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과 도쿄 신국립극장이 세 번째로 공동 제작한 ‘아시아 온천’은 외딴 섬을 배경으로 토착민과 외지인 간의 화해와 공존을 그렸다. 이전의 작품들이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뒀다면, 이 작품은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역사의식의 충돌로 갈등을 겪고 있는 시기에 한·일 양국 연극인들의 교류만큼은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6월 10~16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글 이은경(연극평론가) 사진 예술의전당
‘아시아 온천’은 ‘로미오와 줄리엣’ ‘장군각시’ 등을 뒤섞은 것처럼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대대로 가꾸어온 땅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온천 리조트로 개발하려는 외지인 간의 갈등이 중심 사건이고, 결말은 수박 장사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예상할 수 있다. 종달이(이봉련 분)와 아유무(성하 분)의 죽음으로 인해 갈등의 중심 축인 대지(김진태 분)와 가케루(가쓰무라 마사노부 분)가 화해하게 되고, 영혼 결혼식을 올리면서 섬 전체가 과거의 관습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가족 이데올로기와 감상주의를 전경화한다는 점에서 정의신의 이전 작품과 궤를 같이 하지만, 역사의식 부재라는 문제점은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공간을 모호하게 처리해도 한·일 양국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가해자 한국인과 피해자 일본인이란 이분법적 구도가 불편하다. 작품 속 한국인은 땅에 대한 비이성적인 집착과 완고한 관습·규범으로 인해 외지인에 대해 배타적이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일본인은 자신의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며, 결국 살해까지 당하지만 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선한 인물들이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일본 공연에서 전회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 짐작이 간다. 물론 연극이 반드시 역사의식을 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의신에게 부여되어온 식민지주의(colonialism)에 대한 혐의가 이 작품으로 더 짙어졌다. 최근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등에서 보여준 정의신의 작가적 퇴행이 아쉬웠다. 그렇기에 작가의 시선을 대신해 사랑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남녀 떠돌이(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의 주인공 잠파노와 젤소미나의 희극적 변형이라 해도 무방하다)와 중심 갈등에서조차 비껴난 타자들의 현실적 욕망을 대변하는 세 남자의 에피소드가 관객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더 크게 느껴졌다.
공연은 손진책의 연출 스타일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역동적인 마당놀이였다. 무대 중앙에는 매듭진 흰 끈들이 길게 늘어져 성황당을 상징하고, 사탕수수 나무가 후면 무대를 에워쌌다. 여기에 악기·의상·의자들이 무대 좌우에 배치됐다. 마을 굿으로 시작해 영혼 혼사굿으로 끝나 굿의식이 공연 전반에 배치되어 있으며, 드럼·기타·피아노 등의 라이브 연주와 형제의 갈등을 북과 드럼의 대결로 풀어내는 공감각적 연출이 더해져 풍부한 스펙터클의 향연이 펼쳐졌다. 배우들은 연기는 물론 춤·노래·악기 연주까지 뛰어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해 관객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대사는 한국말과 일본말을 넘나들고 배우들은 공연 내내 무대에 현존하며, 관객을 대상으로 퀴즈 게임을 하고 간식거리를 나눠주면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열린 무대로 이질적인 한·일 양국의 연극적 스타일이 효과적으로 조율됐다.
굿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흥겹게 어우러지는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외동딸과 아우를 잃은 상실의 고통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 대지와 가케루가 끈의 매듭을 풀면서 화해하고, 망자들이 산 자들과 한 무대에서 어우러진다. 객석까지 닿은 흰 끈으로 인해 관객까지 공존의식의 참여자가 된다. 이 작품이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화해와 공존을 가장 구체적으로 시각화한 장면이었다. 빈약한 서사를 채워준 풍부한 연희로 세 시간에 가까운 공연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동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