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이화의 소리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7월 3일 6: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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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1925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100+1주년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이화의 소리로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왼쪽부터 장혜윤, 박소현, 곽은아, 김미솔, 임한나, 장혜원, 임명진, 배종선, 함영림, 조사방
©황필주

 

 

 

 

 

 

 

 

 

 

 

 

1886년 한 명의 여학생으로 시작된 이화의 교육은, 1925년 음악과 신설과 탄생을 지나 한국 음악교육의 가장 깊은 뿌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수많은 스승과 제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화의 이름을 다시 썼다. 2025년 창립 100주년을 지나 2026년 새로운 100년의 문턱에 선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이번 특집은 한 대학의 연대기를 넘어, 여성 음악가들이 배움과 예술을 통해 어떻게 한국 음악사의 길을 열어왔는지를 따라가는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총괄 유내리 기자 사진 황필주

 


 

HISTORY

이화여대 음대의 발자취

이화의 이름으로 키운 인재들과 한국 음악계의 성장

한국 서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화에서 실시한 음악교육은 한국 내 서양음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던 시기, 서양음악은 여러 통로로 이 땅에 들어왔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화학당이라는 학교가 세워지며 이화에서 여성 선교사들의 교육 일환으로 서양음악을 교과목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이화학당을 통해 체계적인 음악교육이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올해는 이화여대 음악대학 탄생 101주년이다. 1886년에 시작된 이화학당이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되며 음악과가 시작된 지 벌써 한 세기가 지났고, 또다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이화여대 음악대학의 역사를 조망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100년이 넘게 활약하는 이화의 음악을 이화여전 시기부터 거슬러 본다면 이화 음악의 큰 그림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이화학당 설립 이후 140년간 이어진 음악교육의 긴 역사를 되짚어본다.

 

 

1886~1910 이화학당

찬송가에서 시작된 서양음악 교육의 씨앗

사진① 메리 F. 스크랜튼

1885년 헨리 아펜젤러(1858~1902)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를 시작으로, 북감리교 해외 여선교회에서 임명된 여성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튼(1832~1909)사진①이 1886년 내한하였다. 그녀는 곧바로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1886년 5월 31일 첫 수업을 시작했으며, 고종은 이 학교에 ‘이화(梨花)’라는 교명을 하사하였다. 당시의 수업은 주로 영어와 찬송가를 배우는 것이었다.사진②

사진② 이화학당 학생들의 수업광경

1890년 내한한 마가렛 벵겔(1869~1962)이 1891년부터 이화학당 최초의 음악 담당 선교사로 부임하여 오르간과 성악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음악수업을 맡았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지역 선교사로 파송되는데, 스크랜튼처럼 인천의 어린 소녀들을 위한 영화여학교를 설립해 교육하였으며, 영화여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상급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이화학당으로 연결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벵겔의 남편 조지 하버 존스(1867~1919) 목사 역시 이화학당장이었던 로드와일러(1853~1921)와 최초의 한글 찬송가 ‘찬미가’를 간행하며, 서양음악을 처음 배우는 조선의 아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로 이화에서는 샤프, 헐버트, 피어스, 벙커, 버시, 브랜드 선생이 음악수업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피어스 선생은 합창교육을 시작하여 이화 글리클럽의 초석을 다졌다. 이화학당의 합창은 채플과 주일예배, 메이데이 행사, 졸업식 등 학교의 다양한 행사마다 울려 퍼졌다. 초창기 찬송가를 위주로 했던 음악교육은 1904년 정부인가를 받아 4년제 중등과가 설치되며 교과과정으로 음악수업이 이루어졌고, 1909년 음악이 정식과목으로 채택되면서 개인 교습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학생들은 음악 교사에게 오르간과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이화는 학교 설립 초창기부터 여학생들에게 꾸준히 서양식 음악교육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여학생들의 음악 수준이 예배를 위해 찬송가를 부르는 정도였지만, 점차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고 합창곡을 노래할 수 있는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서양음악 자체가 낯설던 당시 사회에서도 이화학당 학생들의 음악 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신문명과 계몽의 소리로 각인되었다.

 

 

1910~1925 이화학당 대학과

전문 음악교육의 토대를 닦다

사진③ 대학과를 설립한 제4대 룰루 E. 프라이 당장

 

1910년 이화학당장 룰루 E. 프라이(1868~ 1921)사진③의 노력으로 이화학당에 대학과(大學科)가 설치되었다. 대학과 설치는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화는 여성 인재를 교육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포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에 이화학당은 보통과·고등과·중학과·대학과로 제도가 개편되었으며, 대학과에서는 지금의 대학 과정처럼 전공을 두지는 않았으나 영어와 음악, 두 과목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대학과의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성경과 언어, 음악 교과 시간의 비중이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과의 음악교육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오르간과 피아노가 설치된 이화학당에서는 찬송가 부르기에 집중했던 과거의 음악수업과는 달리 오르간과 피아노·성악 개인 레슨·합창·음악이론·음악사·작곡법·시창 및 청음·음악감상법 등 전문적인 음악교육이 실시되었다. 이화학당 출신으로 모교 음악 교사를 했던 이은라(1889~1929)가 1915년 잡지 ‘공도(公道)’에 여성의 교육에 음악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베토벤 음악에 대해 언급했던 것도 위와 같은 음악교육의 결과이다.

대학과 학생들은 악기를 필수로 배웠다. 선교사들이 이들에게 건반악기를 가르쳤던 것은 장차 음악교사나 교회 및 주일학교에서의 활동을 위한 역량을 쌓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선생의 부족으로 인해 학생이 교사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치는 역할도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학습 능력이 탁월한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이 배워오길 바라며 해외로 유학을 보냈다. 그들은 이렇게 성장한 학생들이 다시 이화의 선생이 되어 학교를 이끌어 주길 바랐던 것이다. 학생들은 주로 이화와 같은 감리교계 학교를 선택하였으며, 학생들 역시 타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이화로 돌아와 모교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바다를 건넜다. 이 시기 음악을 공부하러 유학을 떠났다가 모교에 부임한 졸업생은 이은라와 김애식(1898~1950)이 대표적이다.

1914년 대학과 첫 졸업생 3명이 배출되었다.사진④ 이중 김애식은 인천 영화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 갓스이(活水) 여학교와 미국 앨리슨 화이트 음악학교에서 유학하고 이화로 돌아왔다. 그녀 역시 모교에 대한 의무감으로 이화에 돌아와 20년 넘게 봉직하였다. 특히 1920년에 부임한 메리 영(1880~1967)을 도와 이화여전 음악과의 도약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기록된다.

사진④ 1914년 대학과 제1회 졸업생(신마실라, 이화숙, 김애식)

 

 

 

 

 

 

 

이은라 역시 일본 갓스이 여학교와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보스턴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화로 부임하였으나,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추애경(1900~1973)도 이은라와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그녀는 이은라가 공부했던 갓스이 여학교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수학하였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터전을 잡았다. 이들처럼 선교사의 주선은 아니었지만,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한 임배세(1897~1999)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화학당 대학과 시기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도 서양음악이 조선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던 때였다. 초창기 음악회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영환(1893~1978), 홍난파(1898~1941) 등 몇 안 되는 음악전문가들과 이화의 선교사 및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여 서양의 음악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학교 음악수업뿐 아니라 학생 동아리 이문회(以文會)에서도 연주·노래·연극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이화의 학생들은, 다양한 음악회 공연을 비롯하여 한양낙영회(漢陽樂英會) 같은 음악모임에서도 주축이 되어 조선의 음악문화를 선도할 만큼 성장하였다.

 

 

1925~1945 이화여전 음악과

한국 최초 여성 음악전문교육기관의 탄생

 

1925년 이화학당은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를 맞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전공은 문과와 음악과를 두었으며, 이것이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의 시작이다. 당시 이화는 워낙 영어와 음악 실력으로 소문이 나 있던 터라 주요 언론에서도 이화·영어·음악은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여 소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 이화여전보다 먼저 전문학교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학교·숭실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 등의 전문학교가 있었지만, 이화여전은 유일한 여성 전문 교육기관이자 최초의 음악 전문학교로서 다른 학교와는 차별되었다. 그 시기에는 배움의 환경이 자유로웠던 남성보다 여성은 학업의 통로가 좁았다. 해외로 나가 공부하는 것 역시 여성보다 자유로웠던 남성에 비해 사회 통념상 여성은 집을 떠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 이러한 여성 음악 전문학교가 생겼다는 것은 여류 음악가를 꿈꾸는 여성 음악학도들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다.

이화여전 음악과사진⑤는 예과 1년·본과 3년의 총 4년 과정으로, 1925년에 피아노 전공으로 시작하였고 1927년 성악 전공, 1930년 바이올린 전공, 1936년 작곡 전공이 만들어졌으며, 1928년부터 졸업생에게 사립고등보통학교 교원 자격이 주어졌다. 특히 작곡 전공이 개설되었다는 것은 여성의 근대교육이 많이 확대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성들은 주로 남성 연주자의 반주 역할이나 남성 성악가가 낼 수 없는 음역을 채우는 정도의 위치로서 피아노와 성악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작곡가 양성 과정이 생겼다는 것은 남녀가 동등하게 개인의 창작 행위를 예술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음악과 수업은 이화학당 대학과의 음악 과목을 바탕으로 화성학·대위법·기보법·미학 등의 과목이 추가되었다.

사진⑤ 이화여전 음악과

 

 

 

 

 

 

 

 

1930년에는 교과과정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착되었다. 전공 악기와 관련해서 피아노는 전공 실기·클래스 피아노·피아노 기법·교수법·반주법 등으로, 성악은 전공 실기·클래스 보이스·이탈리아어·글리클럽·동양 노래 등으로 세분되었으며 그외 음악이론이나 음악사·음악교육 부분도 매우 구체적으로 짜였다. 이채로운 점은 바이올린 부전공과 한국음악 수업이 개설되었다는 것이다.

교수진도 음악 전공자들로 구성되었다. 음악과의 초대 과장은 김애식, 1926년부터는 메리 영 교수가 맡았다. 성악 전공이 생겨날 무렵, 미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대머론(1885~ 1966)과 베이커(1879~1972)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점차 이화 출신으로 유학을 다녀온 윤성덕(1903~1968), 김메리(1906~2005), 김영의(1908~1986), 채선엽(1911~1987) 등이 교수진으로 합류하였다.사진⑥

사진⑥ 이화여전 초창기 문과, 음악과 재학생 및 교수 일동(1927)

 

 

 

 

 

 

 

실력만 된다면 남성이든 비(非)이화 출신이든, 일본인이든 상관없이 이화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당시 음악계에서 가장 활약하던 박경호(1898~1979)와 안기영(1900~ 1980), 계정식(1904~1974)과 이화 졸업생은 아니지만 학생들의 수준 높은 교수 임용 요구로 학교에서 교수직을 요청했던 김원복(1908 ~2002)과 정훈모(1909~1978)와 조선의 음악계에서 활약한 일본인 오오바 유노스케, 임상희(미무라 쇼코) 등 화려한 명단을 자랑하였다.

이렇게 확장하던 학교는 일제의 전시체제 상황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1940년이 되자 일제는 서양 국가들과 사이가 틀어지며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였고, 이화의 선교사들도 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조선인들만 남아 학교를 지켰으나 1945년 일제의 강압에 교과과정도 축소되고 교명까지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바뀌는 수난이 지속되었다.

사진⑦ 윤성덕 교수와 이화여전 글리클럽

그렇지만 이화여전 음악과 시기는 이화의 음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화는 서양음악 중점 학교이지만 우리의 전통음악을 가르쳐 민족의 노래를 잊지 않게 하였고, 글리클럽 활동사진⑦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전국 순회공연까지 다닐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으며, 1934년부터 음악가를 지망하는 여학생들을 위한 전조선 여자 중등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여류가곡집’(1932)을 발간하고 민요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자발적으로 다채로운 음악 활동을 해나갔다.

이러한 활약을 통해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는데, 졸업생들은 여성 음악전문가라는 사회의 인정을 받고 조선 각지에서 음악을 보급하는 데 일조하였다. 대부분은 졸업 후 바로 음악교사가 되었으며, 유학을 다녀온 졸업생들은 귀국 후 사회 각 분야에 포진되어 음악의 발전과 여성운동에 힘썼다. 당시 사회의 인식은 음악과 여성에 관대하지 않았다. 그러한 악조건에서도 이화 음악은 음악과 여성의 인식과 위상을 변화시켜, 점차 신교육의 상징이자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이화는 명실상부 조선을 대표하는 음악교육기관으로 정착하였다.

 

 

1945~1951 이화여대 예림원 음악학부

새로운 시대, 종합대학 음악교육의 출발

사진⑧ 해방 후 캠퍼스의 학생들 모습

사진⑨ 종합대학교 제1호 인가서(1946)

 

 

 

 

 

 

 

일제의 통제로 축소되었던 학교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며 교명을 되찾았고, 1946년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아 이화여자대학교로 출범하게 되었다.사진⑧ ⑨ 문과·음악과·가사과 3개의 전공이던 이화여전은 6개의 전공을 더해 총 9개 전공의 종합대학이 되었으며, 한림원·예림원·행림원 체제로 재편되었다. 음악과는 예림원에 소속되었다.

음악과는 음악학부가 되어 현악과를 신설하여 피아노과·성악과·현악과·작곡과로 구성하였다. 교수진으로는 기존에 남아있던 김영의를 비롯하여 강제 퇴직당했던 김메리·김애식·채선엽 등이 복직하였으며, 윤기선(1921~2013), 김자경(1917~1999), 이유선(1911~2005), 임동혁(1912~?) 등이 새로 부임하여 능력 있는 교수진을 확보하는 데 힘을 썼다.

기존의 과목에서 라디오 교육이라는 수업이 추가되어 음악과 학생들은 독일어와 불어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는 미군정기, 대한민국 정부수립, 한국전쟁 등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는데, 학교에서도 우선 종합대학의 기틀을 마련하며 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였다.

 

 

1951~1960 이화여대 예술대학 음악학부

전쟁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음악교육

 

이화여대는 길어지는 한국전쟁 중에도 교육을 멈출 수 없었다.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내려가 가교사에서 수업을 이어나갔다.사진⑩ 음악학부가 소속되었던 예림원을 예술대학으로 변경하고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재편성하여 김영의, 채선엽, 풀톤, 정희석(1917~2002), 민원득(1915~1970), 신재덕(1917~1987), 나운영(1922~1993)까지 7명의 교수진이 서울에서 힘들게 가져간 6대의 피아노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이화여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시급하게 파괴된 학교를 재건하고 1956년 대강당까지 완공하였다.사진⑪ 이 대강당은 전문 음악회장이 없던 그 시절 유명 해외 연주자까지 공연장으로 대관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사진⑩ 부산 전시교사

사진⑪ 대강당 완공(1956)

 

 

 

 

 

 

 

음악학부는 이영세(1911~1988), 정정식(1921~2015), 김순애(1920~2007) 등 교수진을 보강하여사진⑫, 전공 실기의 비중을 높이고 음악개론·창도법(계명창법)·관현악법·음악분석·오페라 워크숍 등의 교과목을 추가하였다. 점차 학교가 안정을 되찾고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굵직한 공연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연세대와 합동으로 기획한 헨델의 ‘메시아’, 훔퍼딩크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공연사진⑬ 등은 세간의 관심이 주목되었을 뿐 아니라, 이화의 음악 실력이 한 단계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진⑫ 1950년대 음악학부 교수진

사진⑬ 창립 70주년 기념 오페라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

 

 

 

 

 

 

 

이화여대는 1954년부터, 1930년대에 개최했던 음악콩쿠르를 다시 열었다. 전국여자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콩쿠르는 매년 음악가를 꿈꾸는 많은 여학생에게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는 자리이자 음악에 소질 있는 예비 음악가들을 발굴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1957년 음악 전공 여학생을 위한 국제기구 델타 오미크론에 가입하고, 1960년 여성으로만 조직된 최초의 여성 관현악단을 창단하는 등 여성음악가를 위한 탄탄한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1960~현재 이화여대 음악대학

음악대학의 시대, 세계를 향한 도약

 

지금까지 예술대학 소속이었던 음악학부가 음악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음악대학은 교과과정의 확충과 학생수의 증가 등 질적, 양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음악대학은 기악과·성악과·작곡과 총 3개의 과(科)로 구성하고, 기악과에 피아노 전공과 관현악 전공을 두었으며, 이전에는 없던 관악 전공을 새롭게 선발하면서 현악과에서 관현악과로 확대되었다. 이후 관현악합주 수업이 생겼으며, 모든 음대 학생에게 부전공 제도를 두어 전공뿐 아니라 부전공도 실기 지도를 받게 하였다. 가야금 수업도 도입되었다.

이처럼 수많은 시도를 통해 음악대학의 모습을 갖춰나가면서 1967년에는 종교음악과, 1974년에는 국악과를 신설하여 다양한 음악 전공을 포괄하며 더욱 내실 있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종교음악과에서는 찬송가학·교회음악·코랄 테크닉 등의 과목이 개설되었으며, 국악과에서는 국악 합주·국악 문헌·국악사·국악서 강독·비교 음악·국악 가곡·민속학 문헌·국악분석 등의 교과목이 만들어졌다. 초대 종교음악과장은 풀톤, 초대 국악과장은 황병기(1936~2018)가 임명되었다.

이화 글리클럽도 1969년부터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합창단은 이화의 상징답게 1969년에는 동남아순회공연, 1972년에는 미국순회공연을 떠났으며 미국에서는 국제대학합창제에도 초청되어 무대에 올랐다. 현재는 교양과목으로 개설될 정도로 이화의 발자취와 함께하는 역사 깊은 합창단이다.사진⑭

사진⑭ 글리클럽의 미국순회공연(1972)

1980년대가 되면 음악대학의 시설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새 음악관을 지어 음악대학 학생들이 음악을 전공하는데 필요한 많은 설비를 확충하여 음악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으며, 음악도서관을 지어 방대한 양의 음악 관련 도서와 악보, 음반 자료 등을 소장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합창과 푸가, 국악개론이 추가된 과목들을 공부하였고, 작곡과에 음악이론 전공도 신설되었다. 국악과 학생들도 서양음악 이론과 서양음악사, 클래스 피아노 등의 수업을 들으면서 동서양 음악을 상호보완하며 학문을 깊이를 넓혔다. 이화학당 창립 100주년(1986)을 지나며 김기순·송재광·배일환·이택주·윤명자·문재숙 등 새 시대를 이끌어갈 많은 신임교수도 부임하였다.

 

1990년대에는 세계화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학생들의 해외 연수 등 국제 교류가 활발해졌고, 유학을 다녀오는 이화 출신의 신진음악가들이 증가하였다. 유학생들은 전세계에 이화 음악의 실력을 확인시켜 주었고, 귀국 후 한국 음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힘썼다. 교내에서는 1990년에 이화오페라단이 창단되고, 1991년 이화 콜레기움 무지쿰 창단연주회가 개최되었다. 같은 해 국내 최초로 컴퓨터 음악실이 마련되어 해외 작곡계의 흐름에 발맞추었고, 김영의홀에는 새로운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1997년에는 음악연구소가 문을 열면서 학술연구·연주회·음악교육사업·교육프로그램 개발과 보급·기업 관련 음악사업·출판물 간행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교과목도 시대 흐름에 맞게 동아시아 음악이나 성악과의 스페인어 딕션·러시아어 딕션·컴퓨터 음악·핸드벨 연주 등의 수업이 새로 개설되었다.

사진⑮ 이대 오케스트라, 대학 오케스트라 최초 교향악축제 연주(2012)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이화는 계속해서 새천년의 하루하루를 쌓아가고 있다. 그 사이 국악과는 한국음악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종교음악과는 소속 전공들이 다른 전공과 합쳐지면서 폐지되었다. 음악대학도 2007년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개편되었다가 2009년 음악대학으로 돌아왔다. 앞으로도 이화여대 음악대학은 수많은 시도와 도전을 하며 최선의 길을 향해 갈 것이다.사진⑮

이화는 그 자체가 한국의 근현대 역사이자 여성사이며 기독교 역사이다. 음악대학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근현대음악사이면서 음악교육의 역사이다. 100년 전 선교사들이 만들어놓은 이 음악대학은 찬란한 성과를 내며 한국 최고의 여성 음악교육기관이 되었고, 지금도 많은 음악전공생이 이화여대 음악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꿈꾸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이 토대는 이화 음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계속해서 도약할 것이다.

 

조윤영(이화여대 음악대학 작곡과 겸임교수)

 

 

 


연표로 보는 이화 음악의 역사

1886
이화학당 설립, 서양음악 교육의 시작

1909
음악 정식 교과목 채택 및 개인 교습 시작

1925

이화여자전문학교 창설, 최초의 음악과 설립

1927
대학과정 최초 한국음악 교육 시작

1932
한국 최초 여성 작곡집 ‘여류가곡집’ 발간

1934
제1회 전조선여자중등학교 음악경연대회 개최

1935
신촌 캠퍼스 이전, 대학 최초 음악 전용 건물(케이스홀, 에머슨 채플) 봉헌식

1940
제3대 음악과장 김메리 취임

194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내 음악과 설치

1947
음악학부 개편, 초대 학부장 김영의 취임

1950
김자경, 한국인 최초 카네기홀 독창회

1954
제1회 전국여자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 개최

1956
한국 최초 대학 오페라 공연(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1960
한국 최초 여성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

1967
종교음악과 신설

1969
이화 글리클럽 활동 재개

1974
국악과 신설(1999년 한국음악과로 명칭 변경)

1981
신축 음악관 봉헌식, 음악대학 도서관 설립

1990
이화 오페라단 창단

1997
음악연구소 개소

2015
한국 최초 여성 국악관현악단 창단

 


 

MENTOR’S ADVICE ➊

이대 음대 선배들의 학창시절 회고와 발전

장혜원 1958년 입학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피아노 전공)

여성 음악인들의 꿈을 키운 산실

초창기 이화 음악대학의 교육 환경과 음악적 유산

©황필주

 

 

한 사람의 음악 인생이 한 대학의 역사와 포개질 때, 그것은 개인의 회고를 넘어 시대의 증언이 된다. 그의 학번은 58학번. 장혜원 교수에게 이화여대 음악대학은 단순한 모교가 아니라 삶의 대부분을 함께한 공간이다. 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세계 무대를 향한 꿈을 키웠던 시절부터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성장과 변화를 함께해 온 시간, 그리고 음악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온 세월에 이르기까지, 그가 학생과 교육자로서 이화와 함께한 시간은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음악과 함께 자랐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의 음악적 환경은 어떠했나?
광복 전인 다섯 살 무렵 피아노를 처음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청마루에 피아노가 있었고, 늘 음악이 흘렀다. 아버지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셔서 경성제국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셨고,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어머니는 딸이 태어나면 꼭 피아노를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품고 계셨다. 이렇듯 음악은 언제나 내 삶 가까이에 있었고,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었다.

학사와 석사, 그리고 36년이 넘는 교수 재직까지 오랜 시간을 이화여대와 함께했는데, 이화는 교수님께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숙명여고 2학년 재학 시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과 주최 전국여자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에서 입상해 특기생 자격으로 입학하게 됐다. 그때부터 이미 내 마음은 이화인이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거의 해마다 에머슨홀에서 독주회를 열고,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 협연하는 기회도 얻었다. 무엇보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었다. 김영의 학장님을 비롯해 김자경, 신재덕, 김순애 선생님 등 우리나라 최고의 교수님들이 모두 이화에 계셨다. 또한, 김활란 박사님이 미국 대사와 외교관들을 학교로 초청해 연회를 열 때면 내가 늘 피아노 연주를 맡곤 했다. 그때마다 학생으로서 이화를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이화는 내게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준 소중한 공간이었다.

1950년대 후반 음악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캠퍼스의 분위기는 어떠했으며, 학생들은 어떤 환경에서 음악을 배웠나?
그 당시 이화는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신촌은 ‘진촌(塵村)’이라 불릴 정도로 진흙길이 많아서, 비가 오면 운동화가 푹푹 빠지곤 했다. 연습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겨울이면 손이 굳어 피아노를 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록 시설은 열악했지만, 학생들은 모두 열정적이었고 학생 수가 많지 않아 분위기도 가족적이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공부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당시 여성이 전문 음악인의 길을 선택하고 해외 유학까지 도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나?
독일 유학은 어릴 때부터 오랜 꿈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늘 베토벤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독일 음악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당시에는 돈이 있어도 외화를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비 장학생 시험에 합격해야만 유학을 갈 수 있었다. 독일어를 공부하기 위해 숙어집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외웠고, 회화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독일 정부 국비 장학생(DAAD) 시험에 합격해 독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이화여대 대학원 재학 중 에머슨홀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

소통과 포용의 음악교육으로

독일 유학 시절 경험한 유럽의 음악교육은 한국과 어떤 차이가 있었고, 그 경험이 교수님의 교육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음악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독일에서는 앙상블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서로의 음악을 듣고 함께 호흡하며 연주하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나는 음악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귀국한 뒤에도 학생들에게 늘 앙상블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귀국 후 모교 교수로 부임했을 당시, 한국 음악계와 이화여대 음악대학은 어떤 과제를 안고 있었나?
당시 음악교육은 연주자 양성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연주자가 될 수는 없다. 교육자가 될 수도 있고, 기획자가 될 수도 있으며, 새로운 음악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했다.

현재 한국 클래식 음악계는 과거와 비교해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느끼나. 또 음악교육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은 경쟁이 훨씬 치열해졌다. 우리 음악교육은 콩쿠르와 입시, 순위에 너무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음악은 경쟁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음악은 결국 대화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음악을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연주하며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거에는 친구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경쟁보다 함께 성장하는 기쁨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런 마음만큼은 시대가 바뀌어도 음악교육에서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이화여대 음악대학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가기를 바라나?
이화는 오랫동안 여성 음악인들이 꿈을 키워온 산실이었다. 앞으로도 시대의 변화를 남보다 먼저 읽어내고,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음악교육을 앞장서 이끌어가는 대학이 되기를 바란다.

홍예원 기자

 

 

장혜원(1939~) 이화여대 음대에서 학·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독일 정부 국비 장학생(DAAD)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독일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취득했다. 귀국 후 1968년부터 약 36년간 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음대 학장과 음악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피아노학회 이사장, 이원문화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황필주

MENTOR’S ADVICE ➋

함영림 1976년 입학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피아노 전공)

이화가 키우고, 이화를 빛내다

학생을 귀하게 여기는 교육의 가치를 품고 동행해 온 37년의 기록

©황필주

 

 

만 28세라는 이른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37년간 강단을 지킨 함영림에게 이화란 ‘학창 시절부터 결혼, 육아, 퇴임까지 인생의 모든 소중한 주기를 함께하며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단짝’이다. 그간 학생과 교수, 학장의 위치에서 모교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어온 그는 이제 명예교수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이화 음대만의 전통과 유산을 지키고 후학들의 자발적인 성장을 뒷받침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굉장히 이른 나이였던 28세에 교수로 부임했다.
1976년, 교정에 학생으로 첫발을 디딘 이래, 5년간의 독일 유학 시절을 제외하곤 평생을 이화와 동행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로 임용될 당시, 훗날 부임한 배일환 교수와 함께 이화 역사상 ‘최연소 교수’ 중 한 명이었을 만큼 어린 나이였다. 푸르렀던 나의 학창 시절은 물론, 교수가 되며 결혼과 육아를 거치고 아이들이 다 자라기까지 내 인생의 소중한 주기를 이화의 울타리 안에서 보낸 셈이다.

1970년대 후반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본격적인 성장세를 쌓아 올리던 시기다.
내가 예원학교의 1회 졸업생이었던 만큼, 주변에는 초등학교 때 이미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들의 오디션을 거쳐 훌쩍 유학을 떠나던 반짝이는 음악 영재들이 가득했다. 소위 난다 긴다 하는 재능들이 모인 환경이었기에 자발적인 선의의 경쟁이 일상이었고, 서로를 보며 배우는 것도 무척 많았다. 한국 클래식 음악이 본격적인 도약을 준비하던 그 뜨거운 상향 평준화의 시기에 이화에 입학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의 이화 음대는 한국 클래식 음악의 거대한 패러다임이 전환되던 중심지였다. 1930년대부터 해외 유학을 통해 음악교육의 기초를 다져왔고, 장혜원 선생님처럼 모교에 온전히 헌신하며 사명감으로 제자들을 길러내시던 거목들이 계셨다.

당시 이화의 캠퍼스 안에서 학생들이 받았던 음악교육과 수업 풍경은 어떠했나?
그 시절 이화의 위상과 학풍은 대단했다. 부모님 세대가 이화에 진학한 자식에게 품었던 자부심은 상상 이상이었고, 교정에 들어서면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특히 학사 체계와 커리큘럼이 굉장히 정교하게 잘 짜여 있었다. 학내 분위기 역시 이화인이라는 긍지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음악가’라는 자부심 아래,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으셨던 스승님들의 서슬 퍼런 모습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빨간 코트를 입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화성학과 대위법을 가르치시던 김순애(1920~2007·작곡가)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가장 귀감이 되었던 스승은 어떤 분이셨나?
단연 장혜원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연주를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 대학교수가 그렇게 활발하게 연주자로 활동하는 게 흔치 않던 시절이었기에 그 행보만으로도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방학 때마다 열렸던 마스터클래스다. 선생님 댁이 수원에 있었는데, 방학이 되면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셨다. 교통이 좋지 않던 1970년대에 학생들이 수원까지 내려가 배움을 청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당시의 교수들이란 대개 근엄함을 지닌 채 제자들과 거리감을 두는 편이었지만 장 선생님은 달랐다. 선생님께는 유학 시절 경험하신 독일의 선진 제도를 한국에 도입해 음악교육의 지평을 열겠다는 사명감이 있으셨다.

 

정겨운 문화, 그리고 스스로 자라는 제자들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이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장 큰 본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학교’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온전히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며 예술가로 성장한다. 교수들도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솔선수범하며 길을 열어주는 것이 이화의 오랜 학풍이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학내에서는 ‘선생님’이라 불렀고, 심지어 총장에게도 ‘총장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쓰였다. 따뜻한 유대감, 그리고 학생을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오랜 세월 내리사랑으로 이어진 이화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오랜 시간 강단에서 마주한 이화만의 특별한 기질이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학업에 임하는 자세와 소양이 훌륭하다. 출결 관리나 학점에 대한 의지가 강할 뿐만 아니라,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격조 높은 태도를 스스로 갖추고 있다.
그렇다 보니 외부에서 출강하시는 강사 선생님들께서도 이화에 오면 종종 감탄 섞인 말씀을 건네신다. 학생들이 가르침을 흡수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주도적으로 따라오는 자발성이 대단하다는 평이다. 스승으로서 동료 음악가들에게 이런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감사함과 보람을 느낀다. 이처럼 치열하게 몰두하며 사회에 나아가 당당히 자립할 내면의 토양을 탄탄히 다져가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면, 말할 수 없는 깊은 자부심이 차오른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모든 순간을 이화에서 보냈다.
매 순간 온 마음으로 헌신했기에, 이화는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공유한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 같은 존재다. 교육자이자 음악가로서 걷는 길 내외로 이화라는 이름이 안겨준 보이지 않는 신뢰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분에 넘치게 이른 나이에 교수라는 과분한 직함을 얻었을 때부터, ‘모교를 더욱 빛내야 마땅하다’는 책임감으로 치열하게 달릴 수 있었다. 이화는 나를 끊임없이 키워준 삶의 요람이자, 내 인생 가장 찬란한 세월을 고스란히 품어준 마음의 고향이다.

유내리 기자

 

함영림(1957~) 이화여대 건반악기과 학·석사 과정을 졸업한 후,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에서 석사 및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귀국 후 1985년부터 약 37년간 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음악대학장·공연예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피아노듀오협회 회장과 한국피아노학회 공동회장을 역임했다.

 


 

LEADERSHIP STORY

이대의 현재를 다지는 힘찬 목소리

곽은아 1981년 입학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

전통을 이해하고 내일의 삶을 고민하며

현대의 언어로 전통을 확장해 온 음악대학의 발자취를 톺아보다

©황필주

 

 

학생에서 교수, 학장과 원장, 예술감독까지, 곽은아는 40여 년간 ‘이화’의 터전에서 수많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화여대에서 학·석사를 모두 마치고 줄곧 교육자로서 몸담아 온 그는 한국음악과의 성장 과정과 함께 음악대학의 발전사를 몸소 느껴 온 산증인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학장으로서, 예술적 전문성을 교육하는 기관이자 인간의 삶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공간으로 음악대학을 이끄는 데에 힘쓰고 있다.

 

 

한국음악과가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재학하셨다. 당시 학과의 분위기와 교육 환경은 어땠으며, 이후 한국음악과는 어떤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나?
1981년 이화여대에 입학했을 때, 한국음악과는 1974년 신설된 뒤 제도적 기반을 다져가던 시기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료나 연주 환경, 국제 교류의 기회가 풍부하지는 않았고, 전통음악을 대학 교육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음악의 활동 영역은 그 기반 위에서 훨씬 넓어졌다. 연주와 교육은 물론 창작·융합·연구·공연 기획·디지털 매체·국제무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음악과는 한국음악을 동시대 예술과 만나는 살아 있는 음악으로 확장해 왔다.

이화만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오랜 역사와 현재의 교육 역량이 함께 살아 있다는 점이다. 이화의 음악교육은 1925년 음악과 설립으로부터 출발해 한국 근대 음악교육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 왔고, 특히 여성 음악인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사회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왔다. 실기 중심의 전문성이 학문적 이해와 예술적 해석으로 이어지도록 교육해 왔다는 점, 나아가 전통과 현대, 양악과 국악, 연주와 연구, 창작과 교육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이화만의 특징이다. 이화여대에는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교수와 학생, 동문 사이에 이어지는 신뢰와 연대가 있고,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공동체적 감각이 학생들에게 안정감과 자부심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화여대 안에서 다양한 기관을 운영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수로 재직할 때에는 주로 전공 교육을 깊이 있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 집중했다면, 여러 보직을 맡으면서는 학교의 행정과 재정 흐름, 학사 운영, 학생 지원의 중요성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며 학교 전체를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됐다. 이화여대가 140년의 역사를 이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교수진과 직원들의 노고, 헌신이 있었는지를 더 깊이 알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를 믿고 따라와 준 학생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이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귀감이 된 인물이나 스승이 있나? 교육자로서 그에게 영향을 받은 교육 철학이 있다면?
가장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황병기(1936~2018) 교수님이다. 전통음악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승적 관계가 매우 중요한 예술이다. 그러니 한 곡을 배우더라도 악보에 적힌 음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결, 호흡, 여백, 음악가로서의 태도까지 몸으로 익히게 된다. 교수님께서는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가르침으로 전통을 배운다는 것이 곧 음악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배우는 일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대하시는 열정과 헌신을 보며 교육자로서의 책임도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 가르침은 늘 중요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스승 황병기와 함께

 

요즘 음악 전공생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학생이던 1980년대에는 우선 전공에 대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실력을 충실히 다지고, 스승에게 배운 전통과 기량을 성실하게 익히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지금도 기본기는 중요하지만, 오늘의 학생들은 훨씬 더 넓은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좋은 연주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획·융합예술·디지털 콘텐츠 등 음악가가 활동할 수 있는 장이 다양해진 만큼, 학생 스스로 자신의 방향을 설계해야 하고, 실기 능력에 더해 해석력·기획력·소통 능력·자기 성찰의 힘을 갖추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리고 전통을 깊이 이해하고 지키면서 동시에 그 전통이 오늘의 삶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음악대학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음악교육은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AI와 디지털 기술, 융·복합 예술의 확산은 음악교육에도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학생들은 악보와 무대만이 아니라 디지털 매체와 영상·인공지능·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음악을 만들고 전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따라서 음악교육도 전통적인 실기 교육의 깊이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술과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넓어져야 한다. 한국음악의 관점에서도 이 변화는 매우 흥미롭다. 전통음악은 오랜 시간 사람의 몸과 호흡, 구전과 전승을 통해 이어져 왔다. 오늘날에는 그 전통이 디지털 아카이브·창작 플랫폼 등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통의 형식을 보존하는 일과 함께,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다. 다만 기술이 음악의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감각과 가치로 기술을 받아들이고 활용할 것인지는 결국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으니까. 그러므로 학생들이 기술 안에서 인간의 감정과 몸의 감각, 공동체의 기억, 예술적 책임을 함께 생각하도록 이끌고 동시에 무엇이 좋은 음악적 선택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지현 기자

 

곽은아(1962~)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가야금 전공 학·석사를 졸업했고, 성균관대 예술철학과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전임교수로 부임한 이후 한국음악과 학과장·음악대학 및 대학원 음악학부 부학장을 역임했다. 이화창극단 예술감독(2016~2019)·음악대학 음악연구소 소장(2018~2022)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음악대학장·공연예술대학원장·공연문화연구센터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NOWDAY’s TEACHER

현직 음대 교수 5인의 교육방향

학생의 가능성을 넓히는 이화의 현재 스승들

©황필주

 

 

 

 

 

 

 

 

 

 

배종선 1986년 입학

● 관현악과 교수(플루트 전공)

©황필주

배종선(1968~) 이화여대 관현악과 학·석사를 거쳐 메네스 음대에서 석사,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현대음악 앙상블 ‘소리’의 음악감독이며, 2009년부터 이화여대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생의 손에 들린 악기는 같아도, 그 악기를 둘러싼 세계는 한 세대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펼쳐 보인다. 이화여대에 재학하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음악을 공부하는 전반적인 환경에 많은 변화를 느낀다고 배종선은 말한다. 사회의 발전 속에 학생들이 마주하는 정보가 대폭 늘어나고 음악 전공 커리큘럼도 다양해진 지금,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배종선은 그 중심에서 교수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언제나 깊이 고민하고 있다.

 

달라진 교육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전에는 음악 전공에 한정적인 교육 과정만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학생들은 전공 내외의 분야에서 다양한 수업을 마주하고 정보를 얻는다. 이렇게 여러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다보면 자연스레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넓어지고, 한층 더 깊은 사유를 끌어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전공에도 도움이 됨은 물론, 인생을 풍성하게 설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다.

그 가운데에서 본인의 역할에 대해 어떤 것을 고민하는가?
평소에도 제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음악의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로서 조언해 줄만한 부분들이 많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의 학생들은 내 학창 시절과는 다른 환경 속에 있다. 그렇기에 그 간극을 인지한 채로 선배 음악가로서 도울 수 있는 부분들을 도와주되, 나도 제자들의 얘기를 들으며 그들의 입장을 꾸준히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제자들에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내 지도를 떠나서 스스로 발전하며 정진해나가는 모습을 볼 때다. 음악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오는 것은 물론, 그들이 인성과 사회성을 갖춘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볼 때의 보람이 정말 크다. 제자들이 음악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본인들이 속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선택한 목표를 향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고, 또 응원한다.

최성혁 기자

 

조사방 1992년 입학

● 작곡과 교수(작곡 전공)

©황필주

조사방(1972~) 이화여대 작곡과 졸업 후 피바디 음악원에서 석사, 보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2012년부터 작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 사람의 작곡가는 스승의 말과 시대의 소리, 그리고 자신이 통과한 경험의 층위 속에서 만들어진다. 작곡을 시작한 이래 이화여대는 물론 유학 시절까지 여러 훌륭한 선생님들을 거쳤던 지난날은 조사방에게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음악을 향한 그들의 깊은 열정과 순수함은 지금도 조사방이 음악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도록 이끄는 원동력이다. 그는 교수로 재직 중인 이화여대의 현재 커리큘럼이 학생들의 가능성을 폭넓게 이끌어 낼 방향성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을 밝혔다.

 

지금의 커리큘럼이 과거와는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90년대 초에는 현대음악에만 초점이 집중됐고, 나 또한 당시에 현대음악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교수로 재임을 시작하고 보니,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여러 과정들이 생겼다. 물론 지금도 현대음악이 주된 뿌리를 이루고 있지만, 요즘 학생들은 현대음악 뿐 아니라 뮤지컬·방송음악·게임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화여대도 그 시류에 따라 다양한 수업들을 개설하며, 학생들이 폭넓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많은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창작의 모토는 무엇인가?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비단 음악적인 경험뿐 아니라 모든 범위의 예술에서부터, 삶에서 조우하는 수많은 분야의 경험 말이다. 지금 시대는 음악과 타 장르와의 실험적인 융합이나 AI와 같이 작곡가로서 활용 가능한 요소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낼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시대를 읽어낼 눈과 귀가 필요하다.
이 길을 걷는 학생들은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다.
사실상 이른 시기부터 이 길을 걸어온 학생들임에도 대부분 미래에 대한 설계를 막연해한다. 그렇지만 이화여대는 모두에게 성장의 기로를 열어주고 있으며, 이 학교를 거쳐 간 많은 인물들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있다. 그렇기에 학교를 믿고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학교가 제공하는 과정과 개인의 노력이 만날 때 큰 시너지가 발현될 수 있다.

최성혁 기자

 

박소현 1995년 입학

● 건반악기과 교수(오르간 전공)

©황필주

박소현(1974~) 이화여대 종교음악과를 졸업 후 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에서 디플롬을 받았다. 이어 쾰른·네덜란드 우트레히트·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2013년부터 이화여대 건반악기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기독교 정신 위에서 출발한 이화여대는 채플과 교회음악의 계보를 지난 100년간 꾸준히 이어오며 오르가니스트와 교회 음악가를 배출해 왔다. 이 가운데 이화의 품에서 음악의 싹을 틔우고 유학을 거쳐 다시 모교로 돌아온 박소현은 다음 세대의 걸출한 오르가니스트들을 길러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교육이란 결국 학생들의 삶을 함께 안고 가는 여정이라 말하는 그의 시선을 통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화 교회음악의 깊은 공명을 전한다.

 

재학 시절의 이화와 교수로서 학생을 지도하고 있는 지금의 이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1990년대 후반인 재학생 시절에도 학교에는 훌륭한 악기들이 갖춰져 있어 연습 환경이 좋았다. 당시 김영의홀에는 메인 파이프 오르간 1대와 연습용 파이프 오르간 1대가 있었는데, 그사이 연습용 파이프 오르간 2대가 더 확충되며 학생들이 다양한 악기를 접하고 연습할 기회가 넓어졌다. 현재 이화의 연습실은 내가 유학했던 독일 음악대학보다도 훨씬 쾌적하다.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이며, 교육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제자들이 몰래 준비한 이벤트 덕분에 잠시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가 한없이 미소 지었던 행복한 순간도 생각난다. 반면 오르간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재능 또한 남달랐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그 제자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움이 남는다. 이처럼 제자들과 함께한 희로애락의 경험을 통해 교육은 학생들의 배움을 돕는 일을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행복을 함께 응원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됐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주도적으로 사유하는 음악가가 되기를 바란다. 스승의 지시나 연주를 모방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악보와 작품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화려한 기교를 연마하는 연습을 넘어 깊이 있는 음악적 고민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며, 이를 묵묵히 뒷받침할 수 있는 꾸준함과 성실함은 기본이다.

유내리 기자

 

장혜윤 2003년 입학

● 관현악과 초빙교수(지휘 전공)

©황필주

장혜윤(1984~) 이화여대 작곡과 학·석사를 거쳐 아이오와·노스텍사스 음대를 졸업했다.
세인트 베네딕트 대학교에서 겸임교수, 미네소타 대학교 덜루스 캠퍼스에서 조교수를 역임, 이화여대에서 강사를 거쳐 지난해부터 관현악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4년 전 강사로서 이화여대의 교단에 처음으로 섰던 장혜윤은 작년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대학생 시절부터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꿈꿔왔던 그는 과거에 학생으로 오가던 캠퍼스가 출근길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감회를 느끼곤 한다. 그는 언제나 학생들이 ‘나는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를 소망한다.

 

작곡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관현악과에서 지도 중이다. 분위기에 차이가 있는가?
작곡과 학생들은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경우가 많은 반면, 관현악과 학생들은 말보다는 연주로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조용한 반응이 다소 걱정스러웠는데, 지나고 보니 그들은 말이 아닌 연주로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하고 있더라. 이런 과정에서 연주자들의 사고방식과 학습 과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교수 생활이 가져다준 것은?
미국의 학교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 성장 환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들을 지도하며 다양성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웠고, 학생들이 각자의 속도로 발전하도록 기다리는 인내심을 갖춰야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편, 미국에서는 학생들의 성장 배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학생들의 고민이나 입장을 내 학창시절과 연결하여 이해해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교육 환경을 겪으며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음을 느낀다.

교육자로서의 고민은 없는가?
음악의 길을 걷는 학생들이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교육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다만, 모두가 음악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기에 무조건 음악에 정진하기를 격려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음악을 통해 배운 끈기와 몰입은 훗날 학생들이 어떤 길을 걷느냐에 관계없이 삶을 지탱할 큰 자산이라는 것이다.

최성혁 기자

 

김미솔 2012년 입학

● 건반악기과 교수(피아노 전공)

©황필주

김미솔(1992~) 이화여대 건반악기과 피아노 전공을 졸업했다. 이후 잘츠부르크 국립 음대에서 석사·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하고, 뮌스터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2026년부터 이화여대 건반악기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스승에게 연구실 열쇠를 건네받고, 유학과 콩쿠르를 준비하던 ‘학생 김미솔’은, 이제 같은 공간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열쇠를 건네는 ‘교수 김미솔’이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익숙한 모교의 풍경은 그를 자연스럽게 음악을 처음 시작했던 초심으로 이끈다. 끊임없는 비교와 넘치는 정보 속에서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그는 뛰어난 연주력보다 ‘풍부한 질문’을 품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한다.

 

이화는 어떤 의미를 지닌 학교인가?
나의 출발선이자 음악가의 뿌리가 단단하게 만들어진 고향이다. 이곳에서 인격적으로 학생을 존중해주시는 선생님들을 만났으며, 재학 시절의 모든 만남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었다. 지금도 교정을 거닐면 그때의 내가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고, ‘당시 내겐 어떤 고민이 있었으려나’ 돌아보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으레 비슷한 시간을 겪으며 성장하듯,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내 삶의 영역을 넓혀준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재학생이던 시절과 학생을 지도 중인 현재를 비교해 보면 환경과 커리큘럼에서 어떤 차이를 느끼나?
음악의 순수한 본질은 여전히 같기에 커리큘럼 자체가 달라졌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대신 학생들의 고민은 훨씬 깊어졌다. 오히려 진로의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생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은 정보와 연주를 접할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환경 속에 놓여 있기도 하니까. 그래서 난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는 힘, 그것이 앞으로 음악가에게 더욱 강조되어야 할 역량이라고 본다.

귀감이 되었던 이화의 스승은 어떤 분이신가?
계명선 교수님께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신의 음악을 학생에게 강요하기보다 학생 각자가 지닌 고유한 색을 찾도록 이끌어주셨다. 특히 “모든 것은 악보 안에 있다”라는 그분의 가르침은 지금도 내가 음악을 연구하고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유내리 기자

 


 

다음 100년을 준비하는 이화의 젊은 목소리

임한나

● 음악대학 제58대 학생회 ‘MEnU’ 공동대표(관현악과 23)

©황필주

임한나(2004~) 예원학교·서울예고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 관현악과(첼로 전공)에 재학 중이다. 2026년 1월부터 이화여대 음악대학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무대 위의 한 선배를 바라보며 품은 동경은 어느새 학생회를 이끄는 책임감으로 자라났다. 입학하던 해, 음악대학 대표의 협연을 보며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임한나. 지난해 음악대학 학생회 집행부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고, 이는 학생회 공동대표 출마로 이어졌다. 책임감이 남다른 공동대표 임명진과 함께 신뢰와 노력의 가치를 배워온 그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이화의 구성원으로서 음악대학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화의 강점은?
가장 큰 자랑은 백 년이 넘는 시간을 통해 성장해 온 역사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있는 기회와 섬세한 피드백을 전해 주시는 교수님들, 학과 간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음악대학의 분위기, 그리고 따뜻한 동기들과 함께 성장하며 공동체의 소중함 또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이화의 강점이다.

요즘 음악 전공생으로서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과 과제는 무엇인가?
‘나의 경쟁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4학년이 되니 본격적으로 클래식계에서 내가 해낼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다. 연주에 관한 정보와 자료들이 쌓여가는 시대에,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기존과 다른 나만의 해석을 더해 ‘나’라는 사람을 브랜딩하는 것이 요즘의 과제인 것 같다.

진로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 학교의 도움을 받은 부분이 있었다면?
학교 일과 실기를 모두 챙기는 선배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내악 팀원들, 그리고 교수님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연주자로서의 정체성도 생겼다. 마케팅을 공부해 보고 싶어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시작하기도 했는데, 수업에서 만난 다양한 전공의 학우들과 소통하며 시야를 넓혔다. 학교 차원에서 진행하는 비교과 활동과 멘토링 프로그램, 학술동아리 운영진과 같은 대외 활동에 참여하며 다양한 진로 탐색의 기회를 얻기도 했다.

장지현 기자

 

 

임명진

● 음악대학 제58대 학생회 ‘MEnU’ 공동대표(한국음악과 23)

©황필주

임명진(2004~) 국립국악중·국악고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 한국음악과(대금 전공)에 재학 중이다. 2025년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2026년 1월부터 음악대학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임명진이 생각하는 이화여대 음악대학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이다. 전임 대표들의 노력을 지켜보며 음악대학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고, 끊임없이 연주자로 성장하고 도전하는 교수진의 모습을 보며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선배 음악가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그는 연주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확신을 가졌다.

 

학생회 대표에 선출되었을 때의 소감과 학생회 활동 중 특별한 에피소드나 경험이 있다면?
대표로 선출되었을 때는 감사한 마음과 함께 큰 책임감을 느꼈다. 음악대학 학생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그만큼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다. 얼마 전 학생들의 목소리를 모아 학장·학과장님과 소통하는 간담회가 진행되었는데, 음악대학이 발전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한 것이 특별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요즘 음악 전공생으로서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과 과제는 무엇인가?
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과 국악을 비롯한 음악을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크다. 그동안은 연주자와 인연이 있는 관객에 비해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공연장을 찾는 관객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자연스럽게 공연장을 찾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화는 어떤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교육과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활발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계시는 교수님들이 계신다는 점이다. 정기연주회를 비롯해 음악대학에서 열리는 공연과 행사에 참여하며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학생들이 적성과 진로를 직접 경험하며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 또한 큰 장점이다.

장지현 기자

 


 

모교는 달라도, 이화의 미래를 함께 짓는 스승들

배일환

● 관현악과 교수(첼로 전공)

배일환(1965~) 13살에 도미하여 줄리아드 음악원·예일대·인디애나 음대에서 수학했다. 현재 문화외교 자선단체 ‘뷰티풀 마인드’의 대표이며, 1993년부터 이화여대 관현악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난해 이화여대 음악대학의 100주년을 축하하며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던 ‘100인의 첼리스트’. 첫 제자의 피라미드식 연락을 시작으로 2시간 만에 100명의 동문이 결집했던 이 무대의 중심에는, “남성이지만 이화의 정신을 온전히 체화한 최고의 이화인”이라 자부하는 스승 배일환이 있다.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무대를 일구고 서로를 배려하는 끈끈한 유대감을 목도하며, 그는 1886년 정동에서 한 명의 학생과 시작된 스크랜튼 선교사의 나눔의 정신을 발견했다. 새로운 100년을 맞이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존중하며 포기 없이 버텨내라!”고 외치는 그의 메시지는, 곧 이화를 향한 진솔한 러브레터다.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며 느낀 이화만의 교육적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부임 이후, 마주한 이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화에 대한 구성원들의 자부심이 강했고, 학교가 지향하는 자유·사랑·평화의 가치가 교육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다. 난 개인적으로 배려와 인성을 교육의 최우선으로 여기는데, 학생들은 이를 뒷받침할 압도적인 실력까지 갖추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특히 여대 특성상 궂은일도 스스로 해결하다 보니, 피아노나 하프 같은 무거운 악기도 주도적으로 들며 씩씩하게 무대를 준비한다.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 솔선수범하는 강력한 책임감, 동료 간의 돈독하고 끈끈한 우정이야말로 이화인들만의 큰 무기다.

이화만의 정신적인 전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종교적·역사적 뿌리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1886년 스크랜튼 선교사가 단 한 명의 학생에게 찬송가를 가르치며 시작된 이화의 교육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무조건적인 나눔이었다. 이것이 이화를 지탱해 온 핵심 전통이다. 나는 비록 이화 출신의 여성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교정에서 호흡하며 이 아름다운 정신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감히 ‘스크랜튼의 정신을 이어받은 최고의 이화인’이라 자부하며, 이 숭고한 전통을 후학들에게 고스란히 이어가고자 하는 바람이다.

유내리 기자

 

 

송지원

● 관현악과 교수(바이올린 전공)

송지원(1992~) 한국예술종합학교·클리블랜드 음악원 예비학교를 거쳐 커티스·뉴잉글랜드·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2022년부터 이화여대 관현악과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학 당시 가능성 풍부한 원석이었던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 음악적인 향상을 넘어 뚜렷한 음악적 철학을 지닌 예술가로 피어나는 이곳. 외부인의 시선으로 이화를 마주한 송지원이 발견한 이화 음악대학 학생들의 모습이다. 인성과 사회적 책임, 학교 이념인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체화한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고민하고 실행하는 단단한 힘을 기른다. 제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온화한 선배 교수들에게서 송지원은 이화의 상생을 배우는 중이다.

 

처음 마주한 이화의 인상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전반적으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깊이 스며있는 ‘교육의 품격’이었다. 선배 교수님들께서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리신 학문적 깊이, 그리고 학생을 향한 존중이 학교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화 학생들은 학업적인 기초 체력과 사고력 면에서도 굉장히 뛰어나다. 이해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던지는 질문을 보면 그 깊이에 놀라곤 한다. 수업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묻고 고민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는 이화가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음악가로서의 깊이와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가 결코 빛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주지하다시피 첨단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대학 교육 역시 거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원초적인 감각과 예술의 가치는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타인의 마음을 깊이 귀 기울여 듣고 헤아리는 일은 그 어떤 고도화된 기술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음악가로서 치열하게 실력을 기르는 것은 물론 기본이 되어야 하겠지만, 단순히 나 자신을 증명하고 과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음악을 통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나아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귀하게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

유내리 기자

 


 

이향숙 1982년 입학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기술의 시대, 음악은 인간다움을 지키는 힘

이화 음악대학의 미래 비전을 위한 메시지

2025년 총장 취임 첫해에 음악대학 창립 100주년을 함께 맞은 이향숙 총장에게 101주년은 다음 세기를 향한 첫걸음이다. 암호학을 연구해 온 수학자인 그는 음악대학의 역사를 기술의 시대에 더욱 선명해지는 인간다움의 가치와 연결해 바라본다.

 

 

 

총장 취임 첫해인 지난해에 음악대학 창립 100주년을 함께 맞았다. 그해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취임 첫해에 음악대학이 100주년을 맞이한 일은 매우 뜻깊은 경험이었다. 100주년 기념 음악회와 여러 행사는 음악대학이 쌓아온 역사가 단지 뛰어난 연주자를 길러낸 기록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예술을 통해 재능을 펼치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를 길러온 역사임을 확인하게 해 준 순간들이었다.

학생 시절 이화 캠퍼스에서 경험한 음악과 예술 가운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채플 시간에 울려 퍼지던 합창이 먼저 떠오른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순간은 이화 공동체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서로 다른 전공과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한 공간에 모여 배우고 성장하는 경험은 이화 교육의 중요한 가치였다. 지금 돌아보면 음악과 예술은 캠퍼스 곳곳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화 역사상 첫 이공계 출신 총장이다. 수학자이자 암호학 연구자로서 음악대학을 바라볼 때 남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수학과 음악은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두 분야는 보이지 않는 질서와 조화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깊이 닮아 있다. 수학이 논리와 구조를 통해 세상의 원리를 탐구한다면, 음악은 소리와 리듬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삶을 표현한다. 암호학을 연구하면서도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실 또한 느끼게 된다. 인공지능이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에도 공감하고 위로하며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능력은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영역으로 남는다. 음악은 그 인간다움을 가장 깊이 보여주는 예술이다.

이화가 여성 고등교육의 길을 열었다면, 음악대학은 예술의 언어로 어떤 길을 열어왔다고 보는가?
1886년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의 역사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역사다. 음악대학 역시 그 이화 정신을 예술의 영역에서 실천해 온 대표적인 공동체다. 여성들이 전문 음악인으로 성장하기 어려웠던 시절부터 이화 음악대학은 예술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법을 가르쳤다. 김자경·김영의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동문은 무대와 교육 현장에서 길을 열었고, 그 발자취는 후배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화 음악대학의 101년은 한 대학의 연혁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온 개척의 역사다.

총장으로서 ‘인간 중심 AI 대전환’을 이화의 미래 비전으로 제시했다. AI 시대에 음악대학이 지켜야 할 교육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공감, 상상력과 윤리적 성찰이다. 음악교육의 본질도 단순히 연주 기법을 익히는 것에만 있지 않다. 음악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는 힘을 기르는 데 있다. 이화가 말하는 ‘인간 중심 AI 대전환’은 기술의 중심에 언제나 인간의 가치와 공존의 철학을 두겠다는 선언이다. AI 시대일수록 음악대학의 역할이 더 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1년은 100년으로 대변되는 한 세기를 지나 다음 세기의 첫걸음을 내딛는 시간이다. 이화 음악대학의 다음 100년을 위해 남기고 싶은 당부가 있다면?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는 방식은 달라지겠지만, 음악이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고 공동체를 연결하며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힘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화 음악대학은 세계적인 예술성과 따뜻한 인간애를 함께 갖춘 예술인을 길러내고, 예술과 과학기술, 인문학을 아우르는 융합적 시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리더를 배출해야 한다. 예술을 통해 사람을 세우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것, 그것이 이화 음악대학이 이어가야 할 가장 소중한 전통이다.

송현민(편집장) 사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실

 

이향숙(1963~) 이화여대 수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교수로 부임해, 암호학과 계산수학 분야를 연구해 왔다. 이화여대 연구처장·산학협력단장, 수리과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25년 2월 제18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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