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고 나온 정은혜의 ‘메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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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7월 1일 12:00 오전

이번 국립창극단의 신작 ‘메디아’의 메디아 역은 국립창극단원 박애리와 정은혜가 맡았다. 이미 관록을 담은 자신만의 목소리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박애리에 비해 정은혜는 이제 입단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막내 단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은혜는 혼신을 다한 연기로 선배에 버금가는 호평을 자아냈다. 예술감독 김성녀와 연출 서재형은 왜 ‘정은혜’를 메디아로 지목했을까?

객원의 자격으로 이전 국립창극단의 작품들에서 작은 역할을 맡기도 했으나, 이번 무대는 신입 단원임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힘들었던 주연 역할을 잘 해냈다.
메디아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처음 배역 캐스팅 오디션을 볼 때만 해도 너무 짧게 들으셔서 뽑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오디션 당일 캐스팅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극의 내용은 납득하기 어려운 주제이자 한국 정서에도 맞지 않는 곡일뿐더러 ‘오대가’ 속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어떻게 몰입했나.
작품, 작가, 그리고 연출에 설득당했다고 보면 된다. 나도 실연을 통해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아봤고, 버리기도 해봤고.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자식을 죽여?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극장 공원에 혼자 앉아 생각한 적이 있다. 내게 여섯 명의 남자 조카들이 있는데, 나이도 딱 ‘메디아’에 나오는 아이들의 나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들이 죽는다는 것은 피를 토할 일이다. 생각 끝에 이것은 ‘신에 대한 대항’이라는 결론을 냈다. 만약 내가 메디아였다면 내가 죽고 말 것 같다.
캐릭터를 선명하게 잘 잡은 것 같다. 선배 박애리의 소리에는 따뜻한 감성이 있지 않나.
박애리 선배는 인격도 너무나 훌륭한 분이다. 때문에 선배의 메디아는 모두를 포용하고 더 크게 품어준 것 같다. 보통 후배는 선배의 소리를 닮게 따라가는 것이 통상적인 예우이나 나는 나만의 메디아가 있을 것만 같았고, 찾고 싶었다. 그것이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정은혜는 어떤 성격인가.
나는 센 사람이다. 노래도 강한 사람들의 노래를 좋아한다. 성격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편이다. 닮고 싶은 가수는 마리아 칼라스다. 그 사람 역시 강한 성격을 지녔을 것 같다.
오페라 ‘메데아’로 세계적인 위상을 높였던 그 마리아 칼라스 말인가?
그렇다.
때문에 정은혜의 메디아는 강인한 여성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메디아를 맡은 날은 온통 ‘메디아’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역을 살려주지 못하는 메디아. 균형이 맞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것은 내가 메디아에 너무 심하게 빠져버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연습 내 정서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밥도 잘 못 먹었고, 많이 울었다. 연습실 바닥에 인형을 끌어안고 누워 있으니, 선배들은 저러다가 쟤가 일을 내겠다고, 병원 가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점점 말라가기도 했고.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내가 메디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으니까.
창극의 형식은 판소리를 공부한 소리꾼들이 일인 다역의 역할을 하던 ‘판소리’를 극으로 펼쳐 일인 일역에 몰입하는 형식이다. 전통 판소리를 해오던 소리꾼이 갑자기 극에 투입되고, 극을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것. 연극적인 훈련이 없고서야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무대에서 대사 연기를 한 것이 이번이 두 번째다. 창극 ‘장화홍련’ 앙상블에서 “소문 들었어?”, 이게 다였다. 그래서 처음 메디아를 맡았을 때 서재형 연출님께 “저는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씀드렸다. 첫 대본 리딩 후, “은혜 씨 안에 다 있어요”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그 확신으로 나아간 것 같다. 판소리를 배울 때 역시 따로 연기 수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창극단에 들어오니, 오전 한 시간 춤·요가 등 신체와 관련된 연습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김성녀 예술감독님이 도입한 방식이었는데, 소리를 극으로 만드는 배우에게 굉장히 필요한 훈련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연기를 할수록 소리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몰입은 낯선 ‘메디아’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심청이나 춘향이를 맡았더라면 나는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소리적인 고민은 적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늘 해왔던 인물이고, 훈련했던 대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디아’에서는 1장부터 10장 전체를 악보에 의존했어야 했고, 음과 가사, 대사 모든 것에 대해 연구해야 했다. 어느 대중음악 프로듀서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공기 반, 소리 반”. 각각의 신마다 소리의 질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좀더 가벼운 발성을 써도 좋겠다, 아니면 조금 무겁게 소리를 짓이겨야겠다 등. 수축과 이완, 긴장과 이완이 있었기 때문에 관객도 그렇게 느껴주신 것 같다.
즉흥적인 수성가락과 재치 있는 대사가 매력인 기존의 창극에서 벗어나 이번 작품은 대사를 줄여 온전히 노래로 말을 만드는 ‘송스루(Song-through)’ 형식의 음악이었다. 이것에 대해 ‘소리배우’로서 어떻게 받아들였나.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으로 채워가는 ‘송스루’ 형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를 두고 각을 맞춰가야 했기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무언가를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예전의 수성가락은 소리꾼과 연주자가 ‘잼’ 형식으로 서로 겨루며 연주를 했기 때문에 재미있다. 가령 소리가 올라가면 악기가 받쳐주고, 악기가 치고 들어오면 소리가 죽여주는 등 즉흥적인 요소를 가미한 절묘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점점 수성가락의 의미가 퇴색되고, 오히려 소릿길의 반주 역할로 정형화되다 보니 수성가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수성가락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치열한 가락의 배열이나 소리와 악기의 진성을 만나보기 어렵다.
악기의 연주도 돋보이고 소리도 돋보이던 옛날 선생님들의 방식은 말로 설명할 수 없게 멋있다. 요즘은 점점 서로를 의존하는 외길의 방식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이번 무대에서 소리꾼의 자유가 허용된 부분이 있었다면.
군데군데 울음소리, 즉흥의 구음 같은 영역은 작곡가가 많이 열어주셨다.
반면 제약적인 부분은.
도창자들(코러스)의 역할이 컸고, 악기들의 역할도 강해질 수 있었지만, 단잽이(각 악기 당 한 명의 연주자로 연주하는 형식)로 연주해 규모를 축소했던 것 같다. 도창들과 메디아, 이아손 역시 모두 약속된 한배(일정한 박자를 이르는 국악적 용어)와 긴장 안에 박을 조절하며 음악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메디아가 살아야 하는 곳곳의 부분에서는 코러스 위에서 구음을 넘나들며 활용했던 것으로 제약은 충분히 풀어갈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창극’이다. 결과적으로 ‘창극적’ 요소가 살았다고 보는 건가.
연출은 음악을 최대한 누르고자 했던 것 같다. 반주가 튀거나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전통적인 소리가 드러나야 하고, 무대 위의 배우가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아마도 극의 밀도와 음악의 배합을 맞추느라 작곡가가 힘들었을 거다. 그러나 전통음악의 본질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국악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국악 ‘창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논리, 혹은 그에 부합하는 평가. 어떻게 생각하나. 때때로 그것 때문에 음악이 작위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종종 보기도 하는데.
적절한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극의 전개에서 구음이 들어갔다면, 혹은 그 시김새가 쓰였다면 작곡가와 연출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넣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관객들에게 납득되느냐, 설득되느냐의 문제다. 창작자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우리가 만났던 국립창극단 입단 소식 인터뷰에서 당신은 ‘판소리’에 관해, ‘전통음악’에 관해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으로 의견을 피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보수적인’ 소리꾼이 ‘이아손’을 외치고, 코린토스 땅 위에 섰다. 이 작품으로 인한 정은혜의 변화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나는 “산이 높고~”라는 가사를 부르더라도, 노래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너름새나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안에, 내 본성 안에 ‘연기적인’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작품이 되었다. 연습 중 “마지막 10장 신을 가자”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는데, 처음으로 울어본 날이 있다. 그날 모든 배우가 다 울었다. 그냥 나를 내려놓고 메디아가 정은혜에게 덧입혔을 때, 어떻게 표현되어져야 하는가의 고민을 던져줬다고 할 수 있다. 그랬을 때 이 여인이 울 수 있는 울음이 뭔가. 울어낼 수 있는 구음이 뭔가. 결국 그렇게 울게 되는.
앞서 말한 ‘신념’이 무너졌을 때를 설명한다면?
창극인 것 같기도 하고, 뮤지컬 같기도 하고, 이 작품을 들어서도 굉장히 모호하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그럴 때 신념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본질을 이야기했다면 상관없다.
우리 음악의 본질이 도대체 뭔가.
‘창’이라는 요소에는 진성으로 내지르는 소리도 있고, 두성으로 울리는 소리도 있고, 멀리 던지는 소리, 평으로 내는 소리, 바깥에서 뽑아내는 소리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우리는 보통 ‘득음’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이 낼 수 있는 다채로운 소리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코러스로 부른 합창에서 내는 소리도 엄연한 차원에서는 소리의 평음을 내었던 것이니 이것 역시 판소리의 본질이 아닐까? 왜 판소리를 제한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의 ‘탈국악적’ 요소는 무엇이었나.
창극 ‘메디아’는 탈장르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본질에 가까웠다. 대본에는 ‘아’ 소리가 많았는데, ‘아’의 대사 옆에 작가님이 지문으로 쓰기를, “짐승의 울음소리 같으나 짐승은 아니다”라고 했다. 사람이 밑바닥의 수렁까지 내려갔을 때, 간헐적인 그 울음소리, 우리나라의 억압적인 한의 정서가 음악으로 승화된 것이 구음이고 판소리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고 홀로 욕조 앞에서 우는 장면에서 그 구음이 두드러진다. 울음이 점점 승화되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소리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 작품은 국악의 탈장르적인 행보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것을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그 소재가 서양의 이야기 그리스 비극이라는 것뿐이다. 판소리는 너무도 강하고, 어렵고, 고집스럽다. 두 고집, 두 산이 만났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100을 다 소화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작품이 당신에게 준 가장 큰 주문이 있었다면.
“거짓말 하지 마.” “은혜 씨 눈물 흘려도 돼.” “눈물이 나지 않으면 울지 마.” “눈물콧물 다 흘려도 돼.” 서재형 선생님이 끊임없이 걸었던 주문이다. 사실 춘향이가 매를 맞을 때 나는 거짓말하며 울었다. 판소리가 그동안 세월을 지내오면서 양식화되던 부분들이 재발견된 것 같다.
인형을 끌어안고 나가던 ‘메디아’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의 남동생도, 자식들도, 아버지도 처참하게 죽어서는 안 돼. 살려내고 싶어. 난, 나는 그러고 싶어.’
이번 작품을 통해 느낀 점이 뭔가.
‘줄탁동시(啄同時)’가 되어서 누군가가 깨어주려고 하고, 누군가는 깨고 나오려고 해야 하는 것 같다. 변화하려는 의지는 젊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전통예술이 가야할 길이고.

글 정우정 기자(w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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