인천시향 30주년 기념만찬

1994년 인천문화예술회관 개관과 동시에 금노상(1953~)이 제4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다. 임원식이 국내 지휘자 1세대였다면 금노상은 이들에 이은 2세대 지휘자로, 1989년부터 광주시향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단원들은 금노상 지휘자와 함께 한 10년을 악단이 착실하게 발전한 시기로 기억한다. 규모가 4관 편성(114명)으로 확대되면서 좀 더 폭넓은 레퍼토리를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악단의 재정이나 단원들의 처우도 꾸준히 좋아졌다. 1996년 6월에는 창단 30주년#11을 맞아 금노상의 지휘로 당시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연주되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96년과 1998년에는 대만성 정부와 대만성립교향악단의 초청#12으로 5회 국제음악예술제와 7회 국제음악예술제에도 참가했다.

“인천시향과의 첫 만남은 1990년에 객원 지휘로 섰을 때였습니다. 서로 느낌이 좋았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 1994년 인천시향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이 되면서 최선을 다하는 연주는 물론, 사무처와 함께 단원들의 처우와 연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또 단원들의 친화에도 신경을 썼는데, 화합은 연주력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시는 교향악단에 관심을 두고 뒷받침했고, 우리도 그 기대에 부응하며 인천 시민에게 좋은 연주를 들려드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4관 편성으로 악단의 규모가 커지고 악기도 새로 구입하면서 대편성의 큰 작품도 연주할 수 있게 성장했지요. 창립 30주년 때 교향악단에 필요한 5현 더블베이스 8대와 특수 악기들의 구입을 요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절차를 무시하고 단무장과 시청에 쳐들어가 애타게 요구하였는데, 파격적인 예산이었는데도 인천시는 구입을 결정하더군요. 전국 시립교향악단의 부러움을 받는 동시에, 전국 시향이 악기를 교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전체가 5현 더블베이스를 쓰는 악단은 인천시향이 유일#13했거든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원들이 잘 관리하여 5현 더블베이스로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레퍼토리, 새로운 기획연주 등 단원들과 저는 시향 발전에 많이 노력했습니다. 2004년까지 인천시향과 10년 동안 긴 여정을 함께 했네요. 더 많은 발전을 기대합니다!”(금노상)

#12 대만성 정부 초청(1998)

#13 제234회 정기연주회(2001.12.14)

#14 교향악축제(1998)

 

 

 

 

 

 

 

금노상이 상임지휘자로 재직한 10년(1994~ 2004) 동안 인천시향의 활동도 뚜렷하게 확장되었다. 매년 8~9회의 정기연주회를 소화했고, 그밖에 청소년·주부·근로자 음악회와 청소년 교향악 강좌, 월요 세미나 등 다양한 특별 연주회와 초청 연주가 늘어나면서 그 이전까지 연간 20회가 넘는 일이 드물었던 총 연주회 숫자가 1990년대 말부터는 30회를 넘어섰다. 레퍼토리 역시 말러 교향곡 1번과 2번 외에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등 여러 방면으로 확장되었다. 1998년에는 교향악축제 개막 공연#14에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을 연주했는데, 언론은 ‘교향악축제 개막 무대에 값한 연주’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2002년 4월에는 227회 정기연주회 실황을 인터넷으로 중계해서 호평을 받는 등 디지털 플랫폼을 실현하는 진취적인 시도도 있었다. 또 2003년 9월에는 ‘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이 발족해서 몇 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특히 1997년 하반기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사태로 인천시향도 두 차례에 걸쳐 운영비가 삭감되었다. 이에 대응해서 악단은 예술의전당 정기연주회를 취소하는 등 대규모 공연장 연주회를 줄였고, ‘찾아가는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실내악단 형태로 나뉜 단원들이 시내 중고교와 소규모 문화시설, 군부대 등에서 진행하는 소규모 음악회를 추진했다. 가령 1999년에는 현악 4중주와 금관 앙상블로 이루어진 단원들이 영흥도까지 찾아가 섬 주민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1997년 이후 지금까지 금관, 목관, 현악 4중주 등 20여 회가 넘는 실내악 앙상블 연주회가 꾸준하고 활발하게 이어지며 인천시향의 또 다른 전통이 되었다.

— 2004 » 2017 —

정체성을 찾아서

21세기를 맞으면서 인천은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설립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경험했고, 인천시는 2003년 ‘문화예술중장기종합발전계획’을 발표하는 등 이에 걸맞은 문화 도시 육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2008년에 132회에 그쳤던 서양음악 공연이 2019년에 540건으로 급증하는 등 인천 시민의 문화예술 활동이 꾸준히 상승했고, 문화예술 관람률과 지출액도 꾸준히 상승했다.

2006년, 인천시향은 창단 40주년 #15을 맞았다. 하지만 악단은 2004년 3월에 금노상이 물러난 뒤 2년 넘게 후임자를 선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인천시가 국제예술제인 ‘인천&아츠’ 사업을 주최하면서 그 기획자인 정명훈을 인천시향 예술감독으로도 영입하려는 방안을 검토했기 때문이다. 정명훈이 2005년 서울시향을 맡으면서 이 구상은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한동안 객원지휘자 체제가 이어졌다. 같은 해 서울시향 부지휘자였던 번디트 웅그랑시(1970~)와 아릴 레머라이트(1961~)에게 객원지휘자로서 정기연주회를 나누어 맡긴 걸 보면 한동안 정명훈 영입을 단념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객원지휘자 체제에서는 일관적인 시즌 운영이나 장기적인 계획이 쉽지 않았고, 2005년 3월에는 지휘자를 구하지 못하여 정기연주회를 연기하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은 2006년 9월 첸 주오황#16(1947~)이 제5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막을 내렸다.

#15 창단 40주년 기념공연(2006.6.16)

#16 제273회 정기연주회(2006.11.24)

 

 

 

 

 

 

중국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 상하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첸 주오황은 중국 음악계에서 높은 위상을 지닌 지휘자였다. 2007년 교향악축제에서 인천시향은 시벨리우스 작품으로 꾸민 프로그램을 들려주었는데, 음악평론가 홍승찬은 ‘인천시향이 중국의 수준급 지휘자를 영입한 뒤 연주력 부문에서 가장 발군의 발전을 보였다’라고 평했다.

“제게는 첸 주오황 지휘자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처음으로 외국인 지휘자를 상임으로 맞으면서 뭔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느낌도 있었죠. 첸 주오황은 아주 꼼꼼하고 비트가 정확한 지휘자였고, 그때까지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레퍼토리도 많이 소개했습니다. 해외 연주도 많이 갔고, 우리와 정서가 다른 외국인이지만 예술감독으로서 인천시향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김미예 전 인천시향 제2바이올린 단원)

2008년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2009년 8월 재개관 전까지 악단은 1년 넘게 ‘찾아가는 연주회’ 형식으로 문화회관이나 학교, 교회 등에서 연주했는데, 시민에게 다가서는 기회였다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중국인 지휘자가 취임하면서 인천시향은 중국 음악계와 교류하는 일이 많아졌다. 2007년 제276회 정기연주회에서 중국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 악장 류 윈즈(바이올린)가 협연자로 나섰고, 2010년 4월에는 중국 베이징 국가대극원의 초청을 받아 연주했다. 외국 연주도 확대되었는데, 2006년 12월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초청연주에 이어 2009년 10월에는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 #17에 참가해서 도쿄와 오사카에서 연주했다. 또 2010년에는 라트비아의 리가 페스티벌 개막공연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페스티벌 폐막공연을 맡기도 했다. 2010년 6월, 인천시향은 제300회 정기연주회 #18를 돌파했다.

#17 아시아오케스트라위크(2009)

#18 제300회 정기연주회

 

 

 

 

 

 

 

그런데 2009년부터 지휘자와 단원들의 알력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지휘자의 한국 체류 기간이 짧은 이유로 단원들과 교류가 부족했고, 연습 기간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결국 첸 주오황은 2010년 9월 재계약을 하지 않고 4년 만에 물러났다.

인천시는 곧바로 금난새 #19를 제6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 해설 음악회 등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금난새는 ‘예술 CEO’를 자처하는 대중 친화적인 지휘자로, 시민을 향한 서비스를 강조했다. 그 결과 인천시향은 2011년부터 뚜렷하게 연주회 숫자와 관객이 늘어났고, 아파트 단지나 병원, 경찰청으로 찾아가는 연주회 등 다양한 특별 연주회를 소화했다. 다만 상대적으로 레퍼토리는 제한적인 편이었다. 금난새는 2014년 10월 인천시향과 재계약했지만, 두 달 만에 돌연 사임했다. 예술감독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인한 약간의 공백을 거쳐, 단원들의 투표 결과를 반영해서 2015년 8월 정치용(1957~)이 제7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정치용은 2017년 12월까지 인천시향을 이끌며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라는 취임 인터뷰처럼 정기연주회에 전념하며 다양한 작품을 들려주었는데, 특히 R.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 ‘죽음과 변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등 대규모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했다. 그런가 하면 2016년부터 주제별로 묶은 공연을 연속적으로 선보이는 시즌제를 도입한 점도 언급할 만하다. 인천시향은 2016년 6월, 제355회 정기연주회에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창단 연주회 프로그램)과 ‘영웅의 생애’를 연주하며 창단 50주년#20을 자축했다.

#19 제303회 정기연주회(2010.10.15)

#20 창단 50주년 기념공연

 

 

 

 

 

 

 

— 2018 » 2024 —

시련을 딛고 이룬 도약

정치용 사임 후 인천시향은 2018년 상반기를 객원 지휘자 체제로 꾸렸고, 10월 이병욱(1975~)을 제8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 그해 4월에 객원 지휘했던 제372회 정기연주회에 대한 좋은 평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 직하다. 금노상 이후 오랜만에 맞이한 40대 지휘자로, 3세대 지휘자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드러낸 상징적 임명이기도 했다. 그는 취임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인천시향을 처음 지휘했을 때 ‘젊고 역동적인 느낌을 받았다’라면서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오케스트라 운영도 민주적으로 변했고, 무엇보다 단원들과 함께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프로그램을 선곡할 때도 단원들과 의논하며 조화롭게 아우르면서 진행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밝혔다.

인천시향은 2019년을 시작하며 악단의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겠다는 뜻에서 ‘뉴 골든 에이지’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시작했고, 말러 교향곡 5번 연주로 성공적인 첫걸음을 뗐다. 하지만 2020년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인천시향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대면 공연이 중단되었고, 연주회는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에 대응해 악단은 유튜브 채널을 통한 온라인 콘서트 ‘문화 백신’으로 청중에게 다가갔고, 보다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런 시기에 2022년 3월 제400회 정기연주회#21를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으로 장식한 건 매우 상징적이었다.

다행히 2022년부터 공연장 환경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고, 2023년에는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정하나가 신임 악장이 되면서 2년 넘게 공석이었던 객원 악장 체제도 끝냈다. 그러면서 인천시향은 규모가 크고 평소 거의 연주하지 않던 대곡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2024년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7·8·9번을 비롯해서 말러 교향곡 1번과 4번이 대표적인 예다. 또 2023년부터는 알반 베르크·찰스 아이브스·아르보 패르트 등 20세기 음악도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병욱은 대규모 악곡에서는 앙상블을 이끌고 나가는 리더십을, 현대음악에서는 악곡에 대한 친화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취임 전에는 객원 지휘를 한 번 했을 뿐, 인천시향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단원들이 투표로 저를 뽑아주셨다는 말에 놀라고, 감사했죠. 재임하는 동안 시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단원들이 많이 들어왔고, 모두 함께 노력하면서 악단의 연주력이 쑥쑥 올라가는 게 느껴지더군요.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과 청중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와 악단도 자주 못 만나면서 더 사이가 좋아졌다고나 할까요?(웃음) 인천시향이 온라인 콘서트에 앞장섰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네요. 2021년 9월에 있었던 비대면 콘서트(제396회) #22가 기억납니다. 양인모와 문태국이 협연했던 브람스 2중 협주곡 연주가 정말 좋았는데, 들으면서 ‘아, 청중이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재임하는 동안 중요 레퍼토리에 집중하면서 인천시향의 연주력을 끌어올리고 고유의 색깔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작업이 4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이제 슈만이나 브루크너, 브람스 같은 레퍼토리에 뚜렷한 강점이 있는 악단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이병욱)

#21 제400회 정기연주회

#22 제396회 정기연주회(비대면 콘서트, 2021.9.10)

 

 

 

 

 

 

인천시향은 제8대 지휘자 이병욱 재임 시기에 창단 이래 계속 붙어 다녔던 ‘지방 악단’이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연주력, 프로그램 구성, 객원 지휘자 및 협연자 선정, 정기연주회와 특별연주회의 적절한 역할 분담 등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 축적된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한 차원 도약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병욱은 2024년을 끝으로 6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한편, 1994년 이후 인천시향의 주 공연장이었던 인천문화예술회관이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서 2022년부터 단계적 휴관에 들어가면서 인천시향은 아트센터인천으로 연주 장소를 옮겼다. 2018년 11월에 송도 신도시에 개관한 아트센터인천#23(콘서트홀 1,727석)은 뛰어난 음향을 갖춘, 국내에 몇 안 되는 클래식 음악 전용 연주장이다. 인천시향은 개관 연주회를 담당한 뒤 꾸준히 이곳에서 연주했고, 인천문화예술회관의 리모델링 공사가 끝난 후에는 두 공연장을 오가는 ‘이원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3 아트센터인천

 

 

 

 

 

 

— 2025 » —

60주년,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2025년, 부지휘자 정한결을 중심으로 시즌을 진행한 인천시향은 9월 최수열을 제9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 이미 2021년 이후 몇 차례의 객원 지휘로 악단과 청중에게 익숙한 지휘자였다. 정밀한 앙상블을 다듬는 능력이 뛰어나고 현대음악에 특별한 애정을 지닌 최수열은 취임에 즈음해서 인천시향은 ‘허점이 있는 파트가 하나도 없고, 신구 조화가 잘 이뤄진 악단’이라고 평하며 오케스트라와 작곡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시즌 프로그램을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최수열은 작년 9월 26일 취임 후 첫 연주회(제436회 정기연주회)에서 에드가 바레즈(1883~ 1965)의 ‘튜닝 업’(연주 직전의 악기 조율을 주제로 하는 작품)과 R.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10월에 있었던 두 번째 연주회(제437회 정기연주회)에서는 라벨 탄생 150주년을 조명하며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연주력과 개성에 어울리는 레퍼토리를 연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 인천시향이 진행 중인, 동시대 음악과 희귀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어드벤처러스 IPO(Adventurous IPO)’와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는 ‘인천시향의 말러’ 프로젝트는 최수열과 인천시향이 나아갈 길을 지탱할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창단 60주년을 맞은 2026년, 인천시향은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9월 5일 아트센터인천에서 열린 제446회 정기연주회에서 창단 이래 처음으로 말러 교향곡 8번 ‘천인’에 도전한 것이다. 1966년 40명의 단원으로 출발해 작은 시민관에서 첫 음을 울린 악단이 60년 뒤 거대한 말러의 우주를 펼쳐 보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인천시향이 걸어온 시간의 크기를 보여준다. 이제 다음 질문은 지난 60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느냐가 아니라, 그 성장을 바탕으로 어떤 ‘인천시향만의 소리’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있다.

글 이준형(음악평론가) 사진자료 인천시향

 


 

1923 » 1950
동호회 형태로 최초 결성된 인천악우회는 음악애호회, 인천음악협회를 거쳐 1947년 23인조 인천관현악단으로 발전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활동했다.

1953 » 1964
휴전 직전 26인조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창단됐고, 해체 이후 최영섭이 지휘하는 인천애호가협회가 등장했으며, 1964년 인천시향의 모체인 인천필하모니가 창설한다.

1966
6월 1일 인천필하모니는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정식 창단한다. 초대 상임지휘자는 김중석이 맡았으며, 1984년까지 재임했다.

1974
인천시민회관이 개관하며 인천문화예술회관 개관 전까지 20년간 인천시향의 주요 공연장으로 자리 잡았다.

1980 » 1981
단원 76명 전원이 상임단원으로 임명되며 본격적인 프로 오케스트라로 전환됐으며, 1981년 인천의 직할시 승격으로 행정·재정적 기반이 확대됐다.

1984 » 1990
제2대 상임지휘자 임원식의 취임 이후 인천시향의 규모가 늘어나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 순회 연주도 진행한다. 이 시기에 레퍼토리가 대폭 확장되고, 협연자 및 객원지휘자의 수준도 크게 상승했다.

1994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며 인천시향의 상주공연장으로 자리잡았다. 같은 해에 제3대 상임지휘자로 금노상이 부임했다.

1996
창단 30주년, 금노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규모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무대에 올리며 화제를 모았다. 이 시기 금노상은 악단의 규모를 확장함은 물론, 악단에 특수악기는 물론 당시 국내 악단 최초로 8대의 5현 더블베이스를 마련했다.

1997 » 2000
IMF사태로 운영비가 삭감되는 어려움을 맞이했으나, 대규모 공연을 줄이는 대신 지역 내 여러 시설을 소규모로 방문하는 ‘찾아가는 연주회’를 추진했다. 그 가운데서도 1998년에서 연주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은 찬사를 받았다.

2006 » 2010
2006년 인천시향은 40주년을 맞이했으나, 상임지휘자는 공석이었다. 그해 말, 제5대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첸 주오황은 첫 외국인 지휘자였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중국 음악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2010 » 2014
제6대 상임지휘자로 금난새가 취임했다. 그는 재임 기간동안 레퍼토리의 규모를 키우기보다는 시민 친화적인 공연을 진행했다.

2015 » 2017
제7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정치용은 이전 지휘자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며, R. 슈트라우스와 브루크너같은 작곡가의 대규모 작품을 위주로 선보였다. 재임 기간 사이인 2016년에는 창단50주년 기념공연을 장식했다.

2018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의 신설로 인천시향의 상주 공연장이 이원화됐으며, 같은해 이병욱이 제8대 상임지휘자로 부임했다.

2020 » 2022
코로나19의 강타로 한동안 대면 공연이 중지됐으나, 인천시향은 비대면 온라인 송출 공연에 앞장섰다. 팬데믹 상황이 나아진 2022년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으로 제400회 정기연주회를 장식했다.

2026
창단 60주년을 맞이한 인천시향은 제9대 상임지휘자 최수열의 지휘로 역대 최대 규모의 공연인 말러 교향곡 8번 ‘천인’을 선보이며 60주년을 기념했다.

 

인천시립교향악단 역대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연도는 재임기간)

1대 김중석 1966.06 —1984.03
2대 임원식 1984.11 —1990.12
3대 김중석 1992.01 —1993.11
4대 금노상 1994.02 —2004.02
5대 첸 주오황 2006.09 —2010.09
6대 금난새 2010.10 —2014.12
7대 정치용 2015.08 —2017.12
8대 이병욱 2018.10 —2024.12
9대 최수열 2025.09 —현재

김중석

임원식

김중석

금노상

 

 

 

 

첸 주오황

금난새

정치용

이병욱

최수열

 

 

 

 

 


 

 

INTERVIEW

인천시향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최수열

‘인천’만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여정

악단의 60년 역사에 새로운 색을 더하는 일은, 먼저 서로의 소리를 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지난해 9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최수열은 지난 1년 동안 단원들과 호흡을 맞추며 ‘인천시향다운 소리’를 찾아왔다. 부산시향에서 6년간 첫 예술감독의 시간을 보낸 그에게 인천은 두 번째 도전이자, 한층 축적된 경험으로 마주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말러에게서 찾아낸 인천시향의 관록

인천시향의 내부적인 분위기는 어떤가요? 연주 단원들과 사무국의 전반적인 상호 협력은 잘 이뤄지는 편인가요?

이병욱 전임 예술감독이 인천시향을 단단하게 다져놓은 덕에 취임 초반부터 많은 부분이 수월했어요. 그에 대한 감사함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악단은 물론 사무국 모두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이었기에, 저는 음악에 집중하고 이 오케스트라에 어떤 개성과 색채를 입혀나갈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었죠.

 

인천시향만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느꼈나요?

취임 전에 인천에서 오래 거주한 지인을 만나서 인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것이 인천의 정체성’이라는 다소 아리송한 답이 돌아오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항구 도시라는 특성상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문물들이 오가며 다양한 문화 요소들이 ‘한데 섞이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도시가 가지는 특성과 시립교향악단의 분위기는 서로 깊게 연결돼있기에, 인천시향의 정체성도 그 키워드 찾아낼 수 있었죠.

 

연주에는 그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녹여낼 수 있었나요?

그때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작곡가가 바로 말러였습니다.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인데, 그런 특성이 인천의 정체성과 상통하더군요. 마침 저도 직전에 있었던 부산시향에서는 라벨과 R.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보니 이제 새로운 작곡가를 탐구할 시점이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말러는 국내에서 팬층이 두텁기도 했고요.

 

현재 인천시향 정기연주회의 큰 축을 이루는 ‘말러 사이클’이 그렇게 시작됐군요.

마침 2026년은 인천시향이 창단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는데, 말러 사이클을 기획한다면 60주년 기념 공연으로 교향곡 8번 ‘천인’을 시도해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오르간·피아노·첼레스타·만돌린 등의 특수 악기가 포함된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별도의 금관악대, 8명의 솔리스트, 다인원의 합창단과 어린이합창단까지 가세하는 막대한 규모의 작품이라 평시에는 엄두를 내기도 힘들거든요.

 

사이클을 교향곡 9번부터 역순으로 진행한 의도는 무엇이었나요?

나중에 보니 인천시향이 그간 말러 교향곡 가운데 5번 이후부터의 작품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더라고요. 오히려 다뤄보지 못한 작품으로 사이클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곡을 익히며 단원들의 역량을 한 차례 끌어올릴 수도 있고, 60주년 중에 ‘천인’을 자연스럽게 포함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창단 60주년 기념공연 리허설

 

 

다시 말러로! 창단 60주년 기념공연의 의미

‘천인’을 준비하며 지휘자로서 이 작품의 핵심을 어디에서 발견했나요?

저는 ‘천인’이 말러 본인에게 헌사하는 자서전과도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령 찬미가인 1부에서 언급되는 ‘창조주 성령’에서 ‘창조’라는 맥락은 창작자인 말러와 맞닿아있고, 2부는 말러가 가장 존경했던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가 차용되는데, 정작 파우스트는 등장하지 않고 여러 인물들이 그의 구원을 간청하죠. 그렇다면 파우스트는 곧 말러 본인이 아닐까 하는 저만의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R. 슈트라우스가 교향시 ‘영웅의 생애’로 솔직한 자서전을 빚었다면, 자신의 존재를 천국까지 연결 지은 말러의 자아는 상당히 거대했던 것 같네요.(웃음)

 

‘천인’에서 오르간은 작품의 장대한 음향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트센터인천의 공간과 음향 조건 안에서 오르간의 존재감을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나요?

파이프 오르간은 부재했으나, 오르가니스트가 스피커에 연결된 콘솔 오르간으로 낼 수 있는 최대치를 표현해줬습니다. 아, 관람하신 분들 중 첫 두 마디를 길게 늘인 이유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오르간을 더 강조할 목적과, 앞서 얘기한 저만의 해석이 합쳐진 결과였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네요.

 

원래는 작품의 2부에서 음악뿐 아니라 ‘극적인 연출’까지 구상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천인’의 악보를 보면 연주와는 별도로 정말 많은 행동적 지시들이 나타나있어요. 물론 그 내용을 다 살리려는 것은 아니었고, 영광의 성모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만큼은 조명을 이용해서 그 존재를 길게 비추고 싶었습니다. 2부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인물이거든요. 물론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겹치며 결국 구현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 잔재를 음악 속에 남겼는데, 그 부분에서 잠시 음악의 진행을 멈추고 하모늄(오르간의 일종)의 저음을 먼저 길게 깔았습니다. 시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아도 음악 속에서 그 존재에 대해 잠깐 생각할 여지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라틴어·독일어로 불리는 노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인데도 가사를 별도로 제시하지 않고 음악 자체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나요?

처음부터 가사 없이 진행할 생각은 것은 아니었는데, 환경에 제약이 있었어요. 합창석부터 양측 날개 좌석까지 모두 연주자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스크린을 설치할 공간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기본적인 이유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천인’은 내용이 아닌 ‘소리’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었습니다. 노래의 비중이 전체의 절반을 넘지만 사실 이 곡은 시작과 끝이 관현악으로 채워지는 ‘교향곡’이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온전한 음악으로의 ‘천인’을 보여드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창단 60주년 기념공연 말러 교향곡 8번 ‘천인’(2026.9.5/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인천시향에 또 하나의 색채를 부여하며

흡사 ‘거사’와도 같았던 60주년 기념공연을 마친 이 시점에서, 지난 1년간 보낸 인천시향과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어떤 심경이 드나요?

앞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인천시향에서는 음악적인 면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단원들은 제 리드를 잘 따라와 줬고, 단원들끼리의 결속력도 단단했던 터라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충분히 소리를 모을 수 있었어요. 특히 7회에 달하는 리허설을 거칠 정도로 많은 준비가 필요했던 60주년 기념공연도 무사히 종료된 지금은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에 무엇을 이뤄낼 수 있었나요?

아직은 어떤 성과를 이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단계지만, 우선 이 악단을 이끌기 위한 두 개의 핵심축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결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천시향은 현재 말러 사이클 외에도 난도 높은 대규모 작품과 동시대 작품을 함께 조명하는 ‘어드벤처러스 IPO’ 시리즈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취임연주회였던 제436회 정기연주회(2025.9.26)도 ‘어드벤처러스 IPO’ 시리즈였습니다. 인천시향과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를 이 시리즈로 꾸민 이유도 궁금한데요.

말러 외에도 인천시향에게 입힐 수 있는 색채가 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는데, 그 과정에서 떠올린 것이 현대음악이었습니 다. 해외의 악단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동시대 작품을 세우는 중이고, 저 또한 현재의 오케스트라들이 수행해야만 하는 과제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죠. 만약 이러한 환경에서 인천시향이 현대음악 장르에서도 앞장서 나간다면, 이 또한 인천시향만의 독특한 개성이 되지 않을까요? 이러한 이유를 담아 나름의 상징성을 부여한 무대였습니다.

 

올해 3월 두 번째로 이어진 시리즈에서는 윤이상 ‘예악’을 조명했습니다. 인천시향에서 곧 이 작품을 정식으로 녹음할 예정이라고요.

‘예악’은 전세계에 윤이상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며, 개인적으로도 애정을 가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작곡가가 쓴 곡임에도 지금까지 국내 악단에서 남긴 음원이 없었어요. 항상 그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죠. 그런데 인천시향과 이 곡을 준비하던 시기에 문득 악보 첫머리의 상단을 보니, 이 작품이 탄생한 해가 바로 1966년, 인천시향이 창단한 해더라고요. 아, 이건 운명이다!(웃음) 그렇게 인천시향 창단 60주년 기념의 의미와 함께, 인터넷에서 ‘예악’을 검색하면 인천시향의 음원이 나올 수 있도록 녹음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녹음 당일에는 진행의 일부를 관객들에게 공개하는 ‘기록음악회(REC: PLAY)’(10.8)도 예정돼 있습니다.

 

인천시향을 찾는 관객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어떤가요?

취임 이래 올렸던 정기연주회는 거의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인천시민은 물론, 타 지역에서도 많은 관객들이 인천시향을 찾아주고 있어요. 저는 악단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관객의 존재가 필수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꾸준한 관심과 성원은 정말 소중합니다. 인천시향만의 정체성을 점차 찾아내고 있다는 방증이라 느끼기도 하고요.

 

두 개의 상주공연장을 가진 인천시향의 무기

인천시향의 상주공연장은 아트센터인천과 인천문화예술회관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악단으로서는 큰 자산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중 아트센터인천(이하 아트센터)은 클래식 음악 전용 공연장이며 음향도 뛰어나기 때문에, 정기연주회는 거의 아트센터에서 세웁니다. 인천 내 여러 예술단이 상주하는 인천문화예술회관(이하 예술회관)은 다목적홀인 만큼 교향악단 입장에서 무게 있는 작품을 올리기는 쉽지 않죠. 물론 예술회관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회관 소공연장이 음향도 좋고 분위기도 아늑해요. 내년부터는 ‘늦은저녁음악회’를 그곳에서 진행할 예정이며, 대공연장에서도 새해·송년음악회, 마티네 공연인 ‘조조클래식’ 시리즈를 올립니다. 구도심에 있어 오전 공연의 수요가 더 높기도 하고요. 이렇게 두 공연장의 성격에 따라 알맞은 형태의 무대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인천시향은 정기연주회 외에도 여러 기획공연을 진행하고 있는데, 앞으로 기획공연에 있어서 더 추가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나요?

오히려 지금은 기획공연들 가운데 일부만 남기고 덜어내는 단계입니다. 현재 인천에는 인천시향 산하 인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과 다양한 민간오케스트라가 존재하는데, 원래 인천시향이 출연하던 기획공연들 가운데 행사의 의미가 강한 경우는 그 악단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어요. 그들에게 더 많은 무대를 제공하고, 인천시향은 더 중심적인 공연에 집중하는 것이 지역 전반에 올바른 생태를 조성하는 방향이겠죠. 다만, 한번 언급하고 싶은 기획공연이 있다면 ‘과정음악회’입니다. 서울시향 부지휘자 재임 당시 리허설 현장을 공개하는 ‘리허설룸 콘서트’를 기획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그래서 부산시향에서는 ‘미완성음악회’라는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과정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맥락의 공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천시향을 이끌어나갈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사실 머릿속으로는 인천시향 임기 동안의 모든 계획을 이미 다 마친 상태입니다.(웃음) 평소에도 그냥 문득문득 여러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하는데, 그런 구상들을 모으다보면 저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제가 지휘하는 악단에 그런 아이디어를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즐거운 일이에요. 인천시향도 언제나 저를 잘 따라와 주고 있기에 이곳에서의 앞날이 더 기대됩니다. 이제 회갑을 맞이한 인천시향이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걸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 최성혁 기자 사진 박진호

 

최수열(1979~)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드레스덴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연습지휘자 참여 후 서울시향 부지휘자를 거치며 부산시향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인천시향 예술감독 및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천시향 수석부지휘자 정한결

지나온 60년에서, 다가올 60년으로

©박진호

인천시향이 60주년을 맞는 순간을 악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뜻깊습니다. 2022년 부지휘자로 입단해 현재 수석부지휘자에 이르기까지, 저 역시 여러 무대를 거쳐왔으니까요. 60년이라는 숫자에는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음악가와 오랫동안 인천시향을 지켜봐 준 시민들의 성원까지 스며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인천시향과 약 60회의 연주를 지휘하며 체감한 악단의 힘은 단연 ‘탄탄하면서 유연한 오케스트라’입니다. 어떤 새로운 작품이나 협연자·지휘자를 만나더라도, 원하는 음악적 요구를 빠르게 읽고 단원들의 언어로 바꾸는 힘이 있지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구성원 사이의 신뢰이기도 합니다. 연주자와 지휘자, 기획과 운영을 맡은 구성원들까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편하게 의견을 나눕니다. 음악적인 문제나, 악단의 일을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는 분위기가 잡혀 있지요. ‘좋은 음악을 만들자’는 하나의 이정표를 향해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결속력이 악단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올해 인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며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깊이 사유하게 됩니다. 60년 역사의 악단과 막 첫발을 내디딘 악단 사이에 서 보니, 세대를 건너 전해야 할 유산은 비단 연주 기술이나 음악적 지식에 그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듭니다. 타인의 소리를 듣는 법, 하나의 음악을 위해 기다리고 양보하는 법, 서로 협력하는 태도 역시 함께 이어져야 할 가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60주년은 지나온 시간을 기념하는 자리인 동시에 다음 시간을 시작하는 지점 아닐까요?

이제는 다음 60년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동료들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면 이 질문을 건네고 싶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천시향의 다음 60년은 어떤 모습일까요?’ 지난 60년의 세월이 수많은 이들의 시간으로 빚어졌듯, 앞으로 펼쳐질 60년 또한 현재 음악을 만드는 우리의 시간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정리 유내리 기자

 

정한결(1991~) 서울대학교와 만하임 국립음대를 졸업했고, 독일 국제 지휘자콩쿠르 3위에 입상했다. 쾰른 WDR 심포니·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서울시향 등 유수의 국내외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현재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수석부지휘자와 인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인천시향 악장 정하나

오래 쌓아온 음악적 자산 위에서

©박진호

악장으로 부임한지도 벌써 3년이 지났네요.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연주회에 섰지만,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섰던 정기연주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연주했던 작품이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였거든요. 드보르자크는 미국에서 낯선 음악과 문화를 만났지만, 한편으로는 고향인 보헤미아를 그리워했던 인물이었죠. 당시의 저 역시 새로운 악단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익숙했던 곳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감정이 한데 겹쳤던 ‘신세계로부터’는 지금까지도 특별한 감흥으로 남아 있습니다.

악장 부임 당시에는 이병욱 예술감독님이 계셨고, 지금은 최수열 예술감독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 두 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인천시향의 음악이 한 단계 더 성장할 발판을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병욱 감독님이 진행했던 ‘콘체르토 마라톤 프로젝트’는 물론, 최수열 감독님과 지난 12월부터 함께 도전하고 있는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 프로젝트, 그리고 올해 말부터 예정된 브람스 교향곡·협주곡 전곡 프로젝트까지요. 이런 규모 있는 프로젝트는 오케스트라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그만큼 인천시향의 음악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천시향이 그동안 쌓아온 음악적 자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올해 인천시향은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60년이라는 시간은 인천시향의 입장에서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자산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악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음악적인 경험들, 서로 호흡하며 앙상블을 만들어가는 감각은 모두 긴 시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었겠죠. 이렇게 탄탄하게 쌓인 전통 위에서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또 다른 색깔을 만들어 가는 악단이 바로 인천시향입니다. 이 악단의 악장으로서 목표하는 바가 있다면, 앞으로 인천시향만의 분명한 색깔과 에너지를 가지고, 함께 만드는 음악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오케스트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정리 장지현 기자

 

정하나(1981~) 미국 월넛힐 예술고등학교·뉴잉글랜드 음악원, 베를린 국립음대(한스아이슬러)를 거쳐 뮌헨 국립음대 디플롬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광주시향·경기필 악장을 역임한 후 현재 인천시향 악장으로 재직 중이다.

 


 

인천시향 단무장 김세연

불모지에서 음악의 도시로 거듭나다

2002년 입단한 이래 인천시향의 40주년과 50주년을 넘어 60주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연이 무대에 오르는 동안 저는 늘 인천시향과 함께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이곳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악단이 맞이한 가장 큰 전환점은 2018년 아트센터인천의 개관이었습니다.

입단했을 당시 인천시향이 상주하던 인천문화예술회관은 다목적 홀의 특성상 음향적인 한계가 있어, 단원들이 최선의 연주를 펼치더라도 그 음악적 메시지와 감동이 객석까지 온전히 전달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트센터인천이 문을 연 뒤로는 훌륭한 음향 환경을 바탕으로 인천시향의 연주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도 점차 늘었습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중 인천시향을 직접 찾아오는 분들도 많아졌고요. 이러한 변화 덕에 인천이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고 명실상부한 클래식 음악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 발판을 딛고, 인천시향이 올해 60주년을 성공적으로 기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단무장으로서 60주년 기념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행정적인 모든 과정을 책임졌지만, 40·50주년을 맞이했던 당시에는 악보 담당으로서 공연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떠올리면 감회가 남다릅니다. 인천시향이 이렇게 전진해가는 과정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공헌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단원들과 예술감독의 노력이 따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끄러운 공연이 진행되도록 불철주야 힘쓰는 사무국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결국 무대가 빛나기 위해서는 그 무대를 받치는 단단한 토대가 마련되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사무국이 얼마나 그 토대를 잘 빚는지가 공연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 아닐까요? 단무장의 입장에서 사무국을 바라볼 때마다 공연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는 실무자들의 헌신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인천시향은 지금의 예술감독님과 함께 혁신적인 대작과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중입니다. 악단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탄탄한 운영 기반과 효율적인 재정 운용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사무국은 항상 인천시향이 최상의 무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앞으로 레퍼토리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공연의 완성도를 지속적으로 높이며 인천시민들은 물론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인천시향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리 최성혁 기자

 

김세연(1972~) 경희대 음대에서 튜바를 전공하고 인천시향에서 22년간 악보담당을 역임했다. 현재 인천시향 및 인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 단무장으로 재직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정한결/인천시향(협연 이유빈)
10월 2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 버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최수열/인천시향 ‘기록음악회(REC: PLAY)’
10월 8일 오후 8시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윤이상 ‘예악’

최수열/인천시향(협연 안종도(23일)
10월 22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과정음악회)
10월 23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교향곡 3번(23일)

정한결/인천시향(협연 유성권)
11월 12일 오전 11시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베버 바순 협주곡 F장조,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크리스토프 포펜/인천시향(협연 김태형)
11월 20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베토벤 교향곡 2번

정한결/인천시향(내레이터 김성현)
12월 4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다목적홀
스트라빈스키 ‘병사 이야기’

최수열/인천시향
12월 18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과정음악회)
12월 19일 오후 5시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말러 교향곡 7번 ‘밤의 노래’

금노상/인천시향 송년음악회
12월 26일 오후 7시 30분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인천시장 박찬대

사람과 문화예술이 가장 가까운 도시를 바라며

한 도시의 교향악단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은 음악의 성취를 넘어 시민의 삶 속에 예술이 뿌리내린 시간을 뜻한다. 박찬대 인천시장은 인천시향을 도시의 품격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시민에게 일상의 쉼을 건네는 공공예술의 기반으로 바라본다. 첨단 산업이 도시의 체격을 키운다면 문화는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말처럼, 그에게 예술은 삶의 질과 도시의 미래를 함께 만드는 힘이다.

 

인천시향이 올해 창단 60주년을 맞았습니다. 인천시향의 지난 60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처음 인천시향이 만들어지던 무렵, 인천은 지금보다 훨씬 작은 도시였고 살림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기에도 시민에게는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여유가 필요했고, 음악이 그 자리를 채워 주었을 겁니다. 저는 그러한 공감이 60년을 지탱해 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흘러온 세월만큼이나 446회의 정기연주회, 4천 회 이상의 기획 연주회가 수많은 경험으로 쌓였습니다. 이 숫자는 인천 시민이 일상 속에서 수준 높은 연주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얻어 왔으며, 60년 동안 그 기회가 지속됐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뜻을 담아, 인천시향의 60년을 ‘좋은 연주를 듣기 위해 다른 도시로 가지 않아도 되는 도시를 만든 시간이었다.’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시립예술단체 가운데 인천시향의 역할과 가치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여섯 개의 시립예술단 중 교향악단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고, 규모도 가장 큽니다. 지난 60주년 기념 무대에서는 시립합창단까지 한데 어우러져 참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사했습니다. 이처럼 인천시향은 인천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예술단이자, 우리 지역의 문화예술을 꽃피우게 하는 소중한 뿌리이며, 인천의 품격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상징입니다. 지금까지 시민 곁에서 든든한 쉼터가 되어준 인천시향이, 앞으로도 그 역할을 더 멋지게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시립예술단체는 시와 원활하게 협력을 이어 나가면서도 예술적 독립성이 보장돼야 하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시와 예술단체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시는 시민들에게 온전한 문화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살필 책임이 있고, 예술단체는 양질의 무대를 제공해야 합니다. 예술적 자율성이 보장되어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고 시민들께 감동을 드릴 때, 예술에 투입되는 예산도 비로소 시민의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행정의 책임과 예술의 독립성은 서로를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무대가 언제나 인천 시민들에게 일상의 쉼표가 되는 따뜻한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인천시도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민선 9기의 인천시는 AI·바이오·문화·에너지를 아우르는 ‘ABC+E’를 주요 성장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문화’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첨단 기술과 산업이 도시의 체격을 키운다면, 문화는 도시에 영혼을 불어넣고 삶의 질을 결정짓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엔진입니다. 현재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인천의 원도심을 거대한 문화의 무대로 탈바꿈시키는 ‘제문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물포는 개항의 역사와 바다를, 문학은 공연과 K-콘텐츠를, 부평은 생활문화와 공원을 중심으로 가꿔나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문화를 육성하는 가운데, 기초 순수예술은 전방향의 문화 산업을 흔들림 없이 꽃피게 하는 뿌리와도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립예술단체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수준 높은 순수예술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환경의 시작점이자 예술의 공공성을 떠받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임기 중 인천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반드시 이뤄져야 할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장 바라는 변화는 시민의 삶과 문화예술 사이의 문턱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2028년 개관 예정인 ‘인천뮤지엄파크’가 그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인천 최초로 시립미술관·박물관·예술공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 공간이 단지 작품을 전시하는 엄숙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산책하듯 들러 예술을 곁에 두고 쉬어가는 ‘문턱 없는 일상 속 휴식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문화가 시민의 일상으로 먼저 찾아가는 노력도 병행돼야 합니다. 저는 누구나 일상 속에서 예술을 곁에 두고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시민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곳이 작은 무대와 갤러리가 될 수 있도록 인천시가 앞장서서 그 길을 넓혀가겠습니다. 훗날 시민들께서 이 시기를 회고한다면, 신축 문화시설의 웅장함이 아니라 ‘문화예술이 내 하루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가?’ 하는 친밀감의 깊이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글 최성혁 기자 사진 인천시청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