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서거 190주년을 기념하며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슈베르트의 작품을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자신만의 청초한 피아니즘으로 무대에 선보인다.
3월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지는 이날 공연의 1부에서는 슈베르트의 즉흥곡 중 하나인 즉흥곡 D935 전곡 4곡, 2부에서는 슈베르트의 후기 유작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을 연주한다.
이밖에 3월 2일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3월 3일 남동소래아트홀 소래극장, 3월 9일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 3월 10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3월 13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3월 15일 울산중구문화의전당에서도 독주회 투어를 갖는다.
임동혁은 3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연약하고 앳된 얼굴, 빠듯한 공연 일정 때문에 지쳐있는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지 이번 인터뷰 때는 그동안의 그와는 매치가 잘 되지 않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요즘 그는 한동안 머물렀던 미국을 떠나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독일에서의 삶은 조금 더 내추럴하고 규칙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살도 많이 오르고 마음도 안정돼 보였다.
“결혼을 해서 그런지 많이 편안해졌어요(웃음). 최근에 독일로 이사했지만, 여기저기서 살아보니 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예전에 좋아하던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은 이제 체력이 안 따라 줘서 못하고 있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살이 좀 쪘고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인데요. 이제 운동만 하면 훨씬 몸이 건강해 지지 않을까 싶어요.”
2015년 쇼팽 워너 클래식스 레이블을 통해 쇼팽 프렐류드 전곡 음반을 발매하며 30대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던 그가 3월, 자신이 사랑하는 슈베르트 작품을 가지고 우리 곁을 찾아온다. 그는 2015년 인터뷰 때에도 언젠가 슈베르트의 마지막 유작 소나타 D960을 연주해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쇼팽 음반을 냈을 당시엔 굉장히 힘들 때였어요. 몸무게도 많이 빠졌었고요. 지금은 그때와는 반대로 제 인생에서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때에요(웃음). 지난 3년 동안은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생각의 전환이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내가 정말로 무엇을 사랑하는 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는지 묻자 그는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음악’이라고 말한다.
“음악이 결국 제 인생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그 음악을 지키기 위해 어떤 힘든 일들이 닥쳐도 견뎌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죠.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에겐 그 버티는 힘이 음악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연주하는 슈베르트가 제겐 너무나 의미가 큰 작곡가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쇼팽을 연주하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제 마음 속엔 늘 슈베르트가 있었거든요. 자신도 있었고 솔직히 약간 자랑도 하고 싶었어요(웃음). ‘임동혁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슈베르트처럼 진지한 음악이 어울릴까’ 의문을 갖는 분도 있겠지만 저를 잘 아는 분들은 제가 슈베르트 음악과 잘 어울린다고 많이들 말씀해 주세요. 그동안 저를 가르쳐 주셨던 이매뉴얼 액스 선생님도 제 슈베르트 연주를 좋아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고요. 사실 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자유분방하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예요. 은근히 통제되는 걸 좋아하고 균형과 절제가 중요한 고전 음악에 대한 동경 같은 것도 있어요. 슈베르트 음악은 그렇게 고전적이면서도 노래가 중요한 작품들이 많아 지성과 감성의 밸런스가 잘 맞죠. 그런데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비극적이잖아요. 그런 점에 왠지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아요. 물론 슈베르트 음악만 비극적인 건 아닐 거예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곡들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거든요. 베토벤의 음악도 연주하다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아픔을 예견하게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고요. 명곡이라고 하는 곡들을 들어보면 어느 한 곡도 마냥 행복한 곡은 없지 않나 싶어요.”
임동혁만의 감성, 그리고 가능성
세상에는 천재들에 대한 전설이 많다. 음악가로는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쇼팽이 그렇다.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우리에게 천재의 얼굴로 기억된다. 7세 때 피아노를 시작해 10세 때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에서 수학한 후 청소년 쇼팽 콩쿠르 1위에 입상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음악 페스티벌에서 임동혁의 연주를 듣고 라 로크 당테롱 페르티벌, 베르비에 페스티벌에 초청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EMI 클래식의 ‘젊은 피아니스트’ 시리즈에 임동혁을 추천해 발매한 EMI 클래식 데뷔 음반으로 황금 디아파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르 몽드’지에서 수상하는 쇼크상을 받은 2집에 이어 2008년 출시된 3집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까지 임동혁은 섬세하고 화려한 낭만음악의 매력과 단아하고 깊이 있는 바로크 음악의 정수를 들려주며 인기를 모았다.
국제 콩쿠르에서의 수상 역시 독보적이었다. 그는 롱 티보, 하마마츠 콩쿠르에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3위(수상 거부), 쇼팽 콩쿠르 2위 없는 공동 3위, 차이콥스키 콩쿠르 1위 없는 4위에 입상하며 세계 3대 콩쿠르를 모두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특히 15회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형제의 공동 3위 수상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천재 소년의 얼굴로 기억되던 그도 어느덧 서른 중반을 넘어섰다. 그의 빛나는 재능은 시간이라는 선물이 더해져 새로운 인생의 여정 속에서 나날이 변화해 왔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최선을 다한 결과는 재능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죠. 그러니 당연히 재능만 가지고는 예술을 할 수 없겠죠. 만약 흰 눈을 만졌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표현하라고 한다면 재능이 없는 경우 아무리 아름다운 눈을 만져도 그냥 소금처럼 서걱서걱거린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재능이 출중한 사람은 눈을 만져보지 않고도 어떤 느낌인지 묘사하는 것부터가 다르죠. 재능이 있다면 연주를 할 때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여러 감성을 아직 어린 나이여서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해도 표현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진짜로 경험하는 건 상상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서 여러 경험을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겪게 되면 음악을 표현하는 폭이 넓어지고 음악이 달라지는 건 맞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은 살면서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죠. 가슴이 뚫린 것 같은 아픔, 공허함 이런 감정을 누가 또 겪고 싶겠어요. 그래서 어느 땐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앞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무척 두렵기도 해요. 아무리 그 경험을 음악 속에 녹여낸다 해도 힘든 건 힘든 거니까요. 결국 사람마다의 경험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외로움을 잘 타고 때로는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 그이지만 임동혁의 음악은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에서조차 화려함보다는 음표들이 빚어내는 작은 프레이즈들의 변화와 드라마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연주라고 평해진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담백하고 정돈된 아름다움은 그가 얼마나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연주자인지 말해준다.
“음악은 테크닉만으로, 풍부한 감성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감성만으로 좋은 음악을 한다면 집시들이 클래식음악을 제일 잘 하겠죠. 클래식 음악은 하나의 학문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과 배경이 있어야 하고 수학, 과학, 심리학, 인문학을 공부하듯 인간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어요. 음악은 질서정연한 세계 속에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거든요. 지성과 감성의 밸런스가 클래식 음악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선보이는 슈베르트 작품 역시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최고봉이라 꼽히는 곡들이다. 서정미와 청초함이 돋보이는 즉흥곡과 심오한 슈베르트 만년의 심정이 드러난 마지막 소나타는 모든 음의 소중함을 드러내야 하는 각별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D959과 D960을 같이 연주하고 싶었어요. 아르헨티나에서 연주했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연주하는 내내 너무 행복했거든요. 슈베르트의 소품이 갖는 완성도는 아주 높고 아름다워요. 이 곡들은 출판사에 보내진 뒤 10년 후에 출판업자인 디아벨리가 리스트에게 바치는 헌정본의 형식으로 Op.142의 작품번호를 달고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죠. D960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작곡했다는 점에서 세상과의 작별인사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데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아름답고, 가슴을 파고들 때는 아주 깊이 파고들고, 그러면서도 대범한 곡이에요. 이 곡을 연주하다 보면 슈베르트가 이 정도로 용감했나? 테크닉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래도 자신이 피아니스트가 아니라서 피아노로 연주하기엔 참 힘들게 작곡을 한 듯 싶어요.”
그의 말처럼 이번 독주회는 슈베르트의 따뜻하고 솔직한 인간미 속에 흐르는 음악적 아름다움을 무대에 선보이는 자리여서 테크닉과 지적인 통찰력, 직관력, 그리고 음색을 만들어내는 창의성 등 다방면의 음악성이 필요한 무대다.
“슈베르트를 연주한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있지만 라두 루푸를 좋아하고 예전에 듣던 것보다 알프레드 브렌델 연주를 지금 더 좋아하게 되었어요. 원래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연주가 아니었는데 요즘 다시 들어보니 이전과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테크닉적으로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는데 이젠 그런 부분들이 안 들리고 예전엔 빈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그런 틈을 어떤 아우라와 기운으로 가득 메우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이젠 완벽한 연주보다는 무엇인가를 초월한 연주가 좋아요. 연주 하나 하나 마다 초조하게 준비하고 무대에 서는 제 스타일 때문인지 그런 연주들이 부럽기도 하고 마음에 많이 와 닿네요.”
‘인생’을 닮은 슈베르트의 음악
훌륭한 독주자라고 해서 좋은 실내악 주자라고 하기는 힘들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누군가와의 음악적 호흡을 함께 해야 하는 실내악의 경우 독주자와는 또 다른 조화와 균형,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들을 줄 아는 귀가 가장 중요시된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임동혁은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실내악주자로 많은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디토 앙상블 단원으로서 뿐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 임지영, 클라라 주미 강과의 듀오 연주에서도 훌륭한 호흡으로 무대를 빛내왔다. 같은 악기주자인 선우예권, 김정원 등 선후배 사이도 꽤 돈독하다. 그는 자기 주장이 확실한 연주자이면서 다른 사람의 음악에 누구보다 귀 기울일 줄 하는 신중함과 배려심을 지녔다. 무엇보다 원조 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는 견고한 음악팬층을 갖고 있다. 클래식 음악팬이 많지 않던 시절에도 그의 연주장은 언제나 매진될 만큼 임동혁 음악에 대한 사랑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이어서 그런지 사람을 많이 의지하고 믿는 편이에요. 친한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진솔한 사람들이 많아요.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친구들이죠.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부러우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인위적으로 자신감 있어 보이는 사람도 불편하고요. 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아마 그 사람들도 제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할거라 생각해요.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보기도 하거든요. 얼마전 아르헤리치 선생님 댁에서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거장인데도 연주하기 전 많이 떨면서 예민해 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요(웃음).”
겉으로 보기에는 시크해 보이는 그이지만 임동혁을 잘 아는 사람은 그가 속정이 깊고 마음 여린 연주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대에 서기 전 많이 긴장하고 스스로 속을 태운다.
“가끔 내가 무대를 여유 있는 마음으로 설 수 있는 때가 올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주위에서 내가 어떤 연주를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위로(?)해 주지만 사실 두려운 건 세상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은 무대조차 많이 떨려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무대에서 즐기고 행복해 질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 힘든가 봐요. 시간이 지나면 서 그런 초조한 마음들이 좀 변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유명 연주자들의 경우도 그렇게 못한 연주가 아닌데 1부 때 조금 실수한 걸 스스로 자책하느라 공연 전체를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만큼 모든 연주자에게 무대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곳이면서 스트레스가 가장 큰 곳이기도 하죠. 이것 역시 견디며 지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연주자에게 성공은 무엇일까? 예술은 자기 탐구를 거쳐 삶의 근원적인 힘을 깨닫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그 힘은 비로소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운명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훌륭한 연주자가 되려면 많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해요. 우선 맨탈이 강해야 할 것 같고, 당연히 음악 앞에 성실해야겠죠.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행운이에요. 그런데 그 행운은 견디는 사람에게 오더라고요. 행운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 하죠.”
임동혁의 음악도 이제는 봄을 지나 어느덧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의 강으로 흐르고 있다. 그 역시 오랜 기다림을 반복하면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이번 슈베르트 독주회를 마치면 피아니스트 아르헤리치와 라흐마니노프 음반작업도 함께 할 예정이다.
“어린 시절의 테크닉을 유지하면서 깊은 감성을 아우를 수 있는 연주를 계속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라는 게 느껴져요. 몸을 써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당연히 테크닉은 부족해 질 수밖에 없거든요. 지금까지 많은 부분에서 제가 하고 싶은 연주를 하고 또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가 있는데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예요. 스포츠 맨 나이로는 거의 환갑에 가까운데 그가 쌓아온 기록은 이미 신기록을 다 넘었죠.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선수고요. 저 역시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 피아니스트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예술은 평생 하는 거라고 하지만 사실 기교적인 부분이 정말 중요해서 서른이 넘어가면 손가락이 이미 달라지죠. 물론 자신이 얼마나 관리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맥락에서 아직까지 저는 무대에서 지금처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그리고 예전보다 음악적으로 분명 나아진 부분들이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예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많았지만 이제는 음악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집중된다고 한다.
“너무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집중하다 보면 나에게 빠지게 되잖아요.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행복, 나의 불행에 너무 연연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면 나를 둘러싼 진짜 세상,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음악의 진짜 모습에 대해 집중하고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죠. 그런 면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 그냥 음악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 좋아요. 슈베르트 음악에는 세상만사가 담겨 있거든요. 우리의 인생, 삶 그 자체죠.”
슈베르트가 노래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밝고 환하고 쓸쓸하고 고독한, 그의 음악 속에 담긴 인생의 모든 노래는 사실 우리 모두의 노래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 중 하나가 조 바꿈이 많다는 거예요. 바로 전 마디까지 장조였다가 그 다음 마디에서는 단조로 바뀌죠.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파격적인 작곡법이에요. 어떻게 보면 지금의 현대 음악 같은 느낌이거든요. 바로 드러내 놓고 감정이 바뀌니까 연주자로서는 당황스러울 때가 있어요. 단조에서 장조로 넘어갈 때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곤 해요. 몇 마디 안에서도 장단이 계속 바뀌기도 하죠. 어쩌면 우리가 겪는 행복과 불행의 모습이 물과 기름처럼 다르지 않은 한 얼굴이 아닐까 싶어요. 슬픔과 기쁨이 경계선에 있으면서도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단조에서 장조로 넘어갈 때가 원래 더 부자연스러운 법인데 그의 작품엔 그런 게 없어요. 이상하게 한 프레이징 안에서 변하면서도 잘 어우러져요. 마치 계절이 자연스럽게 바뀌는 이 세상처럼요. 그래서 슈베르트 음악이 좋아요. 진짜 인생 같아서요.”
한없이 슬프지만 그 슬픔에 빠지지 않고 바라보게 하는 음악. 슈베르트 음악에는 격조 있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슈베르트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수줍고 외롭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의 연주를 하다보면 박력 있고 활달한 낭만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도 많았고요. 그런데도 그의 음악은 비극적이에요. 그러면서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남겨놓죠. 그게 뭘까 많이 생각해 봤는데, 음… ‘사랑’같아요. 저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 역시 사랑이고요. 나를 무조건적으로 아껴주는 사랑. 사실 요즘 저희 집 강아지에게서 그런 사랑을 느끼고 있어요(웃음). 주인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기다려주고 반가워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가 않잖아요. 저에겐 미래의 자식이 그런 존재가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되면 제 음악도 봄처럼 더 따뜻해지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인생을 뒤덮는 슬픔과 상실 속에서도 사랑은 예술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 피아노를 치면서 제가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늘 꿈을 꾸죠. 내가 연주하는 음악 속에 품격 있는 아픔이 깃들기를, 위로가 담기기를, 사랑이 남기를요. 이번 슈베르트 독주회가 그런 무대였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건 아마도 그와 닮은, 닮고 싶은 어떤 것들이 있어서겠죠. 그걸 음악으로 들려드릴게요.”
서른다섯, 인생의 푸르른 여름을 맞은 그가 그려낼 슈베르트 음악은 어떤 것일까? 그동안 임동혁의 음악은 언제나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 속에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고 부서질 듯한 상실의 외로움이 있었고 다시 피어나는 희망이 있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이 첫 구절은 마치 임동혁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철학적인 성찰은 인생을 닮은 슈베르트 연주를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이어질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우리는 모두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말이다. 그의 연주가 우리 마음을 울리는 건 강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임동혁만의 힘이다.
글 국지연 기자
진행 정원 기자
사진 김용호
공연사진 크레디아
의상 브룩스 브라더스, S.T.DUPONT
베이커리&플라워 Cafe k375
임동혁 피아노 리사이틀
3월 7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슈베르트 즉흥곡 Op.142, D935 No.1~4,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FROM HIS FRIENDS- 슈베르트를 보듯, 임동혁을 말하다
임동혁의 주위엔 ‘앙팡테리블’ ‘빛나는 스타 연주자’ ‘쇼팽 스페셜리스트’, 때론 ‘예민하고 까칠한 예술가’ 등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결이 다른 수식어가 공존하는 임동혁의 세계에 기꺼이 함께하는 동료들은 과연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래서 물었다. 임동혁을 아끼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또 임동혁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피아니스트 김정원 | 임동혁은 뜨거운 사람이에요. 내재된 뜨거움이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의 근원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속에 거대한 열기를 품고 있어서 그런지 ‘쿨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동혁 씨는 본인이 지닌 재능이나 잘난 점들을 드러낼 줄도 몰라요. 으스대는 성격이 아니죠. 처음엔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표현들에 당황스러웠지만, 사람을 좋아해서 정도 많고 의리 있는 친구랍니다. 상처도 잘 받고, 걱정도 많고요. 그렇기에 ‘쿨하지 못하다’라는 표현은 그가 너무도 순수하고 정이 많다는 뜻이예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 동혁 씨를 처음 만난 건 2011년 6월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야마하 홀에서였죠. 우연히 마주쳐 처음 인사를 나눴는데, 거침없이 당당하고 솔직한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좋아하고 정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더 많은 외로움을 끌어안고 있나 싶기도 해요. 솔직한 성격 때문에 오해받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이 많고, 정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일 뿐이에요. 주변인들에게 늘 살갑고, 요리도 얼마나 잘 해준다고요.(웃음) 임동혁은 끼와 재능이 충만하고, 색이 짙은 연주자예요. 이번 리사이틀을 통해 많은 분이 임동혁의 슈베르트로 위로 받으시고, 행복한 시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휘자 안두현 | 러시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지휘 레슨에서 처음 동혁 씨를 만났어요. 피아노 레슨을 받기 위해 교수님을 찾던 그가 실수로 제 교실에 들어왔고, 그게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동혁 씨가 18살이었을 텐데, 이미 스타 연주자였기 때문에 제 눈엔 지적인 귀공자처럼 보였죠. 아마 당시에 사람들이 임동혁에게 갖고 있던 선입견도 한몫했을 겁니다. 우린 금세 친해졌고 많은 이야기를 공유했어요. 그리고, 그 편견들이 전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죠. 사람들은 때론 당돌하고 솔직한 그의 표현에 당황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본질에는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않는 솔직함과 누구보다 여리고 인간적인 면이 자리하고 있어요. 호기심도 많고, 생각도 많아 그의 뛰어난 연주가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됐고요. 동혁 씨는 화려하고 멋져 보이지만 품고 있는 상처가 많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움도 지니고 있어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고통과 감성이 있기에 임동혁의 음악이 눈부신 건 아닐까요? 임동혁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에 진심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길 바랄 뿐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 지난번 음반 작업할 때 성도 같고, 남매 같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동혁 씨는 사촌 오빠 같은 분이에요.(물론 정말 친척 관계 아닙니다) 최근, 음반 녹음을 위해 처음 만났을 때에는 사실 어색했어요. 선배 음악가이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우려와 달리 허물없이 대해주셔서 10분 만에 어색함이 날아가 버렸답니다. 음악적으로 소통하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인간적으로 공감해주며 조언해줘서 정말 감사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 | 피아니스트 벤 킴 씨의 리사이틀을 보러 갔다가 처음 동혁 씨를 만났어요. 그날 가진 뒤풀이를 계기로 친해지게 됐죠.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개구쟁이 같기도 했고, 톡톡 튀는 성격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임동혁은 무대를 항상 소중히 여기는 예술가라 부담감에 고통받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가끔 스스로를 육체적으로, 또 심적으로 너무 몰아갈 때가 있더라고요. 사실 전 동혁 씨 지인 중에 가장 재미없는 친구일 거예요. 곁에서 웃음을 주는 동료는 못 되겠지만, 고민을 나누고 쉼터가 될 수 있는 친구였음 좋겠네요. 노력과 고통이 늘 함께하더라도 행복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며 음악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첼리스트 문태국 | 예전에 동혁 씨 대기실에 찾아간 적 있는데, 시크하게 반응하셔서 처음엔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웃음) 그러다 2017년 디토 페스티벌을 통해 제대로 인사를 나눴죠. 한참 형이고, 또 워낙 널리 알려진 큰 음악가인지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먼저 다가와서 살뜰하게 챙겨주고 농담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더라고요. 음악을 대할 때 고뇌와 고심이 많지만, 무대 위에선 음악을 정말 즐기는 듯해 함께 연주함으로써 저도 덩달아 즐거웠답니다. 무대 뒤에선 다시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많은 형으로 돌아오지만요.(웃음) 재치 있으면서도 진심 어린 사람, 제게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그런 사람이에요.
글 정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