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아름다운 투쟁-2

Special Feature- #METOO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의 공연예술

 

흔들리며 균형을 맞춰나간다

사실, 변화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미투(#MeToo)’ 운동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지만, 예술가들은 이미 작품을 통해 현실을 은유하고 있었다.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건강한 신체의 성인 남성’이 시민의 기본 자격처럼 인정되는 현실에 대해, ‘이 사회에는 그들뿐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살고, 그들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체적으로 기능한다’는 메시지를 말해왔다.

연극계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약자에 대한 공감과 인권감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여성·장애인·성소수자·노인 등 ‘성인 남성 시민’의 규격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끌어안고자 미약하나마 노력해왔다. 폭력적 권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왔기에, 부당함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발적인 연대가 일어났고, 그 연대는 여성 뿐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소수자·약자들과 함께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페미니즘이 더 이상 남녀의 성 대결 구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한다.

과거에도 페미니즘이 한 차례 세상을 휩쓸었던 때가 있었지만, 당시의 페미니즘은 ‘여자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투쟁해야 했다. 여자도 남자처럼 머리를 자르고, 바지를 입고, 술을 마시고,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성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 흐르고 있는 페미니즘 담론은 보다 자연스럽다. 이들은 더 이상 ‘여성’이 어때야 하는지 규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지도, 범주화하지도 않는다.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다소 거칠게 설명했지만, 이렇게 변화된 현재를 손희정의 말처럼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로 부르는 이유다. [※리부트(reboot): 주로 영화에서, 전작의 연속성을 거부하고 시리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를 리부트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해석은 상당히 다르다.]

예술 이야기로 돌아가자. 작품 속 젠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대 위에서의 젠더 인식과 무대 밖 현실의 젠더 인식이 상호 영향을 주며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습된 젠더 위계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도, 작품을 만드는 제작진과 아티스트에게도 영향을 준다.

 

지난 1월 피렌체에서 공연된 ‘카르멘’은 카르멘이 죽지 않는 결말을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오페라 | 오페라는 오랜 시간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적 프레임 등 여성에 대한 판에 박힌 대상화가 만연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오페라 속 여자들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나비부인’의 초초상, ‘라보엠’의 미미) 혹은 엄청난 성적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역할(‘카르멘’의 카르멘, ‘살로메’의 살로메 등)로 그려진다.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활발했다. 프랑스 철학자 카트린 클레망은 저서 ‘오페라: 실패한 여성(L’Opéra ou la Défaite des femmes, 1979)’에서 전통적인 오페라 플롯에서 여성 캐릭터가 다뤄지는 방식을 논했다. 페미니즘적 시선에 기반한 클레망은 카르멘·초초상·이졸데·멜리장드 등 오페라 속 여성들의 문자 그대로의 죽음뿐 아니라, 여성 캐릭터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그려지는지 분석했다. 등장인물에 의해, 창작자에 의해 너무나 손쉽게 죽임을 당하며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지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지적했다.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그래서 바뀔 것 같지 않던 오페라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장착하고 있다. 지난 1월 피렌체 마지오 피오렌티노 극장에서 공연된 비제 ‘카르멘’은 원작과 다른 결말을 선보이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원작에서는 카르멘이 죽임을 당하지만, 이탈리아의 남성 연출가 레오 무스카토는 자신의 죽이려는 돈 호세의 총을 빼앗아 그를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바꿨다. 무스카토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원작을 훼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다수 유럽 언론은 그의 새로운 ‘카르멘’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작품은 전 공연 매진을 기록했다.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선보인 뮤지컬 ‘레드북’

 

 

 

 

 

 

 

 

 

 

 

 

 

| 뮤지컬 | 오페라보다는 짧은 역사지만, 뮤지컬 역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안일한 인식을 가졌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성 중심 서사에서 주변인으로 머무는 여성, 남성적 시선에 입각한 비현실적 이미지에 가둬진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가 넘쳐난다. ‘오페라의 유령’ 속 크리스틴과 ‘레미제라블’의 코제트는 남성의 보호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보호자 역할의 남성이 아버지에서 연인으로 이동할 뿐이다.
최근 창작 뮤지컬 작품 중 화제의 중심에 오른 ‘레드북’은 2017년 초연의 성공 이후 올해도 재공연되고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자신의 이야기를 야한 소설로 쓰는,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 안나는 틀에 박힌 기존의 여성 캐릭터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성 중심 서사와 남배우 중심의 구성에 대해, 뮤지컬 창작자들은 ‘관객의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이들이 좋아하고 주목하는 남배우 중심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나태한 변명에 ‘레드북’의 흥행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소수자와 장애인 등 소외된 타자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2017 이반검열’

 

 

 

 

 

 

 

 

 

 

 

 

 

| 연극 | 서두에서 말했듯, 연극계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페미니즘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지난 2017년은 다양한 소재와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다. 남산예술센터는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구자혜 연출)를 통해 예술계 성폭력 문제를 다뤘고, ‘2017 이반검열’은 동성애자·트랜스젠더·세월호 유가족·장애인 등 소외된 타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한 국립극단 청소년극연구소가 제작한 ‘좋아하고 있어’는 여성 청소년의 동성애를 감각적으로 다뤄 지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밖에도 ‘페미리볼버’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아담스 미스’ 등 페미니즘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소개됐다. 그동안 연극계가 매진했던 세월호와 블랙리스트 이슈가 어느 정도 해갈됨에 따라, 연극계의 다음 정착지가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서사 일변도의 작품과 다양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연극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한정된 여성 캐릭터, 징벌의 상징으로서의 장애, 노인 소외 등 아직도 연극이 다양한 소재를 끌어안지 못한다는 것이다. ‘없으면 직접 만든다’고, 이러한 현실에 갈증을 느낀 연극인들은 오는 6월 ‘페미니즘 연극제’를 통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펼친다. ‘페미니즘 연극제’ 기획자 나희경 PD와의 짧은 인터뷰를 전한다.

 

이정은(이하 이)_ 페미니즘이 연극계의 화두로 자리 잡고 있는데.

나희경(이하 나)_ 2017년 서울에서 공연된 페미니즘적 연극을 세어보니 약 20편 정도다.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해 동안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열리는 작품의 수와 비교해보면, 결코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구의 절반은 여성인데,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 중심 서사를 담은 작품은 전체 공연의 10%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퀴어와 노인, 이주민,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는 당연히 더욱 적다.

이_ 공연의 서사와 캐릭터가 다양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나_ 남성의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쉽게 쓰고 쉽게 소화된다. 그것이 공연의 ‘디폴트’다. 하다못해 노숙자 이야기를 써도 여성 노숙자 이야기는 없다. 여성·장애인·퀴어 등 ‘일반 남성’이 아닌 존재들은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러한 인식에서부터 차별이 시작되는데 말이다. 극중 남성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해서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진 않다. 하지만 남성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사(前事)가 요구된다(이는 극 바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남성 작가는 “난 여자에 대해 잘 못 쓰겠다”고 내게 하소연했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쯤이었다. 그들에게 “그냥 남자로 생각하고 쓰고, 나중에 그 캐릭터의 성별만 여자로 바꿔보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부분만 신경 쓰면 된다”고 말했다.

이_ 여성 연극인의 수가 늘어나면 도움이 될까?

나_ 젊은 여성 연극인은 지금도 많다. ‘뉴스테이지’ 등 신진 창작자 발굴 무대에 오르는 연출가나 극작가들을 봐도, 여성의 비율이 높다. 하지만 결혼·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며 이들은 서서히 탈락된다. 연극뿐 아니라 사회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남성에게는 아무도 일과 가정을 선택하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문제로 고민하는 주체는 아직도 여성이다. 어느 40대 배우는 ‘학교 여자 동기들 중 지금까지 연기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연출가도 마찬가지다. 기업으로 치면 고위 임원급인, 중견에 안착한 여성 연출가는 대부분 미혼이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다른 하나를 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이_ ‘페미니즘 연극제’를 통해 페미니즘적인 작품을 여러 편 선보일 예정인데.

나_ 이번 연극제의 소재는 퀴어와 싱글여성, 세대 간의 갈등과 소통, 장애인 등 다양하다. 그것들이 모두 페미니즘의 범주에 들어가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여성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한 때다. 작든 크든, 온갖 이야기를 일단 풀어놓아야 한다. 다양한 소재를 통해 생각거리를 던지고, 그것들을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

 


예술을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

 

 

윤리적 논란에 휩싸인 예술가와 작품,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스캔들이 아닌 범죄다. 전 세계적으로-특히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촉발되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을 계기로, 예술가의 범죄를 기행이나 일탈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구별해야 한다’ ‘그 당시에는 용인되는 일이었다’ 같은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시간에 정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적어도 대중은 이제 예술가를 ‘뭘 해도 용서받는 별종’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재평가되고 있는 예술가와 그의 작품들

 

나치당원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근현대 예술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 중 하나는 ‘나치’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음악은 히틀러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활발히 활용됐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치의 핵심 선전도구였다. 괴벨스가 설립한 제국음악원의 초대 회장은 R. 슈트라우스였고, 초대 부회장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였다. 멩엘베르흐와 크나퍼츠부슈, 뵘 역시 나치의 비호를 받으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리고 나치 당원이었을 뿐 아니라 비밀경찰요원으로 활동하며 음악가들을 감시한 카라얀은 엄청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후대의 감상자들은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조심스럽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예술가의 과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음악에 정통한 영국의 지휘자 겸 리코더 연주자 필립 피켓의 과거 성범죄 사실도 음악계에 충격을 안겼다. 길드홀 음악연극학교에서 리코더 레슨 중 16세 소녀 제자를 강간한 사실을 포함, 1970~1980년대에 걸친 수차례의 성범죄가 밝혀졌다. 그는 2015년 징역 11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다.

 

추문으로 메트오페라에서 파면당한 제임스 러바인

 

 

 

 

 

 

 

 

 

 

 

 

 

그리고 지난 3월 12일, 1976년부터 2016년까지 40년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지휘자 제임스 러바인이 명예음악감독직에서 파면됐다. 재직 당시 어린 소년 및 젊은 직원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이 메트 오페라 자체 조사에서 확인됐기 때문이다. 러바인은 일방적인 해고라며 메트 오페라를 상대로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한 상태지만, 유수의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며 대중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메트 오페라 온라인몰의 지휘자 섹션에서는 ‘제임스 러바인’ 카테고리가 삭제되었다.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마나오 투파파우’(1892)

 

 

 

 

 

 

 

 

 

 

 

 

 

 

 

미술계 역시 예술가와 그의 작품의 평가를 놓고 진통을 겪고 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1891년 고갱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타히티로 향해, 원시와 야생의 생명력을 담은 작품들을 그렸다. 하지만 동시에 고갱은 그곳에서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맺으며 아이를 낳게 하고 유기한 채 몇 년 후 말없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1993년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은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에서 고갱의 타히티 시리즈에 대해 ‘식민주의와 관광주의로 점철된, 종주국 백인 남성과 식민지 유색인 여성의 억압 코드’로 지적한다. ‘마나오 투파파우(망자의 혼이 지켜보다)’가 대표적인 예이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오마주한 작품으로 유명한 이 그림에서 침대에 엎드려 있는 소녀 ‘테후라’는 당시 14세로, 고갱과 동거한 10대 여성 중 하나였다. 고갱은 어느 글에서 작품 속 테후라에 대해 “성교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음란하고 수치심을 모른다”고 적었다. 또 다른 글에서는 테후라와 “결혼했다”고 언급하기도 했지만, 프랑스에 있는 본처에게 꾸준히 안부편지를 쓴 정황으로 비추어볼 때 그가 테후라를 아내로 인식했을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고갱의 비도덕적인 행적에 대한 비판은 그의 작품으로 번졌고, 지난 2010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고갱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자 일각에서는 보이콧을 주장하기도 했다.

 

에곤 실레 ‘앉아 있는 소녀의 누드’(1910)

에로티시즘이 담긴 독창적인 드로잉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는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성적인 매력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가난한 가출소녀들을 작업실로 불러 누드화를 그렸다.

“실레는 용돈과 친절함으로 어린 야수들을 안심시켰다. 아이들은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리던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착한 아저씨가 주는 용돈에 만족하며 우리 안에 든 동물처럼 자유롭게 행동했다. 화가는 그 모습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에로틱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에곤 실레의 친구 귀테르슬로가 묘사한 실레의 작업실 풍경, 프랭크 화이트포드 ‘에곤 실레’ 중)

1912년 실레는 미성년자를 납치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누드모델 중 하나였던 소녀 혹은 소녀의 아버지가 경찰에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경찰이 그를 체포하러 갔을 당시, 실레의 작업실에는 아동 및 미성년자의 누드화가 100여 점 발견되었다. 21간의 구금 후 풀려난 그는 이후 아동 누드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납치에 대해서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미성년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그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었다.

 


예술은 시대와 함께 간다

3월 20일 현재, 문화체육관광부는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시인 고은과 연출가 오태석, 영화감독 김기덕의 서훈 취소에 대해 관련 규정을 검토 및 논의 중이다. 고은은 2002년, 김기덕은 2003·2004·201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오태석은 2014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교육부는 연출가 이윤택과 오태석, 고은, 김기덕에 대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 및 수정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한들, 삶이 아름답지 못한 예술가는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다. 예술가 본인과 함께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가치도 땅에 떨어지게 된다. 엄중해진 대중의 시선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글 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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